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1년 8월 16일 경상남도 양산에서 태어났다. 유년 시절부터 독립운동가인 윤현진으로부터 항일 정신과 자주 독립 정신에 대해 배웠다. 이후 1919년 3월 27일 양산군[1] 양산읍에 장이 선 날 엄주태, 박삼도, 전병건, 정주봉 등 다수의 독립운동가와 만세 시위 운동을 벌였다. 장터에 모인 3,000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벌이다가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1919년 4월 22일 부산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고 이후 5월 28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8개월형을 선고받았다. 상고를 하였지만, 7월 12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일본 대학에 입학하였다가 1923년 귀국한 후 양산청년회관 건립 등과 같이 조국 발전에 협력하였고, 『동아일보』 양산지국장, 잡지 『개벽』의 지사장, 3·1 동지회 사무국장 등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