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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상위 문서 아이콘.svg|align=left&width=21.6px]] {{{#!html }}} 상위 문서: [[]]1. 타임라인2. 주요 사건
2.1. 공통
3. 이데올로기2.1.1. 15일 전쟁2.1.2. A Grand Reverie Speech, 19472.1.3. 돔 병합2.1.4. Call to the Classes Speech, 19062.1.5. 혁명의 세기2.1.6. 강림절2.1.7. 존리아트 대화재2.1.8. 헬일란트 침공2.1.9. 소르들란드 내전2.1.10. The Falenco Disaster of 19182.1.11. The Long Row North2.1.12. The War of the Dying Roses2.1.13. Walker Plan2.1.14. 베흘렌 내전
2.2. 소르들란드2.3. 리치아3.1. 아르카시아식 자본주의3.2. Immediatism3.3. Lespian Protectionism3.4. 말레니예프주의3.5. Maximism3.6. Miraclism3.7. Rizian Monarchism3.8. 솔주의3.9. Totalism3.10. 발그슬란드 사회주의
4. 종교4.1. 공통
5. 기타4.1.1. Nurity Origins Period4.1.2. Nurity Divergence Period4.1.3. Nurity Tear Period4.1.4. Nurity Settlement Period4.1.5. Nurity Reform Period4.1.6. 다스트누리티교4.1.7. 골콘다주의4.1.8. 누리티교4.1.9. 개신 누리티교4.1.10. 브루헤지교4.1.11. Zaranism4.1.12. Zaranurity
4.2. 리치아1. 타임라인
1.1. 공통
1.1.1. (300-695) Migration Period
대이동기로 알려진 300년부터 695년까지 근 4백년의 시기이다. 이 시기 동안 Mark, Sord, Valg, Agno 부족들이 Merkopa 대륙의 최북단에서 남부로 이동했다. 역사학자들은 극단적인 기후로 북부에서 일어난 대기근이 이 이동의 주된 이유일 것이라 추측한다.
북부 부족들은 수많은 땅을 지나 Rum 족의 지역에 당도한다. 부족의 우두머리들이 평화 협정을 맺는 대가로 거액의 금화를 요구했지만 부족의 원시적인 병사와 기병들은 조직화된 자신들의 군대에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Rum 족은 이를 거부했다. 그 결과 수천 개의 도시와 마을이 약탈당했고, 부족의 무리는 Rum 족의 주력부대를 계속 피하면서 그들의 땅에 혼란을 일으켰다. Rum의 왕은 이에 굴복해 평화협정을 맺었고 부족들은 Rum의 땅에 정착할 수 있었다.
약탈로 얻은 전리품은 이주민에게 큰 도움이 되었고 이 때 입은 피해로 Rum 족은 100년간 고난의 시기를 거쳤다. 이동기 동안 맺었던 부족간의 동맹은 시간이 지나며 서서히 약해졌다. 토지 분쟁이 일상화되고 갈등은 부족들을 분열로 이끌었다.
Suzerain Codex - Sordland - Migration
모티브는 게르만족의 대이동.[1]북부 부족들은 수많은 땅을 지나 Rum 족의 지역에 당도한다. 부족의 우두머리들이 평화 협정을 맺는 대가로 거액의 금화를 요구했지만 부족의 원시적인 병사와 기병들은 조직화된 자신들의 군대에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Rum 족은 이를 거부했다. 그 결과 수천 개의 도시와 마을이 약탈당했고, 부족의 무리는 Rum 족의 주력부대를 계속 피하면서 그들의 땅에 혼란을 일으켰다. Rum의 왕은 이에 굴복해 평화협정을 맺었고 부족들은 Rum의 땅에 정착할 수 있었다.
약탈로 얻은 전리품은 이주민에게 큰 도움이 되었고 이 때 입은 피해로 Rum 족은 100년간 고난의 시기를 거쳤다. 이동기 동안 맺었던 부족간의 동맹은 시간이 지나며 서서히 약해졌다. 토지 분쟁이 일상화되고 갈등은 부족들을 분열로 이끌었다.
Suzerain Codex - Sordland - Migration
1.1.2. (695-1113) 부족 전쟁기
695년부터 1113년 사이의 기간은 부족 전쟁기(Tribal Wars Period)로 알려져 있다.
700년대에 부족들이 정착하고 국경이 형성되기 시작하자, 초창기 부족 간의 갈등은 대규모 습격과 국경 분쟁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수 세기에 걸친 끊임없는 갈등 끝에, Unger라는 이름의 칸(Khan)이 이끄는 Mark 부족이 그의 지도력 아래 부족들을 통합하는 데 성공했다. 역사학자들은 1096년경에 Unger 칸이 이미 주변의 모든 부족과 갓 태동한 국가들을 Mark 부족의 지배 하에 두었다고 주장한다.
Mark 부족이 부상함에 따라 Valgs 부족은 피난처를 찾아 Grey Strait를 건너 도망쳤으며, Valgos라고 명명한 섬에 정착했다. Mark 부족의 확장에 위협을 느낀 남부의 Lespians는 칸의 분노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수많은 요새와 성벽을 쌓았다.
Mark 부족이 Rums와 Lespians의 도시에 정착하면서 봉건 체제의 기틀을 갖추었다. 이들은 중앙 Merkopa에서 동부 Mekopa에 이르는 영토를 통합하여 지구상에서 가장 거대한 국가가 되었다. 이 지역은 Markia로 알려지게 되었다. 1113년, Unger 칸은 Markian Empire를 선포하며 Merkopa 대륙 전체를 지배하고 '세계의 정복자'로 즉위하겠다는 야망을 공표했다.
Suzerain Codex - Sordland - Tribal Wars
700년대에 부족들이 정착하고 국경이 형성되기 시작하자, 초창기 부족 간의 갈등은 대규모 습격과 국경 분쟁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수 세기에 걸친 끊임없는 갈등 끝에, Unger라는 이름의 칸(Khan)이 이끄는 Mark 부족이 그의 지도력 아래 부족들을 통합하는 데 성공했다. 역사학자들은 1096년경에 Unger 칸이 이미 주변의 모든 부족과 갓 태동한 국가들을 Mark 부족의 지배 하에 두었다고 주장한다.
Mark 부족이 부상함에 따라 Valgs 부족은 피난처를 찾아 Grey Strait를 건너 도망쳤으며, Valgos라고 명명한 섬에 정착했다. Mark 부족의 확장에 위협을 느낀 남부의 Lespians는 칸의 분노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수많은 요새와 성벽을 쌓았다.
Mark 부족이 Rums와 Lespians의 도시에 정착하면서 봉건 체제의 기틀을 갖추었다. 이들은 중앙 Merkopa에서 동부 Mekopa에 이르는 영토를 통합하여 지구상에서 가장 거대한 국가가 되었다. 이 지역은 Markia로 알려지게 되었다. 1113년, Unger 칸은 Markian Empire를 선포하며 Merkopa 대륙 전체를 지배하고 '세계의 정복자'로 즉위하겠다는 야망을 공표했다.
Suzerain Codex - Sordland - Tribal Wars
1.1.3. (1113-1630) 마르키안 제국
1113년경, Markian Empire는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국가이자 가장 진보된 문명으로 여겨졌다. 수도는 오늘날의 Erlory가 위치한 곳이었으며 당시 명칭은 Korakord였다. 인구가 거의 천만 명에 육박했던 이 제국은 무역과 문화, 예술로 활기가 넘쳐났다.
제국의 황금기는 1125년 Unger가 사망하면서 시작되어 3세기 넘게 지속되었다. 제국은 1440년에 전성기에 도달했는데, 그 영토가 너무 넓어 말을 탄 전령을 보내도 목적지에 도착하는 데 몇 달이 걸릴 정도였다.
제국은 특정 문화에 특혜를 주지 않는 거대한 다문화 용광로였다. 이러한 기조는 16세기 중반 Turmund 황제가 집권하며 Markian의 정체성이 훨씬 지배적으로 변하면서 바뀌기 시작했다. 그는 제국에서 두 번째로 강력한 가문이자 서부 Wehzek 인들을 지지 기반으로 둔 Reczniek 가문의 여인과 결혼했다.
16세기 후반에 이르러 Markian Empire는 침체기에 빠졌고, 거대한 규모 자체가 경제에 부담을 주기 시작했다. 새로 건설된 첨단 제국 고속도로를 유지하는 비용이 국가가 감당하기에 너무 컸던 것이다.
1599년 Turmund 황제가 사망하자, 그의 아내와 Reczniek 가문 전체가 Mark 가문을 몰아내고 제국의 통제권을 장악했다. 이를 기점으로 제국의 많은 주요 지역이 독립하기 시작했다. 먼저 Rumburg가 조공 바치는 것을 중단했고, 1년 후에는 Agnolia가 떨어져 나가 자신들만의 왕국을 선포했다.
Wehzek 가문이 내부 역량을 결집하는 동안, Valgos 왕국은 이 기회를 틈타 Markian Empire 연안의 여러 섬을 침공했다. 이들은 Merkopan 대륙의 동쪽과 남쪽 해역에서 이미 위협적이었던 해상 장악력을 더욱 확장했다.
Markian 제국군이 이탈한 국가들과 전쟁을 벌이기 위해 집결했을 때, 제국의 대부분 지역은 이미 완전한 혼란에 빠져 있었고 더 많은 국가가 독립을 선언했다. 제국군은 결국 그들이 공격할 수 있는 가장 큰 목표인 Rumburg를 공격했다. 20년 동안 이어진 이 피비린내 나는 갈등은 War of the Dying Roses로 알려지게 되었다.
17세기 초, Sordish 인들은 점점 영향력이 커지던 무역 가문 Renan 아래 결집하여 제국의 핵심 영토에서 독자적인 자치 정부 시스템을 구축했다. 상황을 되돌리기에는 너무 늦었다고 판단한 Reczniek 가문은 제국 본토를 떠나 Wehzek 인들이 다수 거주하는 서부의 자신들 영토로 퇴각했다.
1630년, 영주 Worangrad는 Wehzek 인들의 땅에 Wehlen 독립 왕국을 선포했다. 뒤이어 같은 해에 Albrecht Renan이 제국의 수도를 점령하고 Renan 귀족정을 선포하면서 Markian Empire는 사실상 종말을 맞이했다.
Suzerain Codex - Sordland - Markian Empire
제국의 황금기는 1125년 Unger가 사망하면서 시작되어 3세기 넘게 지속되었다. 제국은 1440년에 전성기에 도달했는데, 그 영토가 너무 넓어 말을 탄 전령을 보내도 목적지에 도착하는 데 몇 달이 걸릴 정도였다.
