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7-01 15:54:13

간자 공성전

나디르 샤의 원정
{{{#!folding [ 펼치기 · 접기 ] 호타키 축출 오스만-페르시아 전쟁 (1730 ~ 1735)
담간 전투 머체호트 전투 바그다드 공성전 사마라 전투 키르쿠크 전투 간자 공성전 예게바르드 전투
호타키 멸망전 인도 원정 오스만-페르시아 전쟁 (1743 ~ 1746)
칸다하르 공성전 카이베르 고개 전투 카르날 전투 모술 공성전 다게스탄 원정 카르스 전투
}}} ||

파일:600px-Makou_border_city_of_Armenia_by_Eugène_Flandin.jpg

아르메니아-캅카스 산악 국경지대를 묘사한 그림

1. 개요2. 배경3. 전투 경과
3.1. 연이은 실패3.2. 러시아 제국의 손길3.3. 결국은 포위전이 답이다
4. 결과

1. 개요

간자 공성전(Siege of Ganja)은 1734년 11월 3일부터 1735년 7월달까지 간자 지역에서 진행된 공성전이며, 나디르 샤가 벌인 공성전 중에서도 가장 고전한 싸움이기도 했다. 아제르바이잔 지역에 있는 작은도시 간자는 오늘날 아제르바이잔의 도시이기도 하다.

2. 배경

키르쿠크 전투 이후, 다급해진 바그다드 총독 아흐마드 파샤는 나디르 샤와 단독으로 협상을 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를 보다못한 오스만 제국 중앙 정부에서 아흐마드 파샤를 해임시키고 새로운 바그다드 총독으로 압둘라 코프룰루를 임명해버렸고, 따라서 협상은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이에 나디르 샤는 분노하였고, 한차례 국내반란 진압 이후 서북쪽의 캅카스 지역으로 발길을 돌렸다.

나디르 샤의 일부 병력이 캅카스 지역 원정을 통해 레즈긴 부족의 수장 소르카이의 세력을 몰아내는 동안, 1734년 11월 3일에 아제르바이잔 지역의 작은도시 간자(Ganja) 요새지역을 노렸다.

3. 전투 경과

1734년 11월 3일 나디르 샤는 간자 요새를 포위하였다. 간자 요새는 지형이 험한 곳에 있었으나, 1년전에 공성을 시도했던 바그다드 지역보다는 작은 도시였기에, 나디르 샤는 적극적으로 공격을 퍼붓기 시작하였다.

3.1. 연이은 실패

그러나, 아무래도 간자 요새는 유럽식 설계로 되어있었던 모양이다. 간자 요새 내부에는 포위당하기 전에 도착한 오스만 제국군 수비대가 있었는데, 이 수비대들은 요새 내의 모스크나 고층 건물들의 지붕을 편평하게 만든 뒤, 그곳에 대포를 설치하여 즉흥적으로 고층 포탑을 만드는 장기를 보여주었는데, 이는 오스만 제국 포병대의 사거리 우위로 직결되어 요새 밖에 있는 페르시아군 포병대를 효과적으로 포격하였다. 따라서 페르시아군 포병대들은 사거리 밖으로 물러나야만 했다.

파일:undermine01.gif

갱도를 파서 공격하는 방법을 묘사한 그림

포격이 불가능해지자, 페르시아군은 갱도를 파서 성벽 바로 밑에 대량의 화약을 투입하여 성벽을 폭파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페르시아군의 갱도 공격 시도를 오스만 수비대가 알아채버렸으며, 오스만 수비대가 역으로 갱도를 파고 들어오면서 지하에서도 싸우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그래도 지하에서의 격전에서 페르시아군이 이긴 덕분에 일부 성벽을 폭파시키는데 성공하였으나 결정적인 공격이 되지 못했으며, 오히려 오스만 수비대의 갱도 폭파에 휘말려 페르시아군이 죽기도 했었다.[1]

3.2. 러시아 제국의 손길

적의 적은 우방이라는 논리 덕분인지, 나디르 샤와 러시아 제국은 일종의 동맹을 맺게 되는데, 이때 러시아 제국 측에서 유럽제 대형 공성포와 정비공을 보내주었다. 공성전에 요긴하게 쓰이라고 보내주었는데, 나디르 샤 또한 유럽제 대포에 감탄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유럽제 대형 공성포의 도착에도 불구하고 간자 요새는 여전히 버티고 있었다.

3.3. 결국은 포위전이 답이다

그렇게 간자 공성전은 몇 달 동안이나 지연되는 바람에 1734년에 함락시키지 못하고 1735년으로 넘어가야 했다. 나디르 샤가 압둘라 코프룰루의 오스만 제국군 8만을 상대하기 위해 서진하였을때, 간자 요새도 더이상 버티기 힘들었는지 7월 9일에 항복했다고 한다.

4. 결과

간자 요새를 함락함으로서, 나디르 샤가 캅카스 지역에서 우위를 갖추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더불어 간자 요새 함락이후 나디르 샤가 기적같은 대승을 거두며 페르시아의 승리는 더욱 확실해지게 되었다. 사파비 왕조의 멸망 이후 페르시아 서부지역과 캅카스 지역을 러시아와 나눠먹던 오스만 제국은 이제 나디르 샤의 훨씬 강력한 새로운 왕조를 맞이하게 될 운명이었다.


[1] 갱도 싸움으로 인한 오스만 수비대 사상자가 700여명, 페르시아군 사상자가 40명 정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