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21 14:51:45

ILO 가입 이전의 한국

1. 개요2. 한국생산성본부와 ILO
2.1. 일반 경영 교육
2.1.1. 최고 경영자 세미나2.1.2. 중간 경영자 세미나2.1.3. 기업 대상 컨설팅 작업
2.2. 인사 관리 및 감독자 교육
2.2.1. 산업체 방문 및 교육2.2.2. 컨설팅 프로젝트2.2.3. 노사 관계 심포지엄 개최
2.3. 생산 관리 교육
2.3.1. 생산 계획 및 통제 교육2.3.2. 품질 관리 교육
3. 노동청과 ILO
3.1. 직업 훈련 강사 및 노동 감독자 양성3.2. 현장 투입 노동자 양성3.3. 장비 및 교육 교본 제작
4. 중소기업은행과 ILO
4.1. 전문가 파견 및 자문 서비스4.2. 타당성 조사 역량 개발을 위한 교육
5.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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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은 국제노동기구(이하 ILO)에 가입하는 시기인 1991년 이전까지 노동 단체들의 노력을 통해 수차례 가입 시도가 있었지만, 한국은 국제 노동 표준을 지켜서 노동자들의 권익을 보장하기에는 국가의 산업 및 경제 수준이 너무 낮다고 판단한 정부의 입장에 가로 막혀 번번히 실패했다.[1] 한국내에서의 ILO 가입 논란을 뒤로 한 채, ILO는 그들의 가장 중요한 모토인 “노동은 상품이 아니다”만큼 중요한 가치로 꼽히는 “저개발국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서 1960년대부터 한국에 여러 방면으로 기술, 경영, 교육과 관련한 원조를 실시했다. 한국이 ILO에 가입하기 전인 이 시기에 ILO가 한국에서 진행한 프로젝트는 크게 한국생산성본부가 받은 원조, 노동청이 받은 중앙직업훈련원 설립 및 운영에 대한 원조, 그리고 중소기업은행이 받은 원조로 나누어 볼 수 있다.[2]

2. 한국생산성본부와 ILO[3]

파일:한국생산성본부 포스터.jpg[4]
한국생산성본부(이하 KPC, Korea Productivity Center)는 설립된 1957년 8월부터 한국의 산업 전반적인 생산성을 향상시키고 관련 정보들을 기업들에 전파하기 위한 활동들을 시작했다. 본격적인 ILO의 지원을 받기 전인 초반(1957년부터 1962년) 5년 동안에는 정부와 여러 기업들에게 받은 기부금을 바탕으로 현대적 경영 기법의 중요성과 생산성 향상 방안을 강의를 했고, 이후 일반 경영 및 수출 마케팅 과정을 운영하며 최신 경영 기법을 교육하려는 시도를 했다. 하지만 보다 실질적인 “기업 및 공장에서 생산성을 높이는 것”을 실현하기 위해서 KPC는 해외 전문가의 지원과 더 많은 재정적 자원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고, “한국 산업의 기술 및 경영 기술 부족이 산업 재건 과정에서 주요 문제”라는 점을 근거로 1960년 5월, KPC는 대한민국 정부와 협력하여 유엔 특별기금(Special Fund)에 지원을 요청했다. 그 결과, 1962년 8월부터 ILO의 원조와 지원을 받은 KPC가 본격적으로 한국에 경영 기술에 대한 지식을 퍼뜨릴 수 있었다.[5]

KPC는 지원 사업의 확장을 통해 한국의 산업 개발 계획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기존 및 신규 산업을 위한 경영진, 전문 인력, 감독자를 양성하는 데 목적을 두었으며, 다음의 목표를 달성하고자 했다:

1. 기존 생산 설비를 효율적으로 활용해 더 높은 생산량, 낮은 비용, 높은 임금을 실현.

2. 새로운 자본 투자를 최소화하면서 생산성을 향상.

3. 한국 산업에 필요한 훈련된 관리 및 감독 인력을 제공.

이 세 가지 목적을 위해서 KPC는 ILO로부터 크게 ① 일반 경영 교육, ② 인사 관리 및 감독자 교육, ③ 생산 관리 교육에 대한 지원 및 원조를 받았다.[6]

2.1. 일반 경영 교육

일반 경영 교육은 KPC 교육 프로그램의 기초를 형성한 ILO의 원조이며, 기타 전문적인 기술 교육과 연결된다.[7] 일반 경영 교육의 목적은 회사의 경영진이 이론적인 전문 기법을 실제 일상적인 문제 해결에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지 이해하도록 돕기 위해 진행되었다.

