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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晉)의 정경(正卿)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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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483D8B> 극헌자 郤獻子 | ||
성 | 희(姬) | |
씨 | 극(郤) | |
휘 | 극(克) | |
아버지 | 극성자(郤成子) 극결(郤缺) | |
생몰 기간 | 음력 | 기원전 ???년 ~ 기원전 58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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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춘추시대 진(晉)나라의 경(卿). 사회의 뒤를 이어 집정이 되었다. 미계 전투에서 제나라를 상대로 대승을 거둔다.몸에 불구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사마천의 사기(史記)에서는 곱사등이, 곡량자(穀梁子)의 춘추곡량전에서는 애꾸눈, 유향(劉向)의 설원(說苑)과 전국책(戰國策)에서는 절름발이 등 묘사가 전부 제각각이다. 소설 열국지는 사기의 곱사등이설을 채택했다.
본 문서는 춘추좌씨전에 근거하여 작성되었다
2. 생애
기원전 597년, 필 전투에 상군의 부장으로 참전한다. 진나라가 위기와 조전을 사신으로 보내자 극헌자는 "유감을 품은 두 사람이 적진으로 갔으니 대비하지 않으면 반드시 패하리라"라고 말한다. 그의 말대로 진군은 초군에게 대패한다.기원전 592년, 진 경공이 극극을 제나라에 보내 회합에 소집했다. 제 경공은 곁방에 휘장을 두르고 모친이 그 뒤에서 극극을 엿볼 수 있게 했다. 절름발이였던 극극이 계단을 오르는 모습을 보고 제 경공의 모친이 웃고 말았다. 극극은 분노하여 밖으로 나오면서 복수하지 못한다면 황하를 건너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극극은 귀국해 제나라 정벌을 청했지만 경공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극극이 자신의 사병을 거느리고 제나라를 치겠다고 요청했지만 역시 허락하지 않았다.
같은 해, 진나라의 정경 범무자가 나이를 핑계로 자리에서 물러나기를 청했다. 극헌자가 이어서 집정이 되었다.
기원전 589년, 제나라와 싸우던 위나라와 노나라가 진나라로 와서 출병을 요청했다. 진 경공이 700대의 전차를 낼 것을 허락하자 극극은 자신이 선대부에 비해 전쟁에 무능하니 800대의 전차를 허락해달라고 요청한다. 경공이 이를 수락했다.
6월 임신일(16일), 연합군이 미계산 기슭에 이르렀다. 제 경공이 사자를 보내 싸움을 청했고 극극이 수락했다.
계유일(17일), 양군은 안鞌에 진을 치고 대치했다. 극극은 전투 중 화살에 맞아 피가 신발까지 흘러내렸지만 고통을 참고 북을 치며 독려했다. 결국 진나라가 대승을 거둔다.
제 경공이 도망가는 중 전차가 나무에 걸려 추격해온 진나라의 한궐에게 잡히고 만다. 한궐이 경공을 극헌자한테 바쳤다. 하지만 그는 경공이 아니라 경공의 거우인 봉축보였다. 극극은 봉축보를 죽이려 했으나 생각을 바꿔 죽음을 무릅쓰고 군주의 화를 면하게 한 사람을 죽이면 상서롭지 않다고 말하며 그를 사면했다.
제 경공은 국좌를 사신으로 파견하여 기紀나라의 보물, 벽옥, 땅을 뇌물로 바치며 강화를 청했다. 진나라는 수락하지 않고 소동숙자[1]를 인질로 주고 제나라 안의 모든 땅의 이랑을 동쪽으로 내라고 요구했다.[2] 제나라에겐 모욕적인 요구였기에 당연히 제안을 거절했다. 그러자 노나라와 위나라가 진나라를 설득했고 진나라는 강화를 수락했다.
같은 해 9월, 위 목공이 타계했다. 진나라의 극극, 사섭, 난서는 전장에서 귀환하는 길에 조문했기 때문에 대문 밖에서 곡했다.
진군이 귀국하고 극극이 알현하자 경공이 극극의 공로라며 치하했다. 극극은 군주의 가르침과 여러 장수들의 공로지 자신이 수고를 한 것이 아니라고 겸손하게 대답했다. 이어서 사섭과 난서가 순서대로 경공을 알현했고 경공은 똑같이 그들을 치하했다. 그들 역시 상관의 공로이고 병사들이 명령을 잘 따랐을 뿐이라며 겸손하게 대답했다.
기원전 588년,극극은 위나라의 손량부와 함께 장구여[3]를 정벌했고 장구여는 궤멸했다.
같은해 제 경공이 진나라에 조견하여 옥을 바칠 때, 극극이 제 경공에게 그가 비웃음을 샀던 일에 대해 원한을 표출했다. 이 기사를 끝으로 극극은 더이상 언급되지 않으므로 기원전 588년과 기원전 587년 중에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난서가 극극을 대신하여 중군을 지휘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