<colbgcolor=#0047a0> 출생 | 1909년 12월 25일 |
경상북도 예천군 예천면 백전동 | |
사망 | 1939년 10월 5일 (향년 29세) |
경성부 | |
상훈 | 건국훈장 애국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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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17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김기석은 1909년 12월 25일 경상북도 예천군 예천면 백전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1924년 4월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26년 11월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동맹 휴교를 단행할 때 가담했다가 퇴학당하여 예천으로 귀향하였다.1928년 8월 도쿄로 건너가 신문 배달 및 제지공장 직공 등으로 일하였다. 1931년 1월 30일 도쿄지방재판소에서 상해죄로 기소되어 징역 3월, 집행유예 3년을 언도받았다. 1931년 2월 귀국한 후 같은 해 12월 중앙일보사 예천지국 기자, 1933년 7월 조선중앙일보사 예천지국 총무 겸 기자로 활동하였다. 같은 해 8월 창립된 예천공립보통학교 동창회에서 서무부를 맡아 활동하였다.
1932년 6월 예천에서 한일청·박호철(朴鎬哲) 등과 함께 ‘영주군 공산주의자협의회’의 김동필(金東弼)[1]·김봉호(金鳳鎬)·김준상(金俊相) 등과 교류하였다. 이들과 함께 예천에서 혁명적 농민조합을 결성하고자 노력했으나, 영주군 공산주의자협의회 활동가들의 검거로 좌절되었다.
이후 같은 해 11월 예천군 예천면 백전동 자택에서 한일청·박호철·윤우식(尹雨植)·황창섭 등과 함께 비밀결사 예천무명당을 결성하였다. 예천무명당은 1935~36년경 국제적 위기가 닥칠 것이라고 내다보고 무명그룹을 결성한 것이었다.
그는 예천무명당의 선전부 책임을 맡아 예천우편소를 통해 직업별 책임자들과 연락을 취하고 동지 규합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1933년 6월경까지 이호석(李鎬錫) 등을 가입시키고, 사방(砂防)그룹 등 하부조직을 결성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또한 직접 이홍기·이병기·송일현 등과 함께 독서회를 꾸려 활동하기도 했다.
그러나 1934년 3월 동지들과 함께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같은 해 7월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치되었다. 같은 해 12월 예심이 종결되어 공판에 회부되어, 1935년 5월 10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미결구류 120일 산입)을 언도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즉시 공소를 제기했으나, 1936년 5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징역 3년(미결구류 370일 산입)이 확정되었다. 하지만 이 역시 불복하여 한일청과 함께 즉시 상고를 제기했으나, 같은 해 10월 1일 상고를 취하하였다.
그 후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그는 1938년 9월 26일 형 집행 만기로 석방되었다. 1938년 7월 15일 대구형무소장의 보고에 따르면, 그는 이른바 심신모약자(心神耗弱者, 심신미약자)로서 공주형무소로 집금(集禁)할 필요가 있는 자로 분류되었다. 그렇게 만기 출옥한지 1년여 만인 1939년 10월 5일 경성부에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7년 김기석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