2.1.1. 최고 경영자 세미나

프로젝트 초기에 일반 경영 교육에 의심을 가지고 회의적인 입장을 내비친 일부 회사들의 최고 경영진들을 위해 이미 다른 국가들을 통해 효과적으로 검증된 최고 경영자 세미나의 형식을 이용하여 교육을 진행했다. 1963년에 진행된 첫 세미나는 성공한 기업들의 사례 연구와 토론을 진행한 합숙 세미나로 총 16명의 최고 경영진들이 참가했다. 이듬해인 1964년에 열린 두 번째 세미나와 세 번째 세미나에서는 추가적으로 제조업 및 금융업에 종사하는 최고 경영진들이 참가하여 새로운 제품을 기획할 때 발생하는 문제에 대해서 논의하는 활동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2.1.2. 중간 경영자 세미나

회사의 최고 경영진들(사장, 부사장, 상무, 이사급 임원들)을 제외한 중간 정도 직급의 경영 기술자들에게도 비슷한 세미나를 제공하기도 했다. 주요 목표는 조직 내에서 팀워크를 강화하고 경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개발하고 경영 분석, 정책 수립, 그리고 계획한 경영법을 실행하는 방법을 학습하는 것으로, 이를 위해 "경영 팀 구축(Building Up a Management Team)", "기업 정책 수립 및 실행(Formulating and Implementing a Business Policy)", "경영 분석(Management Analysis)"와 같은 주제로 1965년과 1966년에 총 9개의 세미나를 제공했다.

2.1.3. 기업 대상 컨설팅 작업

1963년부터 ILO는 일부 대기업과 협력하여 생산성 향상을 위한 종합적인 컨설팅 프로그램을 시작했는데, 해당 컨설팅은 앞서 교육한 현대적 경영 기법의 실질적인 효과를 입증하고, KPC가 ILO를 통해서 제공한 교육의 가치를 보여주기 위해 진행되었다. 그 결과 정부 소유 기업에서는 컨설팅 결과가 즉각적으로 나타나 수익성과 효율성이 개선된 사례가 많이 나타났다고 보고되었다.

2.2. 인사 관리 및 감독자 교육

인사 관리는 경영 활동의 핵심 요소로 여겨졌으며, ILO는 현대적 인사 관리 기법[8]을 도입함으로써 기업이 효율적이고 체계적으로 인적 자원을 관리하도록 돕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2.2.1. 산업체 방문 및 교육

ILO에서 파견한 인사 관리 전문가와 카운터 파트[9]는 여러 산업체를 방문하여 기업의 인사 관리 수준을 평가하고, 교육 프로그램에 대한 필요성과 관심을 조사했다. 이후 1963년 6월부터 현대적 인사 관리 기법에 대한 교육[10]이 진행되었고, 일부 기업에서 인사 조직을 새로 설립하고 체계적인 인사 관리 시스템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2.2.2. 컨설팅 프로젝트

ILO는 KPC를 통해 특정 기업과의 협력으로 직원들의 직무 내용 분석, 임금 체계 개선, 인사 정책 수립과 관련한 컨설팅을 제공했으며, 새로운 직무 기술서와 체계적인 임금 체계를 도입하여 내부 효율성과 직원 만족도를 개선한 사례들도 보고되었다.

2.2.3. 노사 관계 심포지엄 개최

1964년에서 1965년사이에 ILO 및 KPC로 정부, 산업체, 그리고 노동 단체로부터 노동 관리에 있어서 정보를 요청하는 일이 있었고, ILO는 이를 기점으로 KPC를 통해 정부, 기업, 노동계 간의 협력 증진을 위해 3자 심포지엄[11]을 1966년에 개최했다. 이 심포지엄은 노사 간 갈등을 줄이고 협력적인 관계를 구축하는 새로운 플랫폼을 제공하기 위한 목적으로 실행되었으며, “노동조합의 권리와 의무”, “경영진의 노동자와의 상호작용 방식”, “산업 내 갈등의 해결 체계”, “노사간 신뢰를 쌓는 방법”과 같은 여러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성공적인 노사 관계 사례 제공, 실제 문제 분석과 해결 방안에 관한 토론, 그리고 노동계, 기업, 그리고 정부의 각 입장을 들어보는 패널 토의를 통해 노사 그리고 정부간의 관계를 개선하는 대화의 장이 마련되었다. 심포지엄 이후, 정부는 노사 관계 개선을 위한 정책 개발을 검토하기 시작했고, 일부 기업은 KPC와 협력하여 내부 노사 관계 교육 프로그램을 도입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2.3. 생산 관리 교육

1960년대 한국 기업은 비효율적이고 전통적인 생산 방식을 주로 사용했으며, 새로운 기법과 기술의 도입이 절실한 상황이었다. KPC는 ILO의 지원을 통해 생산 관리 교육을 제공하여 기업이 생산성을 높이고 자원 낭비를 줄이며 운영 효율성을 극대화할 수 있도록 만들어 기업의 경쟁력을 강화하고자 하는 목표로 생산 관리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했으며, ILO의 도움을 받은 프로젝트 중에서 가장 많은 인원을 배치를 받은 프로젝트였다. 1963년부터 1967년까지 총 40개의 교육 과정이 진행되었으며, 약 1,000명 정도의 최고 및 중간 경영진을 대상으로 한 훈련 및 교육을 제공했다.