제국은 특정 문화에 특혜를 주지 않는 거대한 다문화 용광로였다. 이러한 기조는 16세기 중반 Turmund 황제가 집권하며 Markian의 정체성이 훨씬 지배적으로 변하면서 바뀌기 시작했다. 그는 제국에서 두 번째로 강력한 가문이자 서부 Wehzek 인들을 지지 기반으로 둔 Reczniek 가문의 여인과 결혼했다.
16세기 후반에 이르러 Markian Empire는 침체기에 빠졌고, 거대한 규모 자체가 경제에 부담을 주기 시작했다. 새로 건설된 첨단 제국 고속도로를 유지하는 비용이 국가가 감당하기에 너무 컸던 것이다.
1599년 Turmund 황제가 사망하자, 그의 아내와 Reczniek 가문 전체가 Mark 가문을 몰아내고 제국의 통제권을 장악했다. 이를 기점으로 제국의 많은 주요 지역이 독립하기 시작했다. 먼저 Rumburg가 조공 바치는 것을 중단했고, 1년 후에는 Agnolia가 떨어져 나가 자신들만의 왕국을 선포했다.
Wehzek 가문이 내부 역량을 결집하는 동안, Valgos 왕국은 이 기회를 틈타 Markian Empire 연안의 여러 섬을 침공했다. 이들은 Merkopan 대륙의 동쪽과 남쪽 해역에서 이미 위협적이었던 해상 장악력을 더욱 확장했다.
Markian 제국군이 이탈한 국가들과 전쟁을 벌이기 위해 집결했을 때, 제국의 대부분 지역은 이미 완전한 혼란에 빠져 있었고 더 많은 국가가 독립을 선언했다. 제국군은 결국 그들이 공격할 수 있는 가장 큰 목표인 Rumburg를 공격했다. 20년 동안 이어진 이 피비린내 나는 갈등은 War of the Dying Roses로 알려지게 되었다.
17세기 초, Sordish 인들은 점점 영향력이 커지던 무역 가문 Renan 아래 결집하여 제국의 핵심 영토에서 독자적인 자치 정부 시스템을 구축했다. 상황을 되돌리기에는 너무 늦었다고 판단한 Reczniek 가문은 제국 본토를 떠나 Wehzek 인들이 다수 거주하는 서부의 자신들 영토로 퇴각했다.
1630년, 영주 Worangrad는 Wehzek 인들의 땅에 Wehlen 독립 왕국을 선포했다. 뒤이어 같은 해에 Albrecht Renan이 제국의 수도를 점령하고 Renan 귀족정을 선포하면서 Markian Empire는 사실상 종말을 맞이했다.
Suzerain Codex - Sordland - Markian Empire
1.2. 소르들란드
1.2.1. (1630-1866) 레난 귀족정
Renan Aristocracy
1630년부터 1866년 사이의 시기는 Renan 귀족정기로 알려져 있다.
Albrecht Renan은 부유한 Renan 가문의 다른 구성원들과 달리, 귀족이 아닌 민중의 편에 선 인물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Markian South Merkopa Trade Company의 지분 대부분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Albrecht가 Korakord에서 Renan 귀족정을 선포했을 때 그 자산들은 고스란히 그의 손에 들어왔다. 당시 이 자산은 국가 전체의 GDP에 육박할 정도였다.
복지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던 시절, Renan 귀족정은 수도 Korakord(1649년 Erlory로 개칭)의 가난한 농민들에게 기본적인 임상 치료를 제공했다. 비록 과거의 영광에 비하면 그림자에 불과했으나, Erlory는 여전히 Markian 제국 시절부터 남아있던 수많은 사람이 거주하는 거대한 인구 중심지였다.
인구의 대부분은 정부의 통상적인 운영을 주도하게 된 Sord인들로 구성되었다. 때문에 공식적인 국명은 Renan이었으나 비공식적으로는 소르들란드라고도 불렸다. 국가는 Albrecht가 60대에 접어들 때까지 순조롭게 발전하고 개선되었다.
Rumburg의 왕 Edward는 자신의 국가가 War of Dying Roses로 인한 경제적 문제로 고통받자 부유한 Renan에 눈독을 들였다. 그는 기회를 포착해 Renan의 북부 국경을 공격하고 많은 정착지를 초토화시켰다. 전투가 계속되면서 Rumburg가 Sords의 심장부로 야금야금 다가오자 전쟁은 Renan에 점점 불리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때 Albrecht는 이미 70대 후반으로, 국가를 이끌기에는 너무 노쇠한 상태였다.
Albrecht의 아들 Erick은 통치권과 전쟁 수행 능력을 이어받기 위해 훈련받았다. 그는 24세의 나이로 Renan의 수장이 되었으며, 자신의 Agnolia 출신 정부의 조언에 따라 당시 Valgos의 습격으로 고통받고 Rumburg로부터 똑같이 위협받던 Agnolia와의 동맹을 추진했다.
Agnolia의 여왕 Lenna는 상호 이익을 위해 동맹을 간절히 원했을 뿐만 아니라 Erik과 사랑에 빠지기도 했다. 처음에 이 아이디어를 냈던 Erik의 정부가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Erik은 Queen Lenna와 결혼했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두 주권 통치자의 결혼으로 Rumburg에 대항하는 연합 전선이 형성되었다.
이 시기 동안 Erik과 Lenna는 두 나라를 공동 통치했으며, 이는 사실상 Sordland와 Agnolia를 하나의 국가로 만들었다. 그들은 힘을 합쳐 침략군을 저지하고 잃어버린 영토 일부를 되찾았다. 그사이 Valgos는 Agnolia 습격을 중단했으나, Rumburg 전쟁으로 인한 피로감은 얻은 작은 이득에 비해 너무나 큰 피해를 주고 있었다. 결국 1710년, 세 국가 사이에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다.
1740년 Lenna가 세상을 떠나자 통합되었던 두 국가는 다시 분리되었고, Agnolia는 왕위를 주장하는 세 가문 사이의 내전에 휩싸였다. West Agnolia의 공작은 Renan에 남기로 결정하고 분쟁에 참여하지 않았는데, 이 영토는 나중에 Agnland로 이름이 바뀌었다. 내전이 끝난 후 Agnolia는 Rector가 수장인 상인 공화국으로 재건되었다.
19세기 초, 세계는 Century of Revolutions가 시작되는 것을 목격했다. Renan 또한 1833년 인근 왕국들로부터 전해진 민족주의 사상에 영감을 받은 민중들이 Renan 가문에 대항하여 혁명을 일으키며 변화의 바람을 맞았다.
민족주의 혁명가들은 귀족정이 Sord인들이 민족으로서 잠재력을 온전히 발휘하는 것을 가로막고 있다고 주장했다. 형편이 좋지 못한 지역에서는 특권을 누리던 Bludish와 Wehzek 상인들을 향한 폭력이 조장되기 시작했다. 1859년에 시작된 민족주의 혁명은 Renan 귀족정의 붕괴와 함께 Renan 혈통 전체가 몰살당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소르들란드는 7년 동안 전쟁에 둘러싸여 여러 지역 국가와 도시 국가로 쪼개졌다. 혁명의 혼란은 1866년, 스스로를 Markian 황제의 후손이자 마룬 혈통(Maroon blood)이라 주장하는 민족주의 지도자 Egmund가 Kingdom of Sordland 아래 국가를 통일하며 끝났다.
Albrecht Renan은 부유한 Renan 가문의 다른 구성원들과 달리, 귀족이 아닌 민중의 편에 선 인물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Markian South Merkopa Trade Company의 지분 대부분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Albrecht가 Korakord에서 Renan 귀족정을 선포했을 때 그 자산들은 고스란히 그의 손에 들어왔다. 당시 이 자산은 국가 전체의 GDP에 육박할 정도였다.
복지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던 시절, Renan 귀족정은 수도 Korakord(1649년 Erlory로 개칭)의 가난한 농민들에게 기본적인 임상 치료를 제공했다. 비록 과거의 영광에 비하면 그림자에 불과했으나, Erlory는 여전히 Markian 제국 시절부터 남아있던 수많은 사람이 거주하는 거대한 인구 중심지였다.
인구의 대부분은 정부의 통상적인 운영을 주도하게 된 Sord인들로 구성되었다. 때문에 공식적인 국명은 Renan이었으나 비공식적으로는 소르들란드라고도 불렸다. 국가는 Albrecht가 60대에 접어들 때까지 순조롭게 발전하고 개선되었다.
Rumburg의 왕 Edward는 자신의 국가가 War of Dying Roses로 인한 경제적 문제로 고통받자 부유한 Renan에 눈독을 들였다. 그는 기회를 포착해 Renan의 북부 국경을 공격하고 많은 정착지를 초토화시켰다. 전투가 계속되면서 Rumburg가 Sords의 심장부로 야금야금 다가오자 전쟁은 Renan에 점점 불리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때 Albrecht는 이미 70대 후반으로, 국가를 이끌기에는 너무 노쇠한 상태였다.
Albrecht의 아들 Erick은 통치권과 전쟁 수행 능력을 이어받기 위해 훈련받았다. 그는 24세의 나이로 Renan의 수장이 되었으며, 자신의 Agnolia 출신 정부의 조언에 따라 당시 Valgos의 습격으로 고통받고 Rumburg로부터 똑같이 위협받던 Agnolia와의 동맹을 추진했다.
Agnolia의 여왕 Lenna는 상호 이익을 위해 동맹을 간절히 원했을 뿐만 아니라 Erik과 사랑에 빠지기도 했다. 처음에 이 아이디어를 냈던 Erik의 정부가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Erik은 Queen Lenna와 결혼했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두 주권 통치자의 결혼으로 Rumburg에 대항하는 연합 전선이 형성되었다.
이 시기 동안 Erik과 Lenna는 두 나라를 공동 통치했으며, 이는 사실상 Sordland와 Agnolia를 하나의 국가로 만들었다. 그들은 힘을 합쳐 침략군을 저지하고 잃어버린 영토 일부를 되찾았다. 그사이 Valgos는 Agnolia 습격을 중단했으나, Rumburg 전쟁으로 인한 피로감은 얻은 작은 이득에 비해 너무나 큰 피해를 주고 있었다. 결국 1710년, 세 국가 사이에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다.
1740년 Lenna가 세상을 떠나자 통합되었던 두 국가는 다시 분리되었고, Agnolia는 왕위를 주장하는 세 가문 사이의 내전에 휩싸였다. West Agnolia의 공작은 Renan에 남기로 결정하고 분쟁에 참여하지 않았는데, 이 영토는 나중에 Agnland로 이름이 바뀌었다. 내전이 끝난 후 Agnolia는 Rector가 수장인 상인 공화국으로 재건되었다.
