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본관 | 수안 계씨[1] |
출생 | 1899년 1월 17일 |
평안북도 선천군 | |
사망 | 1987년 12월 30일 |
서울특별시 강동구 길동 강동성심병원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671호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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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계성언은 1899년 1월 17일 평안북도 선천군에서 아버지 계인영(桂仁榮)과 어머니 연안 차씨 차운호(車運鎬)의 딸 사이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그는 일찍이 중화민국 봉천성 동변도(東邊道) 통화현(通化縣)으로 망명했으며, 1919년 만주에서 벌어진 3.1 운동에 가담했다. 이후 1920년 11월에는 청산리 전투에 참가했으나 일제가 간도 참변을 단행할 때 아내 최진신(崔眞信)이 살해되었다.[2] 1929년부터 1932년 사이에는 국민부 중앙의회 부의장으로서 군자금 조달에 적극 노력하였으며, 1933년에는 조선혁명당에 입당하여 항일운동을 계속 전개했다.
이후에도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락하며 군자금 모금활동을 전개하였으며, 통화현에서 배영학교(培英學校) 교장을 지냈으며, 교회 장로로서 활동하다가 1941년 만주신학교가 설립되자 이사에 취임하기도 했다.
8.15 광복 후 주화대표단 총무국장을 지내다가 서울로 귀환했고, 1987년 12월 30일 서울특별시 강동구 길동 강동성심병원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8세.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계성언에게 대통령표창을 수여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의 유해는 당초 경기도 양주군 진접면(현 남양주시 진접읍) 기독교 교회묘지에 안장되었다가, 1997년 10월 16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에 이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