2.3.1. 생산 계획 및 통제 교육

생산 계획 및 통제 과정에 대한 교육은 기업 내에서 생산 공정을 최적화하고, 자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며, 생산 일정과 물류를 체계적으로 관리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을 목표로 했으며, 실제 산업 현장에 방법론들을 도입하여 생산 계획의 설립, 자재 관리 방법, 그리고 생산을 통제하는 방법들을 이용하여 국내 경영자 및 생산 관리 감독자들로 하여금 문제 해결 능력을 기르게 했다. 해당 교육은 컨설팅 및 교육을 받고자 한 기업당 2~3주의 시간에 걸쳐서 진행되었으며, ILO 및 KPC에서 파견된 전문가와 카운터파트들이 기업들을 방문해 후속 지원을 제공한 결과, 교육 내용이 개별 기업의 조건에 적합하게 적용되었고, 생산성이 향상되었다고 보고했다.

2.3.2. 품질 관리 교육

1960년대 한국 산업은 품질 관리 기법이 체계적으로 도입되지 않은 상태였고, 생산 품질은 일관성이 부족했으며 불량률이 높았다. KPC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ILO로부터 지원을 받아 품질 관리 교육 과정을 설계하여 기업들이 제품의 품질을 보장하고, 국제적 기준에 맞춘 경쟁력을 갖추도록 교육했으며 크게 기초 품질 관리, 통계적 품질 관리, 품질 검사 및 개선 교육 및 실습을 진행했다.

먼저 기초 품질 관리 교육을 통해서 품질 관리의 기본 개념과 원칙을 이해하고 실무에 적용할 수 있도록 교육했으며, 해당 과정에서 품질 보증(Quality Assurance)의 개념 및 중요성, 제품 설계에서부터 생산 그리고 납품에 이르는 품질 관리의 전체 흐름에 대한 이해를 시키려고 했고, 품질 목표 설정 및 주요 성과 지표(KPI)를 개발하기도 했다.

통계적 품질 관리에서는 생산 공정에서 발생하는 변동을 파악하고 이를 통제하는 기법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제품을 생산하는 공정에서의 이상 징후를 식별하는 능력을 길렀으며, 최종적으로 불량 데이터를 수집하고 원인을 분석하여 개선책을 도출할 수 있는 실무 능력을 교육했다.

해당 과정들과 더불어 산업별 맞춤형 품질 관리 프로그램 또한 진행되었으며 그 예시로 1967년 5일 동안 진행된 "기계 산업 품질 관리" 프로그램, 그리고 같은 해 1주일 동안 진행된 "섬유 산업 품질 관리" 프로그램을 통해 당시 한국의 주요 산업인 제조업과 섬유 산업의 품질이 평균적으로 상승한 보고가 있다.

3. 노동청과 ILO[12]

[13]
대한민국의 산업 발전을 위한 인력 양성의 일환으로 직업훈련에 대한 필요성이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7년에서 1971년)에서 산업화를 강조함에 따라 부각되었다. 이를 위해 정부는 UNDP 특별기금을 통해 중앙직업훈련원의 설립을 지원해 줄 것을 요청[14]했으며, 그 결과 1968년 6월 UNDP 운영 이사회에서 승인되었고, ILO가 프로젝트의 참여 및 실행 기관으로, 보건사회부 산하 노동청이 협력 정부 기관으로 지정되면서 1968년 11월 12일 노동청 산하의 산업 역군을 육성하는 중앙직업훈련원이 설립되었고, ILO의 도움과 원조로 여러가지 교육 프로그램이 진행되었다.

정부는 노동청 산하의 중앙직업훈련원 설립을 통해 국가 차원에서 산업 직업훈련 체계를 개발하고 실행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시스템을 구축하려고 했다.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를 지나면서 빠르게 산업화되고 있는 한국의 경제적 및 산업역 요구에 맞춰 숙련된 인력을 양성하는 체계를 구축하는 데 중점을 두었으며 구체적으로는 다음의 목표를 달성하고자 했다:

1. 강사 훈련 센터를 통한 기존 및 신규 직업 훈련 강사의 양성과 실력 유지.