19세기 초, 세계는 Century of Revolutions가 시작되는 것을 목격했다. Renan 또한 1833년 인근 왕국들로부터 전해진 민족주의 사상에 영감을 받은 민중들이 Renan 가문에 대항하여 혁명을 일으키며 변화의 바람을 맞았다.
민족주의 혁명가들은 귀족정이 Sord인들이 민족으로서 잠재력을 온전히 발휘하는 것을 가로막고 있다고 주장했다. 형편이 좋지 못한 지역에서는 특권을 누리던 Bludish와 Wehzek 상인들을 향한 폭력이 조장되기 시작했다. 1859년에 시작된 민족주의 혁명은 Renan 귀족정의 붕괴와 함께 Renan 혈통 전체가 몰살당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소르들란드는 7년 동안 전쟁에 둘러싸여 여러 지역 국가와 도시 국가로 쪼개졌다. 혁명의 혼란은 1866년, 스스로를 Markian 황제의 후손이자 마룬 혈통(Maroon blood)이라 주장하는 민족주의 지도자 Egmund가 Kingdom of Sordland 아래 국가를 통일하며 끝났다.
1.2.2. (1866-1923) 소르들란드 왕국
Kingdom of Sordland
소르들란드 왕국 시대는 1866년 Renan 귀족정의 몰락과 함께 시작되어 1923년까지 지속되었다. 이 시기의 대부분은 에그문드 국왕(King Egmund)이 통치하였다. 그는 자신이 19세기 민족적 개념이자 소르들란드의 민족주의와 자부심을 확립한 '마룬 혈통(Maroon blood)'이라고 주장하였다. 국왕은 국가의 정체성을 변화시켰으며 구 귀족 체제와 거리를 두었다. 그가 단행한 첫 번째 변화 중 하나는 수도를 엘로리에서 홀(Hol)로 천도한 것이었다. 또한 도시의 이름도 홀에서 홀소르드로 변경되었는데, 이는 High Sord와 High City라는 의미를 동시에 담고 있다.
왕위를 공고히 한 에그문드 국왕은 세력을 과시하기 위해 이웃 나라 중 가장 약했던 베흘렌을 공격하였다. 연이은 전투를 통해 소르들란드 군대의 명성은 메르코파 대륙 전역에 퍼졌다. 이는 에그문드 국왕의 첫 번째 정복 성공이었으며, 베흘렌의 동부 블루디아(現베르기아) 지역을 점령함으로써 영토를 서쪽으로 확장하였다. 이곳은 블루디아 인들이 수천 년간 거주해 온 지역이었다. 처음에는 블루디아 인들도 이전 통치자의 철권통치 아래 고통받고 있었기에 소르들란드 군사들을 구원자로 환영하였다. 하지만 병합 직후, 블루디아 인들은 과거에 겪었던 것과 유사한 수준의 대우를 소르드 인들로부터 받게 되었다. 반면, 소르들란드의 통치 아래 있던 아그놀리아 인들은 에그문드 국왕으로부터 훨씬 나은 대우를 받았다. 국왕은 그들에게 최대한의 자유를 부여하였고, 아그놀리아 인들은 서서히 소르들란드 문화에 동화되었다. 소르들란드 시민권을 받아들인 이들을 지칭하기 위해 '아그노-소르드인(Agno-Sordish)'이라는 명칭이 확립되었다.
1870년, 에그문드 국왕이 양국 간의 우호 조약을 파기하자 룸부르크의 알프레드 2세 국왕은 소르들란드를 침공하였다. 이 전쟁은 짧게 끝났으며 어느 쪽의 승리로도 결판나지 않았다. 이 전쟁은 후에 15일 전쟁으로 알려지게 된다.
전쟁 후 에그문드 국왕은 모든 Renan의 자산을 자신의 개인 국고로 몰수하고, 즉위 전 수립되었던 막대한 비용의 복지 정책들을 폐지하였다. 이는 역효과를 불러와 당대 소르들란드 역사상 최대 규모의 시위를 초래하였다. 국민들은 서부 메르코파의 의원내각제 공화국과 콘타나의 사회주의 혁명에 영감을 받은 왕실 의회 내 공화파의 지도자, 아르토르 S. 비스지를 중심으로 결집하였다. 압박을 느낀 국왕은 전면적인 반란을 피하기 위해 일부 정책을 복구하였다.
1891년, 왕당파 내에서 헤론 월트(Heron Walt)라는 강력한 인물이 부상하여 국왕의 수석 고문으로 임명되었다. 숙련된 건축가이자 관리자인 헤론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성공적인 프로젝트와 발전상을 조사하고 이를 소르들란드 왕국에 적용하였다. 그의 가장 성공적인 업적은 데이르의 농업 도시화, 아보리의 항구, 그리고 사르나의 자유 무역 지대였다. 이 대규모 프로젝트들은 도시들을 빈곤에서 구제하고 경제를 활성화하였으며, 위기 상황에 처해 있던 에그문드 국왕의 인기를 다시 끌어올렸다. 그는 나중에 에그문드로부터 최고 영예인 '국왕의 영웅' 칭호를 수여받았다.
1915년, 소르들란드 왕국과 당시 거대 식민 강대국이었던 발고스 제국 사이에 영해 분쟁이 발생하였다. 발고스는 소르들란드 선박들에 대한 봉쇄 조치로 보복하였다. 당시 발고스 함대는 세계 최대 규모였다. 이 봉쇄는 소르들란드 왕국에 막대한 피해를 주어 국가를 고립시켰으며, 이미 위태로웠던 시기에 해상 무역에 거대한 위협을 가하였다.
소르들란드 내부적으로도 여러 문제가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에그문드가 남성 후계자를 얻지 못한 것이었다. 그의 외동딸인 줄(Jule)은 통치하기에 너무 어렸고, 왕당파 고문들로부터 군주로서 부적합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사이 에그문드 국왕은 노쇠해지면서 소르들란드에 대한 장악력을 잃어갔다.
혁명의 세기가 이웃 나라들을 휩쓸고 지나가던 중, 충격적이게도 국왕의 고문이었던 헤론 월트마저 혁명가 아르토르 S. 비스지에 의해 급진화되었다. 그는 국왕을 저버리고 위스키를 따라 혁명에 가담하였다.
이 사건을 시작으로 비스지는 대중에게 민주주의 사상을 고취하며 연쇄적인 사건들을 일으켰다. 수천 명의 군중이 행진에 모여들었고, 국왕을 저버린 제1군도 혁명가들을 지지하며 합류하였다. 결국 이 운동은 국왕을 축출하였고 소르들란드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임시 정부에 의해 아르토르 S. 비스지가 소르들란드의 초대 대통령으로 선언되었다. 왕실 가족은 한동안 두루(Duru) 섬에 머물도록 명령받았으며, 이후 1931년 솔 대통령에 의해 잠재적인 유혈 사태와 고통을 피하고자 소르들란드에서 추방되었다.
소르들란드 왕국은 반세기밖에 지속되지 못했지만, 이 시기는 국가 정체성을 확립하고 민주주의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소르들란드의 중대한 전환점으로 평가받는다.
왕위를 공고히 한 에그문드 국왕은 세력을 과시하기 위해 이웃 나라 중 가장 약했던 베흘렌을 공격하였다. 연이은 전투를 통해 소르들란드 군대의 명성은 메르코파 대륙 전역에 퍼졌다. 이는 에그문드 국왕의 첫 번째 정복 성공이었으며, 베흘렌의 동부 블루디아(現베르기아) 지역을 점령함으로써 영토를 서쪽으로 확장하였다. 이곳은 블루디아 인들이 수천 년간 거주해 온 지역이었다. 처음에는 블루디아 인들도 이전 통치자의 철권통치 아래 고통받고 있었기에 소르들란드 군사들을 구원자로 환영하였다. 하지만 병합 직후, 블루디아 인들은 과거에 겪었던 것과 유사한 수준의 대우를 소르드 인들로부터 받게 되었다. 반면, 소르들란드의 통치 아래 있던 아그놀리아 인들은 에그문드 국왕으로부터 훨씬 나은 대우를 받았다. 국왕은 그들에게 최대한의 자유를 부여하였고, 아그놀리아 인들은 서서히 소르들란드 문화에 동화되었다. 소르들란드 시민권을 받아들인 이들을 지칭하기 위해 '아그노-소르드인(Agno-Sordish)'이라는 명칭이 확립되었다.
1870년, 에그문드 국왕이 양국 간의 우호 조약을 파기하자 룸부르크의 알프레드 2세 국왕은 소르들란드를 침공하였다. 이 전쟁은 짧게 끝났으며 어느 쪽의 승리로도 결판나지 않았다. 이 전쟁은 후에 15일 전쟁으로 알려지게 된다.
전쟁 후 에그문드 국왕은 모든 Renan의 자산을 자신의 개인 국고로 몰수하고, 즉위 전 수립되었던 막대한 비용의 복지 정책들을 폐지하였다. 이는 역효과를 불러와 당대 소르들란드 역사상 최대 규모의 시위를 초래하였다. 국민들은 서부 메르코파의 의원내각제 공화국과 콘타나의 사회주의 혁명에 영감을 받은 왕실 의회 내 공화파의 지도자, 아르토르 S. 비스지를 중심으로 결집하였다. 압박을 느낀 국왕은 전면적인 반란을 피하기 위해 일부 정책을 복구하였다.
1891년, 왕당파 내에서 헤론 월트(Heron Walt)라는 강력한 인물이 부상하여 국왕의 수석 고문으로 임명되었다. 숙련된 건축가이자 관리자인 헤론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성공적인 프로젝트와 발전상을 조사하고 이를 소르들란드 왕국에 적용하였다. 그의 가장 성공적인 업적은 데이르의 농업 도시화, 아보리의 항구, 그리고 사르나의 자유 무역 지대였다. 이 대규모 프로젝트들은 도시들을 빈곤에서 구제하고 경제를 활성화하였으며, 위기 상황에 처해 있던 에그문드 국왕의 인기를 다시 끌어올렸다. 그는 나중에 에그문드로부터 최고 영예인 '국왕의 영웅' 칭호를 수여받았다.
1915년, 소르들란드 왕국과 당시 거대 식민 강대국이었던 발고스 제국 사이에 영해 분쟁이 발생하였다. 발고스는 소르들란드 선박들에 대한 봉쇄 조치로 보복하였다. 당시 발고스 함대는 세계 최대 규모였다. 이 봉쇄는 소르들란드 왕국에 막대한 피해를 주어 국가를 고립시켰으며, 이미 위태로웠던 시기에 해상 무역에 거대한 위협을 가하였다.
