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08 19:48:02

폴가르 줄러

귤라 폴가르에서 넘어옴
파일:Polgár Gyula.jpg
이름[1] 폴가르 줄러
(Polgár Gyula)
생년월일 1912년 2월 8일
사망년월일 1992년 6월 26일
국적 파일:헝가리 국기.svg 헝가리
출신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키슈텔렉
포지션 레프트 하프백, 풀백
신체조건 178cm / 72kg
등번호 -[2]
소속팀 MTK 헝가리아 (1930-1931)
부더이 11 (1931-1933)
페렌츠바로시 TC (1933-1944)
MTK 헝가리아 (1945-1946)
AC 마젠타 (1946-1948)
감독 APIA 라이히하르트 (1957-1960)
멜버른 헬라스(1961-1962)
APIA 라이히하르트 (1964)
세인트 조지 부다페스트 (1968)
국가대표 26경기 2골 (1932-1942)



1. 개요2. 생애
2.1. 선수 생활2.2. 이후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4. 수상
4.1. 클럽4.2. 국가대표4.3. 개인4.4. 감독

[clearfix]

1. 개요

헝가리 출신의 축구 감독.

2. 생애[3]

2.1. 선수 생활

2.1.1. 클럽

폴가르는 고향팀을 연고로 하는 키슈텔레키 TI에서 축구와 인연을 맺었다. 1930년 MTK 헝가리아에서 데뷔한 이후 2년간의 부더이 11 생활을 거쳐 자신의 클럽 생활 중 전성기를 보내게 될 페렌츠바로시 TC에 입단하게 되었다.

페렌츠바로시에서 폴가르는 기존 멤버들인 샤로시 죄르지, 톨디 게저, 터카츠 요제프 등과 호흡을 맞추며 4회의 헝가리 챔피언 자리에 올랐다. 그 외에도 많은 우승컵을 차지하며 성공적인 선수 생활을 보냈다.

11년간의 페렌츠바로시의 생활을 마친 폴가르는 MTK 헝가리아로 다시 이적해 당시 어린 공격수였던 히데그쿠티 난도르와 호흡을 맞추기도 했다. 1946년에는 이탈리아의 마젠타로 이적하였고 1948년 선수 은퇴를 선언하였다.

2.1.2. 국가대표팀

폴가르는 1932년 9월, 체코슬로바키아를 상대로 국가대표팀 데뷔전을 치렀고 데뷔골의 희생양은 오스트리아였다. 프라터슈타디온에서 열린 이 시합에서 헝가리는 폴가르의 골에 힘입어 2대2 무승부를 기록하였다.

폴가르는 헝가리 대표팀으로 2번의 월드컵에 참가했는데 이탈리아 월드컵에서는 아예 출전 기회를 잡지 못했고 프랑스 월드컵에서는 결승전에 출전하였다. 코라니 러요시 대신 풀백으로 출전한 폴가르는 비로 샨도르와 호흡을 맞췄지만 헝가리는 디펜딩 챔피언 이탈리아에 2대4로 패배했다.

폴가르의 마지막 A매치는 1942년 11월의 스위스전이었고 헝가리는 홈에서 2대0으로 승리하였다.

2.2. 이후

1956년의 헝가리 혁명 이후 폴가르는 오스트레일리아로 이민을 떠났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이탈리아 이민자들의 축구팀인 APIA 라이히하르트에서 감독을 맡았다. 호주에서는 1964년 뉴사우스웨일스 주 챔피언과 전국 대회 준우승에 라이히하르트를 올려놓기도 했다.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정확한 패스를 뿌릴 수 있는 수비수. 프리키커로 종종 나설 정도로 킥력도 좋았다.

4. 수상

4.1. 클럽

  • 넴제티 버이녹샤그 I 우승 4회: 1933–34, 1937–38, 1939–40, 1940–41(페렌츠바로시 TC)
  • 마자르 쿠파 우승 4회: 1934–35, 1941–42, 1942–43, 1943–44(페렌츠바로시 TC)
  • 미트로파 컵 우승 1회: 1937(페렌츠바로시 TC)
  • 넴제티 바이녹사그 I 준우승 6회: 1930–31(MTK 헝가리아), 1934–35, 1936–37, 1938–39, 1943-44, 1945(페렌츠바로시 TC)
  • 넴제티 버이녹샤그 I 준우승 4회: 1934–35, 1936–37, 1938–39, 1943–44(페렌츠바로시 TC)
  • 미트로파 컵 준우승 3회: 1935, 1938, 1939(페렌츠바로시 TC)

4.2. 국가대표

4.3. 개인

4.4. 감독

  • 내셔널 프리미어 리그 준우승 1회: 1964(APIA 라이히하르트)
  • 오스트레일리아 컵 준우승 1회: 1964(APIA 라이히하르트)


[1] 헝가리 출신 인물은 성+이름의 조합으로 이름을 표기하고 항목명도 그에 따랐다. 다만 인터넷 검색을 하려면 서양식으로 이름+성의 순으로 검색하는 게 더 찾기 쉽다. 서양식 이름으로도 이 항목에 들어올 수 있다.[2] 이 시대에는 등번호가 존재하지 않았다.[3] 출처: 위키피디아, 11v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