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구금룡(具今龍) |
생몰 | 1896년 1월 30일 ~ 몰년 미상 |
출생지 | 경기도 연천군 백학면 두일리 |
사망지 | 미상 |
추서 | 건국훈장 애족장 |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구금룡은 1896년 1월 30일 경기도 연천군 백학면 두일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전국 각지에서 3.1 운동이 전개되자 두일리 장날인 3월 21일에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결심하고 동지를 포섭하는 한편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인쇄, 제작했다. 이후 그는 미산면 인사들과 만세시위를 계획해, 먼저 두일리에서 만세시위를 일으킨 후 여세를 몰아 미산면까지 행진하여 그곳에서 미산면의 인사들과 합세하여 만세시위를 크게 벌이기로 합의했다.3월 21일 거사 당일, 구금룡 등은 두일 장터에서 200명의 군중을 규합하여 독립만세를 고창한 뒤 면사무소와 헌병주재소로 향하여 격렬한 항일시위를 전개하였다. 이 때 구금룡은 직접 소방용 경종을 울리면서 주민들의 시위 참여를 독려하였다. 또한 시위대는 시위를 저지하려는 면사무소 직원들에게 독립만세를 고창할 것을 요구하였고, 면직원이 이를 거절하자 면사무소의 집기를 파괴하였다. 그리고 친일적 인사로 지목되던 면장을 시위대 앞으로 불러내어 만세를 부르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시위를 탄압하는 일본 헌병에 대항하여 투석으로 맞서는 한편 주재소의 기물을 파괴했다. 그리고 저녁에는 미산면 마전리로 행진하여 학교 앞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했다.
이 일로 경찰에 체포된 그는 1919년 5월 2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및 소요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공소했지만 7월 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이후의 행적 및 사망년도, 사망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구금룡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