소르들란드 내부적으로도 여러 문제가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에그문드가 남성 후계자를 얻지 못한 것이었다. 그의 외동딸인 줄(Jule)은 통치하기에 너무 어렸고, 왕당파 고문들로부터 군주로서 부적합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사이 에그문드 국왕은 노쇠해지면서 소르들란드에 대한 장악력을 잃어갔다.
혁명의 세기가 이웃 나라들을 휩쓸고 지나가던 중, 충격적이게도 국왕의 고문이었던 헤론 월트마저 혁명가 아르토르 S. 비스지에 의해 급진화되었다. 그는 국왕을 저버리고 위스키를 따라 혁명에 가담하였다.
이 사건을 시작으로 비스지는 대중에게 민주주의 사상을 고취하며 연쇄적인 사건들을 일으켰다. 수천 명의 군중이 행진에 모여들었고, 국왕을 저버린 제1군도 혁명가들을 지지하며 합류하였다. 결국 이 운동은 국왕을 축출하였고 소르들란드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임시 정부에 의해 아르토르 S. 비스지가 소르들란드의 초대 대통령으로 선언되었다. 왕실 가족은 한동안 두루(Duru) 섬에 머물도록 명령받았으며, 이후 1931년 솔 대통령에 의해 잠재적인 유혈 사태와 고통을 피하고자 소르들란드에서 추방되었다.
소르들란드 왕국은 반세기밖에 지속되지 못했지만, 이 시기는 국가 정체성을 확립하고 민주주의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소르들란드의 중대한 전환점으로 평가받는다.
1.2.3. (1923-현재) 소르들란드 공화국
Republic of Sordland
소르들란드(공식 국명: 소르들란드 공화국)는 메르코파 동부에 위치한 준단일제[2] 대통령제 공화국이다. 이 나라는 Sourne Mountains, Markian Sea, Cavendir 및 Gumren Mountains, Unger River, 그리고 Antacean Sea 사이에 자리 잡고 있다. 북쪽으로는 룸부르크와 아그놀리아, 남쪽으로는 베흘렌 및 레스피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소르들란드의 수도이자 최대 도시는 홀소르드이며, 데이르는 인구 2위의 도시, 라지하벤은 금융 중심지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소르들란드의 공용어는 소르드 어이다.
19세기 레난 귀족정의 몰락과 메르코파 서부 여러 국가의 독립 전쟁은 소르들란드 민족주의 운동을 촉발하였다. 이는 민족주의 이념을 바탕으로 소르들란드 왕국을 건국하고 스스로를 마룬 혈통(Maroon blood)이라 칭한 에그문드(Egmund) 왕에 의해 더욱 강화되었다. 그러나 곧이어 아르투르 비스지가 이끄는 강력한 민주주의 혁명 운동과 함께 혁명의 세기가 왕국을 덮쳤다.
1923년 9월 9일, 혁명 세력은 군주제를 폐지하고 홀소르드에 새 정부를 구성하여 스스로를 국가의 합법 정부로 선포하였다. 이로써 소르들란드는 입헌 군주제에서 새로운 공화국 체제로 법적 전환을 공식화하였다. 이 시점이 소르들란드 제1공화국의 시작으로 간주된다.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 된 아르투르 S. 비스지는 수많은 개혁을 단행하였고 왕실 가족을 두루(Duru) 섬으로 유폐했다. 이러한 개혁은 종교와 민족에 기반한 군주국을 대통령제로 운영되는 세속적이고 민주적인 국가로 변모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비스지 정부는 메르코파 서부의 의원내각제 민주주의와 콘타나의 사회주의 국가들로부터 동시에 영향을 받았다. 이에 따라 초기 대통령제에서 내각책임제로의 전환과 사회주의 개혁 도입을 추진하였다. 정부는 다당제를 도입하고 1927년에 첫 선거를 치르기로 예정하였다.
다당제 개혁 이후 많은 정당이 창당되었는데, 그중 일부는 군주제 복고, 반세속주의, 반공주의를 내세웠다. 이에 공화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은 이들의 선거 참여를 허용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며 시위를 벌였다.
첫 선거를 앞둔 1927년, 소르들란드 국군의 루데린 장군이 정부를 상대로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는 헌법을 폐기하고 계엄령을 선포하였으며, 자신이 수립한 군사 정부의 명분으로 '좌익 폭동'을 내세웠다. 그는 비스지 대통령의 체포와 수백 명의 혁명가 및 공산주의 정치인들에 대한 처형을 명령하였고, 이로써 소르들란드 제1공화국은 사실상 종말을 맞이하였다.
1928년, 계엄령 하의 대량 처형이 이어지던 중 리카르드 장군이 루데린으로부터 권력을 찬탈하려 시도하며 신정부를 공격하였다. 이는 1929년까지 지속된 소르들란드 내전의 시작점이 되었다.
1929년, 소르들란드 내전은 타르쿠인 솔 대령과 그가 이끄는 제6사단이 리카르드와 루데린 양측의 군대를 모두 격파하며 종식되었다. 그는 홀소르드를 점령하고 국가의 실질적인 수반이 되었다.
사실상 통치권을 행사한 솔은 새 헌법을 제정하고 소르들란드 통합당을 창당하였다. 같은 해 단일 정당만이 참여한 선거를 통해 그는 소르들란드의 제2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많은 이들이 이 시점을 소르들란드 제2공화국의 시작으로 본다. 한편으로는 제1공화국 기간이 짧았기 때문에, 이때를 진정한 현대 소르들란드 공화국의 시작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도 존재한다.
타르쿠인 솔은 1929년부터 1949년까지 대통령으로 재임하며 보건, 군사 기술, 과학 분야에서 많은 발전을 이룬 개혁을 시행하였다. 그는 계획 경제를 추구하여 주요 산업을 국유화하였고, 수십 년간 이어진 에너지 위기를 해결하였으며 무상 교육과 의료 시스템을 구축하였다. 1930년 소르들란드는 초대되어 OMEC에 가입하였다. 1931년 솔 대통령은 군주제 복고 감정을 뿌리 뽑기 위해 왕실 가족을 소르들란드에서 영구 추방하였다.
1933년 그는 다당제를 다시 도입하고 소르들란드 역사상 최초의 복수 정당 선거를 실시하였다. 또한 블루드 자유 전선(BFF)과 소르들란드 사이의 갈등이 1933년에 시작되어 현재까지 주로 베르기아 지역을 중심으로 이어지고 있다.
소르들란드의 제3대 대통령은 에발드 알폰소이다. 그는 1946년 USP 전당대회에서 타르쿠인 솔을 꺾고 승리한 뒤 1949년에 당선되었다. 알폰소 정부는 수많은 경제 개혁을 단행하여 주요 산업을 민영화하였으며, 소르들란드 내에서 더 폭넓은 정치적·문화적 권리를 추구하였다.
1950년대 초 소르들란드의 경제 자유화가 시작된 이후, 국가는 1951년 경제 위기를 겪었으며 이후 수년간 불황이 지속되었다. 1953년 선거에서 안톤 라이네가 소르들란드의 제4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소르들란드의 수도이자 최대 도시는 홀소르드이며, 데이르는 인구 2위의 도시, 라지하벤은 금융 중심지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소르들란드의 공용어는 소르드 어이다.
19세기 레난 귀족정의 몰락과 메르코파 서부 여러 국가의 독립 전쟁은 소르들란드 민족주의 운동을 촉발하였다. 이는 민족주의 이념을 바탕으로 소르들란드 왕국을 건국하고 스스로를 마룬 혈통(Maroon blood)이라 칭한 에그문드(Egmund) 왕에 의해 더욱 강화되었다. 그러나 곧이어 아르투르 비스지가 이끄는 강력한 민주주의 혁명 운동과 함께 혁명의 세기가 왕국을 덮쳤다.
1923년 9월 9일, 혁명 세력은 군주제를 폐지하고 홀소르드에 새 정부를 구성하여 스스로를 국가의 합법 정부로 선포하였다. 이로써 소르들란드는 입헌 군주제에서 새로운 공화국 체제로 법적 전환을 공식화하였다. 이 시점이 소르들란드 제1공화국의 시작으로 간주된다.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 된 아르투르 S. 비스지는 수많은 개혁을 단행하였고 왕실 가족을 두루(Duru) 섬으로 유폐했다. 이러한 개혁은 종교와 민족에 기반한 군주국을 대통령제로 운영되는 세속적이고 민주적인 국가로 변모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비스지 정부는 메르코파 서부의 의원내각제 민주주의와 콘타나의 사회주의 국가들로부터 동시에 영향을 받았다. 이에 따라 초기 대통령제에서 내각책임제로의 전환과 사회주의 개혁 도입을 추진하였다. 정부는 다당제를 도입하고 1927년에 첫 선거를 치르기로 예정하였다.
다당제 개혁 이후 많은 정당이 창당되었는데, 그중 일부는 군주제 복고, 반세속주의, 반공주의를 내세웠다. 이에 공화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은 이들의 선거 참여를 허용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며 시위를 벌였다.
첫 선거를 앞둔 1927년, 소르들란드 국군의 루데린 장군이 정부를 상대로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는 헌법을 폐기하고 계엄령을 선포하였으며, 자신이 수립한 군사 정부의 명분으로 '좌익 폭동'을 내세웠다. 그는 비스지 대통령의 체포와 수백 명의 혁명가 및 공산주의 정치인들에 대한 처형을 명령하였고, 이로써 소르들란드 제1공화국은 사실상 종말을 맞이하였다.
1928년, 계엄령 하의 대량 처형이 이어지던 중 리카르드 장군이 루데린으로부터 권력을 찬탈하려 시도하며 신정부를 공격하였다. 이는 1929년까지 지속된 소르들란드 내전의 시작점이 되었다.
1929년, 소르들란드 내전은 타르쿠인 솔 대령과 그가 이끄는 제6사단이 리카르드와 루데린 양측의 군대를 모두 격파하며 종식되었다. 그는 홀소르드를 점령하고 국가의 실질적인 수반이 되었다.
사실상 통치권을 행사한 솔은 새 헌법을 제정하고 소르들란드 통합당을 창당하였다. 같은 해 단일 정당만이 참여한 선거를 통해 그는 소르들란드의 제2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많은 이들이 이 시점을 소르들란드 제2공화국의 시작으로 본다. 한편으로는 제1공화국 기간이 짧았기 때문에, 이때를 진정한 현대 소르들란드 공화국의 시작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도 존재한다.
