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김경념(金敬念) |
자 / 호 | 의전(義田) / 신암(愼菴) |
본관 | 안산 김씨[1] |
생몰 | 1872년 10월 30일~1950년 9월 29일 |
출생지 | 평안도 용천도호부 양상면 용덕동 (현 평안북도 피현군 충렬리) |
사망지 | 충청북도 옥천군 |
추서 | 건국훈장 애족장 |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김경념은 1872년 10월 30일 평안도 용천도호부 양상면 용덕동(현 평안북도 피현군 충렬리)에서 김정락(金定洛)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5살 때 한문과 서예를 익혔고, 20살 때 사서삼경을 익혔으며, 독학으로 역사학과 법학, 경제학을 배웠다. 1897년 신문화 수입을 주창하면서 부조금제의 폐지 등을 강조했으며,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된 뒤 한국인 자제들에게 민족의식을 일깨우기 위해 옥성, 홍명, 오봉, 선화, 남제소학교를 건설했으며, 최광옥과 함께 각처에 초등학교 및 강습소를 설치하여 교육자를 양성하고 청소년 교육에 힘썼다.1908년경 안창호, 양기탁, 김구, 전덕기 등이 주도하는 신민회에 가입하여 비밀결사와 국권회복의 모의 및 국내외 항일 투쟁을 전개했다. 그는 장남인 김청달(金淸達)을 상하이에, 차남인 김명달(金明達)을 만주에 파견했다. 그러나 이 사실이 발각되면서 몇 달간 옥고를 치러야 했다. 이후 1919년 3.1 운동이 발발하자, 그는 조병준, 백일진(白日鎭) 등과 함께 향리에서 만세 시위를 주동하였으며, 중국 봉천성 안동현 이륭양행 밀실에서 양준명(梁俊明) 등과 함께 〈독립신문〉 지방판을 간행하여 만주와 국내에 배달해 항일정신을 각성시키려 했다.
그러나 1919년 4월 국내 애국지사들이 상하이와 만주로 망명할 때 그들이 압록강을 건널 수 있도록 안내한 것이 일제 경찰에게 발각되어 장남 김청달, 삼남 김삼달(金三達)과 함께 체포되어 1년 반 동안 옥고를 치러야 했다. 그 후 독립자금을 마련하여 10여 차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송금했으며, 1920년에는 임시정부 연통제(聯通制)의 용천군 참사(參事)에 임명되어 군자금 모집 및 독립군에 대한 교통 편의를 제공하다가 체포되어 평양 감옥에서 몇 달간 복역했다. 출소 후 기독교에 입교했으며, 1923년에는 선교사 매큔의 요청에 따라 선천의 신성중학교, 보성여학교의 교원이 되어 학생들의 애국정심을 함양시켰다.
8.15 광복 후, 그는 반탁 운동에 참가했고 개성에 있는 3남 김삼달의 자택에서 〈대한독립사〉를 편찬했다. 그러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충청북도 옥천군에 있는 장남 자택에 피신했다가 1950년 9월 29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김경념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1] 상호군 암(巖)-의주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