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 |
출생 | 1915년 6월 29일[1] |
경상남도 남해군 남해면 남변리 216번지[2] | |
사망 | 미상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02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1915년 6월 29일 경상남도 남해군 남해면(현 남해군 남해읍) 남변리 216번지에서 태어났다.일찍이 공산주의 사상에 심취하게 되어 1932년 11월 남해군 남해면에 있던 김기두(金琪斗)의 집에서 비밀결사 조선공산주의자통일동맹을 조직하여 활동하던 중 1933년 9월 '전북 적색교원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취조를 받았다. 석방된 뒤에는 남해보건동지회에 가입해 표면적으로는 체육 장려를 위해 활동하면서 비밀리에 공산주의자를 양성하는 데에 일조했다.
그러나 곧 체포되어 1934년 6월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전주지방법원 공판에 회부되었고, 1935년 10월 25일 전주지방법원 형사부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아 10월 28일 출옥하였다.
출옥 후에는 동아일보사 남해지국에 입사해 1935년 12월 13일 사진반 기자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인 1936년 5월 1일 사직했다. 이후의 행적 및 사망년월일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202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위 활동을 독립운동 공적으로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3. 독립유공자 서훈 논란
조선공산주의자통일동맹이 항일운동의 일환이었느냐가 쟁점이 되었는데, 1924년 설립된 조선청년총동맹(朝鮮靑年總同盟), 1929년의 조선공산당재건동맹의 후신이라는 것이 정설이다.이에 여러 사회주의 인사들이 일제에 항거한 독립유공자로 인정되었고 이러한 일환으로 감상두도 2020년에 국내항일 독립유공자로 선정되어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이때문에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로 분류되나 그가 실제로 독립운동을 했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 그의 정확한 국내항일 행적은 국가보훈처에서 2022년 상반기에 발간하는 2020년 포상 독립유공자 공훈록(제26권)에서 나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