타르쿠인 솔은 1929년부터 1949년까지 대통령으로 재임하며 보건, 군사 기술, 과학 분야에서 많은 발전을 이룬 개혁을 시행하였다. 그는 계획 경제를 추구하여 주요 산업을 국유화하였고, 수십 년간 이어진 에너지 위기를 해결하였으며 무상 교육과 의료 시스템을 구축하였다. 1930년 소르들란드는 초대되어 OMEC에 가입하였다. 1931년 솔 대통령은 군주제 복고 감정을 뿌리 뽑기 위해 왕실 가족을 소르들란드에서 영구 추방하였다.
1933년 그는 다당제를 다시 도입하고 소르들란드 역사상 최초의 복수 정당 선거를 실시하였다. 또한 블루드 자유 전선(BFF)과 소르들란드 사이의 갈등이 1933년에 시작되어 현재까지 주로 베르기아 지역을 중심으로 이어지고 있다.
소르들란드의 제3대 대통령은 에발드 알폰소이다. 그는 1946년 USP 전당대회에서 타르쿠인 솔을 꺾고 승리한 뒤 1949년에 당선되었다. 알폰소 정부는 수많은 경제 개혁을 단행하여 주요 산업을 민영화하였으며, 소르들란드 내에서 더 폭넓은 정치적·문화적 권리를 추구하였다.
1950년대 초 소르들란드의 경제 자유화가 시작된 이후, 국가는 1951년 경제 위기를 겪었으며 이후 수년간 불황이 지속되었다. 1953년 선거에서 안톤 라이네가 소르들란드의 제4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1.3. 리치아
1.3.1. (499-1099) The Rezenid Empire
1.3.2. (1615-1805) The Rubaz Dynasty
1.3.3. (1843-1918) The Lyzian Era
2. 주요 사건
2.1. 공통
2.1.1. 15일 전쟁
2.1.2. A Grand Reverie Speech, 1947
2.1.3. 돔 병합
Annexation of Dome1920년대 초 룸부르크 왕국이 아그놀리아 공화국을 기습 침공하여 돔 지역을 무력합병한 사건.
2.1.4. Call to the Classes Speech, 1906
2.1.5. 혁명의 세기
혁명의 세기는 19세기 초부터 20세기 초까지 메르코파와 콘타나 대륙 대부분의 지역에서 수많은 중대한 혁명 운동이 발생했던 시기를 가리킨다. 이 시기는 절대군주제가 몰락하고 성문헌법에 기초한 대의정부가 수립되었으며, 근대 국민국가와 사회주의 국가들이 등장했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전환기로 평가받는다.
17세기에 등장한 새로운 사상들의 영향을 받아 1823년 발생한 아르카시아 혁명은 일반적으로 혁명의 세기가 시작된 계기로 여겨진다. 당시 아르카스 왕국의 국왕 조너선 12세는 아르카시아 국민들에 의해 왕위에서 축출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세계 최초의 근대 민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혁명의 세기 동안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민족주의 사상은 메르코파에서 콘타나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 거의 모든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이러한 혁명의 물결은 일부 지역에서는 잔혹한 군주제를 무너뜨렸으며, 다른 지역에서는 계몽적 능력주의에 기반한 통치 체제마저 붕괴시켰다. 또한 마지막까지 존속하던 제국들이 해체되면서 여러 소규모 국민국가로 분열되었다.
이 시기의 가장 근본적인 변화 중 하나는 오랫동안 분열되어 있던 콘타나 대륙에서 일어났다. 콘타나는 수십 차례에 걸친 지역 전쟁으로 극심한 혼란을 겪었으나, 이후 광대한 사회주의 국가 연합으로 재편되었다. 이러한 혁명적 변혁은 레온 말레니예프가 주도하였으며, 그의 정치사상은 말레니예프주의라는 이름으로 전 세계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말레니예프의 이념을 바탕으로 콘타나 대륙 전역을 아우르는 사회주의 국가인 콘타나 연방이 탄생하였고, 이는 이전까지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웠던 초강대국으로 성장하였다.
콘타나 연방에서 시작된 말레니예프주의 혁명의 영향력은 바다 건너까지 확산되었다. 말레니예프의 지원을 받은 혁명 세력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강력하고 광범위한 식민지를 보유한 제국 중 하나였던 발고스 제국을 무너뜨렸다. 그 결과 발고스는 발그슬란드 민주공화국이라는 주요 사회주의 강국으로 탈바꿈하였다. 발고스 제국의 몰락이 불러온 파급 효과는 시나와 리카 대륙에서 대규모 탈식민화 운동을 촉발하였으며, 이른바 제3세계로 불리던 지역에서 사회주의 사상이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사회주의 사상의 확산을 위협으로 인식한 세계 최초의 민주주의 국가인 아르카시아는 이에 대응하여 전 세계의 민주주의 혁명 운동을 지원하고, 메르코파 대륙에서 자본주의의 확산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이러한 영향으로 베흘렌과 레스피아, 아그놀리아 등의 국가에서는 평화적 또는 폭력적인 혁명을 통해 군주제가 무너지고 민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아르카시아는 빠르게 성장하여 세계적인 금융 중심지이자 군사 강국, 문화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국가로 부상하였다. 아르카시아는 메르코파 서부에 위치한 지리적으로 안전한 입지와 세계 각지의 정치적 불안정을 활용하여 다른 국가들에 적극적으로 투자하였다. 또한 혁명의 세기 동안 군사동맹과 무역협정으로 이루어진 광범위한 국제적 협력망을 구축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세계적인 초강대국의 지위를 인정받게 되었다.
1923년 소르들란드에서 발생한 민주주의 혁명은 일반적으로 혁명의 세기가 종결된 사건으로 여겨진다. 혁명의 세기가 끝난 이후 세계는 서로 다른 두 이념을 대표하는 콘타나 연방과 아르카시아가 초강대국으로 부상하면서 사실상 양극 체제에 가까운 국제질서로 재편되었다. 두 초강대국 사이에서 세계적인 규모의 전면전이 벌어질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으나, 실제로 그러한 전쟁은 발생하지 않았다. 대신 양국 간의 긴장과 대립은 세계 각지에서 수많은 소규모 대리전이 발생하는 원인이 되었다.
Suzerain Codex - Historical Events - Century of Revolutions
Century of Revolutions17세기에 등장한 새로운 사상들의 영향을 받아 1823년 발생한 아르카시아 혁명은 일반적으로 혁명의 세기가 시작된 계기로 여겨진다. 당시 아르카스 왕국의 국왕 조너선 12세는 아르카시아 국민들에 의해 왕위에서 축출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세계 최초의 근대 민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혁명의 세기 동안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민족주의 사상은 메르코파에서 콘타나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 거의 모든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이러한 혁명의 물결은 일부 지역에서는 잔혹한 군주제를 무너뜨렸으며, 다른 지역에서는 계몽적 능력주의에 기반한 통치 체제마저 붕괴시켰다. 또한 마지막까지 존속하던 제국들이 해체되면서 여러 소규모 국민국가로 분열되었다.
이 시기의 가장 근본적인 변화 중 하나는 오랫동안 분열되어 있던 콘타나 대륙에서 일어났다. 콘타나는 수십 차례에 걸친 지역 전쟁으로 극심한 혼란을 겪었으나, 이후 광대한 사회주의 국가 연합으로 재편되었다. 이러한 혁명적 변혁은 레온 말레니예프가 주도하였으며, 그의 정치사상은 말레니예프주의라는 이름으로 전 세계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말레니예프의 이념을 바탕으로 콘타나 대륙 전역을 아우르는 사회주의 국가인 콘타나 연방이 탄생하였고, 이는 이전까지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웠던 초강대국으로 성장하였다.
콘타나 연방에서 시작된 말레니예프주의 혁명의 영향력은 바다 건너까지 확산되었다. 말레니예프의 지원을 받은 혁명 세력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강력하고 광범위한 식민지를 보유한 제국 중 하나였던 발고스 제국을 무너뜨렸다. 그 결과 발고스는 발그슬란드 민주공화국이라는 주요 사회주의 강국으로 탈바꿈하였다. 발고스 제국의 몰락이 불러온 파급 효과는 시나와 리카 대륙에서 대규모 탈식민화 운동을 촉발하였으며, 이른바 제3세계로 불리던 지역에서 사회주의 사상이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사회주의 사상의 확산을 위협으로 인식한 세계 최초의 민주주의 국가인 아르카시아는 이에 대응하여 전 세계의 민주주의 혁명 운동을 지원하고, 메르코파 대륙에서 자본주의의 확산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이러한 영향으로 베흘렌과 레스피아, 아그놀리아 등의 국가에서는 평화적 또는 폭력적인 혁명을 통해 군주제가 무너지고 민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아르카시아는 빠르게 성장하여 세계적인 금융 중심지이자 군사 강국, 문화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국가로 부상하였다. 아르카시아는 메르코파 서부에 위치한 지리적으로 안전한 입지와 세계 각지의 정치적 불안정을 활용하여 다른 국가들에 적극적으로 투자하였다. 또한 혁명의 세기 동안 군사동맹과 무역협정으로 이루어진 광범위한 국제적 협력망을 구축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세계적인 초강대국의 지위를 인정받게 되었다.
1923년 소르들란드에서 발생한 민주주의 혁명은 일반적으로 혁명의 세기가 종결된 사건으로 여겨진다. 혁명의 세기가 끝난 이후 세계는 서로 다른 두 이념을 대표하는 콘타나 연방과 아르카시아가 초강대국으로 부상하면서 사실상 양극 체제에 가까운 국제질서로 재편되었다. 두 초강대국 사이에서 세계적인 규모의 전면전이 벌어질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으나, 실제로 그러한 전쟁은 발생하지 않았다. 대신 양국 간의 긴장과 대립은 세계 각지에서 수많은 소규모 대리전이 발생하는 원인이 되었다.
Suzerain Codex - Historical Events - Century of Revolutions
전 세계적으로 혁명이 확산되며 군주정이 줄줄이 전복된 18세기 초부터 19세기 초까지의 100여년. 1823년 아르카시아 혁명, 1907년 콘타나 연방 혁명 이후 양국의 지원을 받으며 각각 자유주의와 공산주의 혁명의 물결이 전 세계로 파급되었다. 이 시기를 거치며 소르들란드, 레스피아, 발그슬란드, 베흘렌, 아그놀리아 등지에서 모두 공화정이 수립되었고 전 세계적으로 탈식민화가 이뤄졌다. 현대 세계질서가 구축되는 전환점이 되었다고 평가받는다.
Uprising of 1926을 진압한 리치아 왕국을 비롯하여 잔존한 군주정 국가들은 이에 맞대응하기 위해 룸부르크 왕국을 중심으로 왕실연합길드를 결성하였다.
