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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MS 아키타니아

파일:1280px-SS_Aquitania.jpg
RMS AQUITANIA[1]
(1914 ~ 1950)

1. 개요2. 제원3. 탄생4. 제1차 세계 대전 및 그 이후5. 제2차 세계 대전에서의 활약6. 전쟁 이후7. 관련 문서

1. 개요

큐나드 라인이 1914년부터 1950년까지 운영한 대서양 정기 여객선이다. 아키타니아(Aquitania)라는 이름은 로마 제국 시기 존재했던 유럽 대륙 남서부 소재[2]속주에서 따왔다. 4개의 연돌을 가진 마지막 대서양 정기 여객선으로서, 36년이라는 긴 함생을 보내는 동안 두 차례의 세계 대전 모두에 참여했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2. 제원

  • 진수: 1913년 4월 21일
  • 취역: 1914년 5월 24일
  • 처녀 향해: 1914년 5월 30일
  • 퇴역: 1950년
  • 만재배수량: 45,647톤
  • 길이: 901 피트 (274.6m)
  • 전폭: 97 피트 (29.6m)
  • 추진: 파슨스 증기 터빈, 샤프트 4개
  • 속도 24노트 (43km/h) (상용 속도)

    • 25노트 (44km/h) (최고속도)
  • 승객: 3,230명 (1914년)

    • 2,200명 (1926년)

3. 탄생

20세기 초는 급격한 조선 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상선의 성능이 19세기 말엽에 비해 극도로 빠르게 발전하고 있었고, 따라서 고작 수 십년만에 배수량, 속도, 안락함, 안전 등이 기존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발전하게 되었다. 당시 대영제국에서 이러한 세태를 주도하던 것은 화이트 스타 라인큐나드 라인 두 해운사였는데, RMS 아키타니아는 이들의 경쟁으로 건조되게 된 여객선이다.

화이트-스타 라인은 이미 안락함을 중시한 올림픽급의 RMS 올림픽RMS 타이타닉을 건조 및 진수 중이였던 반면 큐나드 라인은 신기술을 도입해 올림픽급보다는 빨라도, 그 배수량은 1만 GRT 정도 적은 RMS 루시타니아RMS 모리타니아만이 있었고, 큐나드 라인은 위기 의식을 느껴 아키타니아의 건조를 결정한다. 루시타니아와 모리타니아는 속도는 빨랐어도 태생적인 체급의 한계로 올림픽급 여객선들만큼 호화롭지는 못하다는 평가를 받았고, 선체의 진동이 극심해 정숙성 면에서도 평가가 좋지 못했다. 아키타니아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함과 동시에 올림픽급의 성공을 벤치마킹하기 위해 루시타니아 자매들보다 더 길고 넓은데다 15,000 GRT 더 큰 배수량을 가졌고, 조금 느린 24 노트의 속도를 낸 대신 훨씬 여유롭고 호화로운 설비를 갖추게 되었다. 건조 이전에 발생한 타이타닉 침몰 사고로 인해 아키타니아는 5개 구획의 침수까지 견딜 수 있는 밀수 격벽과 승객 전체와 승무원 전원을 태울 수 있는 18척의 구명정과 2척의 무선 장비 내화정을 대빗[3]에 장비했다.

4. 제1차 세계 대전 및 그 이후

RMS 아키타니아는 건조가 완료되자 마자, 큐나드의 자랑이 되었다. 1,055명의 승객을 태우고, 아키타니아는 1914년 6월 5일에 처녀항해를 마쳤으나, 15일 전에 당시로써는 가장 컸던 대서양 정기 여객선인 SS 파터란드(SS Vaterland)가 처녀항해를 마쳤기에, 아키타니아의 처녀항해는 국가적인 자랑으로 여겨졌다. 허나 이 전날 새벽에 일어난 엠프레스 오브 아일랜드호 침몰사고로 살짝 묻혔다. 거기다가 운영을 시작한지 얼마 안되어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다. 아키타니아는 영국 정부에게 징발당하였고, RMS 아키타니아는 병원선으로 개조되었다.

아키타니아는 갈리폴리 전역에서 약 3만명정도의 부상당한 협상국 병사들을 후방으로 후송하였다.

이후 전쟁이 끝나고 큐나드 라인이 RMS 아키타니아를 잘 운영하고 있을때 갑자기 대공황이 터져 운영이 어려워졌다. 큐나드 라인은 아키타니아의 운영정책을 곧바로 저렴한 여객선으로 바꿔 지중해를 항해하게 되었다.

5. 제2차 세계 대전에서의 활약

원래 아키타니아는 1940년에 퇴역 후, RMS 퀸 엘리자베스가 그 자리를 대체할 예정이었지만,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고, 또 다시 영국 정부가 병력 수송선으로 징발하여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때까지 병력을 전장으로 수송했다. 정원이 7,400명으로 꽤나 큰 편이었고 속도를 중시하던 큐나드 라인인 만큼 수만명의 병사들을 빠르게 수송하는 등 큰 활약을 하였다. [4]

6. 전쟁 이후

전쟁이 끝나고 선적이 큐나드-화이트 스타 라인으로 반환되었다. 그러나 1914년 취역했던 아키타니아는 36년의 세월간 3백만 마일을 넘게 항해해 노후화가 매우 진행되있었고 악천후를 만나면 갑판에 물이 새고, 격벽과 연돌이 심하게 녹슬어 큰 구멍이 뚫리는 등 여러 문제가 속출하였다. 얼마나 그 노후화가 심했는지 식당 위의 천장을 뚫고 피아노가 낙하했다는 루머마저 돌았을 정도였다. 설상가상으로 건조 당시보다 훨씬 강화된 해상 안전 규정을 준수하기 위한 개장 비용이 너무 들게 되었고, 거기에 연돌도 4개인[5] 대세에 뒤쳐진 외형과 안락함 탓에 인기도 없었다. 결국 큐나드 라인은 RMS 아키타니아를 1950년에 퇴역시킨다. 동년 아키타니아는 당시 가치로 125,000 파운드에 고철로 매각된 뒤, 스코틀랜드에서 해체된다.

7. 관련 문서



[1] 실제 발음은 아퀴태이니아에 가깝다.[2] 현재의 프랑스.[3] HMHS 브리타닉 문서 참조.[4] 다만 이보다 훨씬 크고 빠른 RMS 퀸 메리RMS 퀸 엘리자베스의 활약이 너무나 커서 아키타니아의 활약이 조금 묻히긴 하였다. 물론 이들의 활약이 매우 컸다는 것이지 아키타니아의 활약이 작았다는것이 절대 아니다.[5] 참고로 아키타니아는 연돌이 4개인(four-stacked/four-funnel) 마지막 여객선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