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0 14:30:42

가자 마다


1. 개요2. 상세3. 현재의 평가4. 등장 매체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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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jah Mada
(1290 ~ 1364)

지금의 인도네시아에 존재했던 마자파힛 제국의 재상.[1]

2. 상세

가자 마다는 자야나가라 황제의 황실 근위대장으로 경력을 시작했다. 그러다 황실의 신하인 라크리안 쿠티가 반란을 일으키자, 황제와 그의 가족들을 수도에서 탈출시킨 후 의도적으로 황제가 죽었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이 소문에 수도가 혼란에 빠지자 이 때를 놓치지 않고 가자 마다는 반란을 진압했다. 이에 대한 공으로 장관 비슷한 자리에 올라 큰 권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황제인 자야나가라는 몇 년 후에 쿠티의 심복이었던 주치의에게 살해되었다. 그의 아내를 뺏어간 것에 앙심을 품은 가자 마다가 주치의를 시켜 황제를 암살했다는 설도 있다. 설에 따르면, 주치의도 가자 마다처럼 아내를 빼앗겨 앙심을 품고 있었기에 암살에 협조했고, 암살 후 가자 마다는 그 암살범도 죽여서 증거를 인멸했다고 한다.

라덴 위자야의 맏딸이자 자야나가라의 이복 누나인 트리부와나[2]가 제위에 오르자 가자 마다는 황제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얻었으며, 가자 마다는 이에 보답이라도 하듯 군을 움직여 반란을 진압하고 대재상의 자리에 오른 후 발리까지 정복했다.

이후 트리부와나는 자신의 아들인 하얌 우룩이 장성하자 그에게 제위를 물려주었고 16살의 나이로 제위에 오른지라 아직 지도자로서의 경험이 부족했던 하얌 우룩은 가자 마다에게 전권을 위임했다. 하얌 우룩 시대에 마자파힛군은 인도네시아 군도 각지로 원정을 나가 마자파힛의 영토를 크게 넓혔는데, 가자 마다는 제독 음푸 날라(Mpu Nala) 등이 이끄는 해상 원정을 총괄 지휘하였다. 이때가 마자파힛 제국의 전성기였다.

그러나 가자 마다의 지나친 야심은 화를 불러왔는데, 그는 당시까지 마자파힛 제국에게 복종하지 않고 있던 순다 왕국의 뒤통수를 쳐서 황제의 신임을 잃었다. 하얌 우룩은 평소 마자파힛과 사이가 안 좋았던 순다 왕국과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순다의 공주인 치트라레스미와 결혼할 예정이었고 가자 마다에게 순다 왕과 공주를 환영하기 위해 트라울란 북부의 부밧 광장으로 가서 순다 왕가를 마자파힛 궁전으로 호송하라는 임무를 맡겼다. 그러나 가자 마다는 순다 왕에게 마자파힛에 복종을 요구했고, 순다 공주를 왕비가 아닌 후궁으로 삼을 것이라고 했다. 이에 분개한 순다 왕족과 친위대는 저항하다가 몰살당했다. 순다와의 우호적 관계를 원했던 하얌 우룩은 이러한 결과에 크게 실망했고, 가자 마다를 총리대신 자리에서 해임한 뒤 외딴 시골로 유배보냈다. 대단한 야심가였지만 그만큼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 뛰어났던 가자 마다는 황제의 정당한 명령을 받아들이고 자리에서 물러나 프로볼링고라는 시골 마을에서 고독하게 살다 죽었다.

가자 마다는 군사적인 재능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술수에도 능했고 온갖 정책 결정도 이 사람이 다 했으며, 법률서까지 편찬했다. 이 사람이 원인 미상으로 죽은 후에는 이 사람의 업무를 네 사람이 이어받을 정도였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냉혹한 정치가였지만 동시에 마자파힛 제국의 부국강병을 혼자서 이룬 유능한 사람이었다는 말. 이런 면모 때문인지, 그는 현지에서 일명 '도깨비 재상'이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1336년 누산타라(인도네시아 군도)를 정복하기 전까지 조미료와 향신료를 맛보지 않겠다고 한 '숨빠 팔라파(Sumpha Palapa)' 선언이 유명하다.

3. 현재의 평가

인도네시아는 네덜란드의 식민지배로 국경이 정해진 나라이며, 전통 시대 역사 또한 여러 섬에서 소국들이 난립하는 역사가 대부분이었다. 현대와 주류 종교도 다르고 존속 기간도 짧지만 영토가 제일 넓기 때문에 현대 인도네시아와 영토가 제일 비슷한 마자파힛 제국을 대대적으로 띄워준다.

인도네시아에서 이 사람의 위명은 매우 높아 욕야카르타에 인도네시아 처음으로 세워진 종합대학에 이 사람 이름을 붙일 정도이다. 바로 가자마다 대학교로, 현재도 인도네시아 대학교, 반둥 공과대학교와 함께 인도네시아의 최고 명문으로 유명하다.

4. 등장 매체


[1] 현재 총리의 직책에 해당.[2] 트리부와나의 모후는 싱하사리 크르타나가라 왕의 막내딸 가야트리 라자파트니(Gayatri Rajapatni)였고, 자야나가라의 모후는 인드레스와리(Indreswari)였다. 인드레스와리는 다르마스라야 왕국 트리부와나라자(Tribhuwanaraja) 왕의 딸로 수마트라에서 온 말레이인이었으며, 라덴 위자야의 다른 네 황비가 모두 자바인이었다는 것을 고려할 때 가장 이질적인 황비이자, 맞아들인 후 라덴 위자야가 가장 총애한 황비였다. 라덴 위자야의 제1황비 트리부와네스와리(Tribhuwaneswari)는 아이를 낳지 못하여 인드레스와리의 아들 자야나가라를 입양하였고, 이로 인해 제1황비의 아들 자야나가라가 계승권 서열 1위가 된 것으로 보인다. 당대의 사료 중 《나가라크르타가마》에는 자야나가라의 모후가 인드레스와리로 기록되어 있고, 이보다 조금 이른 시기의 크르타라자사 비문(Prasasti Kertarajasa, 1305)에는 자야나가라의 모후가 트리부와네스와리로 기록되어 있다.[3] 기타르자(Gitarja)라는 이름으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