2.1.6. 강림절
Descension Day성(聖) 다스트가 신의 계시를 받았다고 알려지는 서기 684년 7월 16일.
매년 기념되는 누리티교의 최대 축일로, 신자들은 축일 한 달전부터 단식을 지속하는 전통이 있으며, 강림절 당일에는 전 세계의 많은 성지순례자들이 데이르 대성소를 방문한다.
2.1.7. 존리아트 대화재
1789년, 레난군이 룸부르크 영토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는 틈을 타 발고스 제국의 해군이 바다를 건너 소르들란드로 진격하였다. 6월 1일 밤, 존리아트의 주민 대부분이 잠들어 있던 사이 발고스 함대는 여러 척의 초계정을 격침하고 항구에서 불과 1km 떨어진 지점까지 접근하였다. 발고스 함대는 어떠한 공식적인 선전포고도 없이 항구에 정박해 있던 소르들란드 해군 주력 함대를 향해 대규모 포격을 가하였다. 이 기습 공격으로 소르들란드 함대의 대부분이 침몰하였으며, 해군 장병들은 자신들의 군함에 승선하기도 전에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다.
이후 80척으로 구성된 발고스 함대는 소이탄을 장전하고 존리아트 시가지를 향해 사흘 동안 무차별 포격을 퍼부었다. 포격으로 발생한 화재는 걷잡을 수 없이 빠르게 번져 나갔으며, 수많은 주민들이 미처 집에서 탈출하지 못한 채 산 채로 불타 죽었다. 레난 가문이 공격 소식을 전달받았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이 늦은 뒤였다. 전략적으로 중요한 소르들란드 해군은 사실상 전멸하였으며, 레난군 역시 룸부르크와의 전쟁이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하였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존리아트 시가지의 약 90%가 파괴되었으며, 반격조차 하지 못하고 목숨을 잃은 해군 장병 8,000명을 포함해 4만 명 이상이 사망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발고스 제국은 해상 패권을 장악하였으며, 레난 해군은 끝내 과거의 전력을 완전히 회복하지 못하였다.
오늘날에도 많은 소르들란드 국민들은 이 사건을 '대배신'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러나 현 발그슬란드 정부는 당시의 공격을 규탄하며, 전신인 발고스 제국 정부가 저지른 행위와 명확히 선을 긋고 있다.
Suzerain Codex - Historical Events - Great Fire of Conriat
Great Fire of Conriat이후 80척으로 구성된 발고스 함대는 소이탄을 장전하고 존리아트 시가지를 향해 사흘 동안 무차별 포격을 퍼부었다. 포격으로 발생한 화재는 걷잡을 수 없이 빠르게 번져 나갔으며, 수많은 주민들이 미처 집에서 탈출하지 못한 채 산 채로 불타 죽었다. 레난 가문이 공격 소식을 전달받았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이 늦은 뒤였다. 전략적으로 중요한 소르들란드 해군은 사실상 전멸하였으며, 레난군 역시 룸부르크와의 전쟁이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하였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존리아트 시가지의 약 90%가 파괴되었으며, 반격조차 하지 못하고 목숨을 잃은 해군 장병 8,000명을 포함해 4만 명 이상이 사망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발고스 제국은 해상 패권을 장악하였으며, 레난 해군은 끝내 과거의 전력을 완전히 회복하지 못하였다.
오늘날에도 많은 소르들란드 국민들은 이 사건을 '대배신'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러나 현 발그슬란드 정부는 당시의 공격을 규탄하며, 전신인 발고스 제국 정부가 저지른 행위와 명확히 선을 긋고 있다.
Suzerain Codex - Historical Events - Great Fire of Conriat
1789년 Empire of Valgos[3]의 함대가 선전포고 없이 소르들란드의 존리아트를 무차별 포격한 사건. 존리아트 항에 정박해있던 소르들란드 함대 대부분이 침몰한 것은 물론, 도시의 90% 이상이 화재로 파괴되며 무려 4만 명 넘는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2.1.8. 헬일란트 침공
헬일란트 침공은 발고스 제국이 붕괴하는 과정에서 아그놀리아가 과거 발고스 제국에 빼앗긴 헬일란트 섬을 탈환하기 위해 감행한 군사작전이다. 1920년 혁명으로 인한 혼란이 확산되자, 아그놀리아의 요나스 블루베르크 총리는 발고스 해협과 광활한 마르키안해를 연결하는 주요 해협에 위치한 전략적 요충지인 헬일란트 섬을 확보하기 위해 군사작전을 명령하였다.
헬일란트 섬은 본래 아그놀리아 왕국의 영토였으나, 발고스 제국의 팽창 시기에 강력한 외교적 압박과 해군력의 위협으로 인해 발고스 제국에 할양되었다. 아그놀리아에서는 이러한 영토 양도가 자발적인 결정이 아닌 강압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널리 인식되었으며, 이후 역대 정부들 역시 헬일란트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공식적으로 포기하지 않았다.
아그놀리아 정부는 헬일란트에 거주하는 아그놀리아계 주민들을 보호하고 역사적으로 자국에 속했던 영토를 회복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군사작전을 정당화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에는 다른 지역 강국들이 개입하기 전에 전략적으로 중요한 해협을 확보하려는 군사적 계산도 반영되어 있었다. 발고스 제국의 통치 체제가 붕괴하고 과거 제국의 영토 전역에 권력 공백이 발생하자, 아그놀리아는 신속하게 헬일란트를 점령하고 섬의 방어시설을 강화하였다. 반면 새롭게 수립된 발그슬란드 혁명정부는 국내 통치 기반을 공고히 하는 데 우선순위를 두었으며, 헬일란트를 즉각 탈환하려는 군사작전을 감행하지 않았다.
이후 1921년부터 1924년까지 벌어진 유언장 파기 전쟁 당시 헬일란트는 직접적인 전장이 되지는 않았으나, 해군의 순찰 작전과 함선 수리, 군수물자 보급 및 병력 교대를 지원하는 요새화된 해군 거점으로 활용되었다. 룸부르크는 헬일란트 침공 계획을 수립하였으나, 오드레이크 연안에서 해군이 패배한 이후 해당 계획을 포기하였다.
헬일란트 섬을 장악한 아그놀리아는 마르키안해로 이어지는 주요 해협의 선박 통행에 영향력을 행사하거나 이를 제한할 수 있게 되었다. 이를 통해 스탈포르트와 메르코파 대륙의 여러 지역을 연결하는 해상 교통로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전략적 이점을 확보하였다.
많은 아그놀리아인들에게 1920년 헬일란트 탈환은 국가 역사상 중요한 업적이자, 상실했던 주권을 회복한 것을 상징하는 역사적 사건으로 여겨지고 있다.
Suzerain Codex - Historical Events - Heljiland Invasion
Heljiland Invasion헬일란트 섬은 본래 아그놀리아 왕국의 영토였으나, 발고스 제국의 팽창 시기에 강력한 외교적 압박과 해군력의 위협으로 인해 발고스 제국에 할양되었다. 아그놀리아에서는 이러한 영토 양도가 자발적인 결정이 아닌 강압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널리 인식되었으며, 이후 역대 정부들 역시 헬일란트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공식적으로 포기하지 않았다.
아그놀리아 정부는 헬일란트에 거주하는 아그놀리아계 주민들을 보호하고 역사적으로 자국에 속했던 영토를 회복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군사작전을 정당화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에는 다른 지역 강국들이 개입하기 전에 전략적으로 중요한 해협을 확보하려는 군사적 계산도 반영되어 있었다. 발고스 제국의 통치 체제가 붕괴하고 과거 제국의 영토 전역에 권력 공백이 발생하자, 아그놀리아는 신속하게 헬일란트를 점령하고 섬의 방어시설을 강화하였다. 반면 새롭게 수립된 발그슬란드 혁명정부는 국내 통치 기반을 공고히 하는 데 우선순위를 두었으며, 헬일란트를 즉각 탈환하려는 군사작전을 감행하지 않았다.
이후 1921년부터 1924년까지 벌어진 유언장 파기 전쟁 당시 헬일란트는 직접적인 전장이 되지는 않았으나, 해군의 순찰 작전과 함선 수리, 군수물자 보급 및 병력 교대를 지원하는 요새화된 해군 거점으로 활용되었다. 룸부르크는 헬일란트 침공 계획을 수립하였으나, 오드레이크 연안에서 해군이 패배한 이후 해당 계획을 포기하였다.
헬일란트 섬을 장악한 아그놀리아는 마르키안해로 이어지는 주요 해협의 선박 통행에 영향력을 행사하거나 이를 제한할 수 있게 되었다. 이를 통해 스탈포르트와 메르코파 대륙의 여러 지역을 연결하는 해상 교통로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전략적 이점을 확보하였다.
많은 아그놀리아인들에게 1920년 헬일란트 탈환은 국가 역사상 중요한 업적이자, 상실했던 주권을 회복한 것을 상징하는 역사적 사건으로 여겨지고 있다.
Suzerain Codex - Historical Events - Heljiland Invasion
1920년 Empire of Valgos의 내부 혼란을 틈타 아그놀리아 공화국이 양국 사이 해협에 위치한 헬일란트를 무력 점령한 사건. 이후 Empire of Valgos의 후신인 발그슬란드가 영유권을 주장하며 헬일란트를 둘러싼 영토 분쟁이 해결되지 못하고 있다.
2.1.9. 소르들란드 내전
소르들란드 내전은 소르들란드군의 세 개 군단과 무장 정치단체들 사이에서 벌어진 격렬한 무력 충돌이다. 내전의 발단은 1927년 에두아르드 루데린 장군이 일으킨 군사 쿠데타였다. 1928년 루데린 장군이 홀소르드 거리에서 수백 명의 공산주의자들을 처형하자, 이에 시민들과 제7군을 지휘하던 이안니지크 리카르드 장군이 강하게 반발하였다. 결국 리카르드 장군이 루데린의 군대를 공격하도록 명령하면서 소르들란드 내전이 발발하였다.
내전 기간 동안 홀소르드와 라지하벤에서 벌어진 시가전의 대부분은 소르드 청년단과 붉은 청년단이 주도하였다. 양측 군대 사이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가운데, 수많은 좌익 혁명가들이 거리로 나와 붉은 청년단에 합류하였다. 이들은 내전으로 발생한 혼란을 이용해 소르들란드에서 혁명을 일으키고자 하였다. 이에 맞서 수천 명의 민족주의자들도 혁명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소르드 청년단에 가담하면서 양측의 충돌은 더욱 격화되었다.
