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47a0> 출생 | 1911년 |
함경남도 홍원군 학천면 | |
사망 | 1935년 |
만주 | |
직업 | 독립운동가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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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항일운동가. 소련의 지시를 받은 한국의 공산주의자. 200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강목구는 1911년경 함경남도 홍원군 학천면에서 태어났다. 그는 서울로 상경해 보성고등보통학교에 재학하다가 동맹휴학을 주도하다 퇴학당하고 경신학교로 전학했다. 그러다가 1929년 10월경 학교 당국의 학생회 자치권 박탈에 항의하며 반대투쟁을 전개하고 독서회를 조직해 광주학생항일운동 동조 시위 활동을 벌이다가 다시 퇴학당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1931년 5월, 강목구는 홍원농민조합 소년부장을 맡아 조세 부과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를 준비했다. 그러다가 9월 사전에 일제 경찰에게 발각되자, 검거를 피해 소련으로 탈출했으며,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모스크바로 갔다. 1931년 11월 모스크바에서 이상희(李相熙)와 함께 국제공산청년동맹 동양부에 고려공산청년회 대표 자격으로 출석해 조선 문제에 대해 협의했으며, 1932년 1월 조선공산청년동맹 재건 방침을 규정한 <1월 테제, '조선 공청 청년제군에게 고함'> 작성에 참여했다. 이후 소련 국제공산청년동맹 지시에 조선공산청년동맹을 재건하고자 정태옥, 오기섭(吳淇燮) 등과 함께 국내로 잠입하였다.
강목구는 함흥을 중심으로 농어촌과 공장, 광산, 철도 노동자 등을 포섭해 조직 재건을 추진하다가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어 조사를 받다가 1932년 12월 함흥경찰서를 탈주했다. 그 후 신분을 숨긴 채 각처를 떠돌던 그는 1933년 1월 유축운(柳丑運)과 접촉해 그에게 함흥평야 일대의 조선공산청년동맹 재건운동의 책임을 부여했다.
1934년, 강목구는 이경덕 등과 함께 적색노조 재건을 위해 제4차 태평양노동조합사건을 벌이다가 일제에게 발각되어 20여 명의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러나 그해 5월에 또 다시 탈옥 했으며, 공청 재건의 후계를 강탄구, 진봉섭에게 맡기고 블라디보스토크로 탈출했다. 이후 만주의 임구(林口)로 피신했다가 1935년경에 장티푸스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