홀소르드에서 시작된 전투는 빠르게 소르들란드 전역으로 확산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수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내전이 가장 참혹한 시기에 접어들었을 무렵, 타르쿠인 솔 대령이 지휘하는 제6군은 존리아트에서 소르드 청년단과 붉은 청년단의 무장 반군을 향해 발포하여 수백 명을 사살하였다. 이를 계기로 솔 대령은 내전에 본격적으로 개입하였으며, 리카르드 장군과 루데린 장군이 이끄는 양측 군대를 모두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1929년, 타르쿠인 솔 대령은 제3군과 제7군을 격파하고 양측의 잔존 세력을 동쪽으로 몰아붙였다. 이후 홀소르드 전투에서 리카르드 장군의 마지막 잔존 병력마저 격파하면서 최종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소르들란드 내전은 종결되었다.
내전이 끝난 뒤 타르쿠인 솔은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고 공화국을 재건하였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소르들란드의 제2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Suzerain Codex - Historical Events - Sordish Civil War
Sordish Civil War내전 기간 동안 홀소르드와 라지하벤에서 벌어진 시가전의 대부분은 소르드 청년단과 붉은 청년단이 주도하였다. 양측 군대 사이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가운데, 수많은 좌익 혁명가들이 거리로 나와 붉은 청년단에 합류하였다. 이들은 내전으로 발생한 혼란을 이용해 소르들란드에서 혁명을 일으키고자 하였다. 이에 맞서 수천 명의 민족주의자들도 혁명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소르드 청년단에 가담하면서 양측의 충돌은 더욱 격화되었다.
홀소르드에서 시작된 전투는 빠르게 소르들란드 전역으로 확산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수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내전이 가장 참혹한 시기에 접어들었을 무렵, 타르쿠인 솔 대령이 지휘하는 제6군은 존리아트에서 소르드 청년단과 붉은 청년단의 무장 반군을 향해 발포하여 수백 명을 사살하였다. 이를 계기로 솔 대령은 내전에 본격적으로 개입하였으며, 리카르드 장군과 루데린 장군이 이끄는 양측 군대를 모두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1929년, 타르쿠인 솔 대령은 제3군과 제7군을 격파하고 양측의 잔존 세력을 동쪽으로 몰아붙였다. 이후 홀소르드 전투에서 리카르드 장군의 마지막 잔존 병력마저 격파하면서 최종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소르들란드 내전은 종결되었다.
내전이 끝난 뒤 타르쿠인 솔은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고 공화국을 재건하였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소르들란드의 제2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Suzerain Codex - Historical Events - Sordish Civil War
1927년부터 1929년까지 지속된 소르들란드의 내전. 쿠데타로 집권한 파시스트 에두아르드 루데린 장군에 반발해 공산주의자 이안니지크 리카르드 장군이 역 쿠데타를 시도하며 발발되었다. 수많은 사상자를 낸 끝에 타르쿠인 솔 대령이 홀소르드 전투에서 양측을 모두 진압하며 내전을 종결시켰다.
2.1.10. The Falenco Disaster of 1918
2.1.11. The Long Row North
2.1.12. The War of the Dying Roses
2.1.13. Walker Plan
2.1.14. 베흘렌 내전
1930년부터 1940년까지 지속된 베흘렌 내전은 대규모 기아와 질병, 집단학살이 만연했던 참혹한 내전이다. 역사학자들은 이 전쟁을 아르카시아와 콘타나 연방 사이에서 벌어진 대리전으로 평가한다.
내전은 베흘렌과 소르들란드의 국경 인근에서 좌익 민병대가 등장하면서 시작되었다. 국내 정세가 불안정해지자 베흘렌 정부는 아르카시아에 지원을 요청하였고, 아르카시아는 대규모 군사·경제적 지원을 제공하였다. 그러나 전쟁으로 인해 주요 무역로가 심각하게 마비되면서 이러한 지원에도 불구하고 베흘렌의 경제는 안정되지 못하였다.
전쟁이 격화되어 도시 지역으로까지 확산되자, 레스피아와 룸부르크, 아가르드 등 인접 국가들은 전쟁의 여파가 자국으로 번지는 것을 우려하여 국경을 폐쇄하였다. 이로 인해 베흘렌은 더욱 고립되었으며, 국내 위기는 한층 심각해졌다.
아르카시아군은 우수한 무기와 장비를 갖추고 있었음에도 콘타나 연방의 지원을 받는 민병대에 포위되고 수적으로도 열세에 놓이면서 반군을 진압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이러한 상황은 지역 전체의 불안정을 심화시켰으며, 대규모 난민 사태로 이어졌다. 특히 전쟁을 피해 국외로 탈출하려던 수십만 명의 베흘렌 국민이 목숨을 잃은 악명 높은 '죽음의 행진(Death March)'은 내전의 비극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남았다.
아르카시아군은 분쟁 이후의 안정화 과정에서 평화유지군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한 뒤, 1936년 철수를 완료하였다. 이후 1937년 콘타나 연방은 베흘렌의 수도 브라츨라비츠에 대규모 평화유지여단을 배치하였으며, 해당 부대는 1943년까지 주둔하며 활동을 이어갔다.
내전은 1940년 대립하던 세력 간의 화해와 통합을 목적으로 하는 과도 통합정부가 수립되면서 공식적으로 종결되었다.
이러한 중대한 정치적 재편 이후에도 콘타나 연방은 경제 원조와 국제적 지원 사업을 통해 베흘렌의 전후 복구와 국가 재건을 지속적으로 지원하였다.
Suzerain Codex - Historical Events - Wehlen Civil War
Wehlen Civil War내전은 베흘렌과 소르들란드의 국경 인근에서 좌익 민병대가 등장하면서 시작되었다. 국내 정세가 불안정해지자 베흘렌 정부는 아르카시아에 지원을 요청하였고, 아르카시아는 대규모 군사·경제적 지원을 제공하였다. 그러나 전쟁으로 인해 주요 무역로가 심각하게 마비되면서 이러한 지원에도 불구하고 베흘렌의 경제는 안정되지 못하였다.
전쟁이 격화되어 도시 지역으로까지 확산되자, 레스피아와 룸부르크, 아가르드 등 인접 국가들은 전쟁의 여파가 자국으로 번지는 것을 우려하여 국경을 폐쇄하였다. 이로 인해 베흘렌은 더욱 고립되었으며, 국내 위기는 한층 심각해졌다.
아르카시아군은 우수한 무기와 장비를 갖추고 있었음에도 콘타나 연방의 지원을 받는 민병대에 포위되고 수적으로도 열세에 놓이면서 반군을 진압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이러한 상황은 지역 전체의 불안정을 심화시켰으며, 대규모 난민 사태로 이어졌다. 특히 전쟁을 피해 국외로 탈출하려던 수십만 명의 베흘렌 국민이 목숨을 잃은 악명 높은 '죽음의 행진(Death March)'은 내전의 비극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남았다.
아르카시아군은 분쟁 이후의 안정화 과정에서 평화유지군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한 뒤, 1936년 철수를 완료하였다. 이후 1937년 콘타나 연방은 베흘렌의 수도 브라츨라비츠에 대규모 평화유지여단을 배치하였으며, 해당 부대는 1943년까지 주둔하며 활동을 이어갔다.
내전은 1940년 대립하던 세력 간의 화해와 통합을 목적으로 하는 과도 통합정부가 수립되면서 공식적으로 종결되었다.
이러한 중대한 정치적 재편 이후에도 콘타나 연방은 경제 원조와 국제적 지원 사업을 통해 베흘렌의 전후 복구와 국가 재건을 지속적으로 지원하였다.
Suzerain Codex - Historical Events - Wehlen Civil War
1930년부터 1940년까지 지속된 베흘렌의 내전. 정부군은 아르카시아, 반군은 콘타나 연방의 지원을 받았다.
2.2. 소르들란드
2.2.1. 홀소르드 전투
소르들란드 내전의 마지막 전투. 이 전투를 통해 타르쿠인 솔 대령이 에두아르드 루데린, 이안니지크 리카르드 장군의 반군을 모두 진압하였다.2.2.2. 이잠 마을 사건
이잠 마을 사건은 1933년 소르들란드에서 발생한 유혈 시위 진압 사건이다. 이 사건은 블루드족 저항 운동의 시발점이 된 역사적 사건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1933년, 베르기아와 소르들란드의 에너지 문제를 장기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추진된 솔 댐 건설 사업이 착공되었다. 그러나 댐 건설 예정지에는 이잠이라는 오래된 블루드족 마을이 자리 잡고 있었으며, 정부는 댐 건설을 위해 마을 주민들을 이주시키고 마을 전체를 철거할 계획이었다.
건설 노동자들이 현장에 도착하자 지역 주민들은 이에 반발하여 시위를 벌이기 시작하였다. 시위대는 공사를 저지하는 데 성공하였으며, 이후 10일 동안 항의 시위를 이어갔다. 시위가 시작된 지 7일째 되던 날, 시위 규모가 점차 확대되자 군 병력이 현장에 투입되었다. 시위 10일째에는 마을 원로인 바타니 아스지흐라프가 군인의 총격으로 사망하면서 시위가 폭력 사태로 번졌다. 급진파 신문 《래디컬》에 따르면, 당시 타르쿠인 솔 대통령은 댐 건설이 차질 없이 진행되도록 직접 군에 진압 명령을 내렸으며, 이에 따라 군인들이 시위대 전원을 사살했다고 한다. 결국 이잠 마을은 완전히 철거되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댐 건설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베르기아 지역 전역에서 대규모 항의 시위와 폭동이 잇따라 발생하였다. 정부는 소요 사태를 진압하기 위해 강경한 조치를 취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타르쿠인 솔 대통령의 통치 기간 중 가장 논란이 된 결정 중 하나가 내려졌다. 이로 인해 수천 명의 블루드족이 박해를 받았다. 이러한 사태를 '블루드족 학살'로 규정한 일부 블루드족 민족주의자들은 무장 저항 조직인 블루드 자유 전선(BFF)을 창설하였다. 이후 블루드 자유 전선은 소르들란드 주요 도시에서 경찰과 정부 청사를 대상으로 여러 차례 공격을 감행하였으며, 베르기아 지역은 새로운 유혈 충돌의 시기에 접어들었다. 같은 해 소르들란드 정부는 블루드 자유 전선을 테러 조직으로 지정하였다.
오늘날에도 블루드족은 매년 바타니 아스지흐라프의 사망일을 기념하는 추모 행사에 대규모로 참석하고 있다. 많은 블루드족은 이 추모일을 자신들의 민족적 정체성을 상징하는 중요한 날로 여기고 있으나, 일각에서는 이를 분리주의 정서를 상징하는 행사로 받아들이고 있다.
Suzerain Codex - Sordland - Izzam Incident
Izzam Incident1933년, 베르기아와 소르들란드의 에너지 문제를 장기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추진된 솔 댐 건설 사업이 착공되었다. 그러나 댐 건설 예정지에는 이잠이라는 오래된 블루드족 마을이 자리 잡고 있었으며, 정부는 댐 건설을 위해 마을 주민들을 이주시키고 마을 전체를 철거할 계획이었다.
건설 노동자들이 현장에 도착하자 지역 주민들은 이에 반발하여 시위를 벌이기 시작하였다. 시위대는 공사를 저지하는 데 성공하였으며, 이후 10일 동안 항의 시위를 이어갔다. 시위가 시작된 지 7일째 되던 날, 시위 규모가 점차 확대되자 군 병력이 현장에 투입되었다. 시위 10일째에는 마을 원로인 바타니 아스지흐라프가 군인의 총격으로 사망하면서 시위가 폭력 사태로 번졌다. 급진파 신문 《래디컬》에 따르면, 당시 타르쿠인 솔 대통령은 댐 건설이 차질 없이 진행되도록 직접 군에 진압 명령을 내렸으며, 이에 따라 군인들이 시위대 전원을 사살했다고 한다. 결국 이잠 마을은 완전히 철거되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댐 건설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베르기아 지역 전역에서 대규모 항의 시위와 폭동이 잇따라 발생하였다. 정부는 소요 사태를 진압하기 위해 강경한 조치를 취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타르쿠인 솔 대통령의 통치 기간 중 가장 논란이 된 결정 중 하나가 내려졌다. 이로 인해 수천 명의 블루드족이 박해를 받았다. 이러한 사태를 '블루드족 학살'로 규정한 일부 블루드족 민족주의자들은 무장 저항 조직인 블루드 자유 전선(BFF)을 창설하였다. 이후 블루드 자유 전선은 소르들란드 주요 도시에서 경찰과 정부 청사를 대상으로 여러 차례 공격을 감행하였으며, 베르기아 지역은 새로운 유혈 충돌의 시기에 접어들었다. 같은 해 소르들란드 정부는 블루드 자유 전선을 테러 조직으로 지정하였다.
오늘날에도 블루드족은 매년 바타니 아스지흐라프의 사망일을 기념하는 추모 행사에 대규모로 참석하고 있다. 많은 블루드족은 이 추모일을 자신들의 민족적 정체성을 상징하는 중요한 날로 여기고 있으나, 일각에서는 이를 분리주의 정서를 상징하는 행사로 받아들이고 있다.
Suzerain Codex - Sordland - Izzam Incident
1933년 솔 댐 건설로 인해 이잠 마을이 수몰될 위기에 처하자 블루드계 마을 주민들은 강제 이주에 저항하였다. 시위 통제 중 마을 주민 바타니 아스지흐라프가 사살되자 시위는 격화되었고, 치안병력에 의해 항의 시위대는 유혈진압되었다. 댐 건설의 지연을 막기 위해 타르쿠인 솔 전 대통령이 직접 유혈진압을 명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혈진압 이후 베르기아 지역 전체에서 시위와 폭동이 확산되자 타르쿠인 솔 전 대통령은 다시금 이를 강경 진압하였고, 이를 계기로 블루드 자유 전선이 창설되며 블루드족 저항 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다.
안톤 라이네 대통령은 임기 중 바타니 아스지흐라프 기일 추모 행사에 참여하여 전임 정부의 이잠 마을 유혈진압을 사과할 수 있다.
2.2.3. The Great Betayal
2.2.4. Recession of 1951
2.3. 리치아
2.3.1. Second Rizian Gold Rush
2.3.2. The Mefitem Invasion
2.3.3. The Reclamation War
2.3.4. The Zille Agreement
2.3.5. Uprising of 1926
2.3.6. War of Rizian Succession
3. 이데올로기
3.1. 아르카시아식 자본주의
Arcasian Capitalism아르카시아식 자본주의는 20년대 초에 벌어진 아르카시아 공화국의 시장 지향적 개혁과 함께 발흥한 사상으로, 대규모 민영화 계획, 가격 통제 철폐, 자본 시장의 규제 완화 등을 포함하고 있다. 경제적으로는 '순수한 자본주의'를 표방하며 완전히 자율적인 시장을 추구하며, 사상적으로는 개인을 사회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단위로 판단하고 개인의 행복과 자유를 긍정한다.
3.2. Immediatism
3.3. Lespian Protectionism
3.4. 말레니예프주의
Malenyevism콘타나 연방의 혁명가 레온 말레니예프가 주창한 주류 공산주의 이론. 노동자계급의 자기해방과 전위당을 통한 프롤레타리아 독재, 급진적인 산업화와 영구혁명의 필요성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현실세계의 트로츠키주의와 유사하다. 말레니예프주의는 마르키안 사회경제학[4]을 대표하는 이론으로, 이후 발그슬란드 사회주의 등의 파생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3.5. Maximism
3.6. Miraclism
3.7. Rizian Monarchism
3.8. 솔주의
Sollism타르쿠인 솔이 소르들란드 제2공화국의 건국이념으로 내세운 사상. 공화주의와 민족주의, 그리고 국가주의(경제적)의 세 기둥들을 기반으로 과학의 국가적 지원, 무상 교육 등등을 포함한 광범위한 내용이 특징이다. 제2공화국이 건립된 이래로 오랫동안 국가적인 이데올로기였지만 솔의 장기집권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떠오르면서 인기가 시들해졌다. 그럼에도 많은 현직 정치인들과 판사들이 솔과 솔주의를 옹호하기에 게임 시작 시점에서 국가 이념으로서의 위치는 여전히 높은 상태이다.
3.9. Totalism
3.10. 발그슬란드 사회주의
Valgslandian Socialism발그슬란드의 혁명가 에머리히 헤겔이 발전시킨 공산주의 이론. 말레니예프주의로부터 파생되었지만, 전위당으로 권력이 집중된 정통 말레니예프주의를 비판하며 권력의 분권화가 전제되어야 사회주의가 목표하는 불평등의 해소, 사회주의 혁명의 완수가 가능하다고 본다. 대중의 참여를 바탕으로 하는 자율적, 민주적 의사결정을 위해 발그슬란드에서 중앙의 국가권력은 노동조합과 인민의회에게로 분산되어 있다.
4. 종교
4.1. 공통
4.1.1. Nurity Origins Period
4.1.2. Nurity Divergence Period
4.1.3. Nurity Tear Period
4.1.4. Nurity Settlement Period
4.1.5. Nurity Reform Period
4.1.6. 다스트누리티교
Dastnurity누리티교의 양대 종파. 성(聖) 다스트의 가르침과 "누리티교의 11기둥"을 원문 그대로 순수하게, 엄격히 준수할 것을 강조한다. 대표적인 성지로는 데이르 대성소가 있다.
다스트누리티교는 소르들란드, 룸부르크, 베흘렌 등에서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리치아에서도 베흘렌 이민자를 중심으로 신자가 존재한다.
4.1.7. 골콘다주의
Golcondism브루헤지교의 하위 종파. 속세의 욕구와 단절하는 엄격한 신앙을 통해 지상에서 천상세계를 구현하고자 한다. 투쟁적인 전사(戰士) 문화를 내재하고 있으며, 영적 계급에 따른 철저한 사회위계를 보유하고 있다. 비교적 남녀차별이 심각하다고 평가받으며, 남성 사이의 동성애는 이상적인 사랑으로 간주된다. 이와 같은 독특한 교리로 인해 누리티교 타 종파와 갈등이 심하다.
골콘다주의는 데르디아에서 국교로 채택하고 있으며, 베흘렌과 소르들란드에 걸쳐 거주하는 블루드족의 지배적인 종교이다.
4.1.8. 누리티교
Nurity선지자 성(聖) 다스트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하는 유일신교. 궁극적으로 영적 구원과 깨달음인 "골콘다"(Golconda)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전 세계 최대 종교 중 하나이며, 메르코파 대륙에 특히 신자가 많다.
4.1.9. 개신 누리티교
Reformed Nurity누리티교의 하위 종파.
4.1.10. 브루헤지교
Wruhecism누리티교의 양대 종파. 성(聖) 다스트 못지 않게 그의 후계자인 성(聖) 브루헤의 가르침 또한 중시하며, 신앙에 있어 호기심과 회의(懷疑)의 역할을 강조한다. 성 다스트가 정립한 "누리티교의 11기둥"은 브루헤지교에서 The Alignment of the Six Stars를 경험한 성 브루헤의 "6대 핵심 교리"로 압축된다.
브루헤지교는 리치아에서 국교로 채택하고 있다.
4.1.11. Zaranism
4.1.12. Zaranurity
누리티교와 Zaranism이 합성된 종교.4.2. 리치아
4.2.1. Consecration of the King
4.2.2. Golcondist Pilgrimage to Plavo
4.2.3. The Alignment of the Six Stars
5. 기타
5.1. 공통
5.1.1. Arcasian Dream
5.1.2. First Valgish Decade Speech, 1930
5.1.3. Fortifying Perla's Future Speech, 1949
5.1.4. KA-74
5.2. 소르들란드
5.2.1. 알폰소노믹스
Alphonsonomics에발드 알폰소 전 대통령이 추진한 시장경제 정책 패키지. 아르카시아식 자본주의에 따라 공기업의 민영화, 감세, 규제 완화, 이민 완화 등이 추진되었지만 Recession of 1951로 인해 좌초되었다.
5.2.2. 에너지보호법 (EPA)
Energy Protection Act에너지 기업에 대한 외국인 지분 상한을 규정한 법률. 타르쿠인 솔 전 대통령이 제정하였을 당시에는 10%였으나, 알폰소 정부를 거치며 20%로 상향 개정되었다.
5.2.3. 국가경제자립계획 (NAP)
National Autarky Plan민간기업 국영화, 에너지보호법, 소르들란드 건설공사 채권을 통한 인프라 구축 등을 골자로 하는 계획경제 정책 패키지. 이를 추진한 타르쿠인 솔 전 대통령의 이름을 따 솔로노믹스(Sollonomics)라고도 불린다.
5.2.4. 소르들란드 건설공사 채권
SSC Bills소르들란드 건설공사 채권의 발행을 통해 마련된 자금으로 소르들란드 건설공사(SSC)는 국가기간 인프라를 건설하였다. 대표적으로 솔 댐, 홀소르드 국제공항, 발겐 댐이 신축, 라지하벤 항이 확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