2. 공공 직업훈련 센터를 통한 금속, 전기, 목공 등 다양한 기술 분야에서 산업에 기여할 수 있는 노동자 양성.

3. 현장 내 직업훈련 프로그램을 통한 산업체에서 자체적으로 훈련 프로그램을 운영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시스템 구축.

4. 훈련 자료 개발을 위한 기술 사무소를 통한 직업 훈련에 사용할 교육 자료와 보조 도구의 제작.

이 네 가지 목적을 위해서 노동청은 중앙직업훈련원을 통해 ILO로부터 크게 ① 직업 훈련 강사 및 노동 감독자 양성, ② 현장 투입 노동자 양성, ③ 장비 및 교육 교본 제작에 대한 원조를 받았다.

3.1. 직업 훈련 강사 및 노동 감독자 양성

파일:직업 훈련 강사 자료.png
[15]
중앙직업훈련원에서 제공한 직업 훈련을 담당하는 강사의 훈련 프로그램은 2년 정규 과정으로 제공하였으며, 기계공작, 판금 및 용접, 전기 설치, 라디오 및 텔레비전 수리, 자동차 정비, 산업 도면, 주조 및 패턴 제작 등 다양한 직종에 걸친 실습 훈련을 통해서 노동자들의 교육을 담당하는 신규 강사들을 양성하였다.

또한 신규 강사의 교육과 더불어 이미 직업 훈련 강사이거나 실무를 경험한 사람들에 한해서 2주간의 단기 향상 프로그램을 제공했다. 추가적으로 ILO는 UN 개발 계획(UNDP)와 함께 강사들을 훈련할 자료들을 만들 전문가들을 파견하여 기존 한국의 담당 강사들과 긴밀히 협력하여 교육 자료들을 제작하고, 이를 중앙직업훈련원 이외의 다른 직업 훈련원으로 배포하여 중앙직업훈련원을 중심으로 국가 및 기업들의 직업 훈련 방식이 크게 발전할 수 있었다. 훈련을 마치고 사회로 배출된 직업 훈련 강사들의 급여는 처음에는 높지는 않았지만, 이후 1972년 4월부터 정부의 권고로 전문기술대학 교원 수준으로 급여가 상승하여 나쁘지 않은 대우를 받았다.

노동 감독자 훈련 프로그램은 산업 현장에서 감독 역할을 수행할 인력을 양성하기 위해 설계된 과정으로 해당 프로그램을 통해 한국의 산업화 과정에서 필수적인 숙련 감독자를 확보할 수 있었다. 기본적으로 TWI(Training With Industry)[16]의 방식으로 훈련이 진행되었으며, 작업 지시 방법과 실행 전략, 근로자와의 관계 개선 및 팀워크 형성, 업무의 효율성을 높이는 작업 방법,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산업 재해를 방지하기 위한 안전 기준과 실천에 대한 교육이 중점적으로 이루어졌다.

3.2. 현장 투입 노동자 양성

파일:현장 노동자 양성 자료.png
[17]
중앙직업훈련원에서 노동자(또는 기능공)들의 훈련은 직업 훈련 강사들이 교육받은 과정과 비교했을 때 서로 다른 과정을 따르지만, 동일한 물리적 자원과 인력(ILO에서 파견된 전문가들, 카운터파트들)을 공동으로 사용하였다. 산업에 직접적으로 기여하는 이 숙련된 노동자들은 교육 도중과 이후 "직무 분석 및 기술 테스트"를 통해 일정 기준에 달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는지 도달했는지 평가를 받았으며 그들의 자격을 인증하는 수단으로도 사용되었다. 추가적으로 직무 분석 및 기술 테스트는 교육받은 노동자 개개인의 능력을 평가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특정 직종에서 필요로 하는 기술을 단계적으로 습득할 수 있는 훈련 과정을 개발, 그리고 최소한의 기간 내에 숙련된 기술을 배울 수 있도록 최적화하는데 기여하면서 국가 직업훈련 체계의 질적 향상을 이루는 데 도움을 주었다.

3.3. 장비 및 교육 교본 제작

파일:교육 자료 목록.png
[18]
중앙직업훈련원은 훈련 자료와 교육 보조 도구를 개발하는 데 있어 중심적인 역할을 맡았으며, 이를 자체적으로 사용할 뿐만 아니라, 한국의 다른 직업훈련 기관에도 제공하기도 했다. 강사 훈련 및 노동자(기능공)들의 훈련 과정을 담은 커리큘럼과 강의 계획서는 직무 분석 및 기술 테스트 결과, 그리고 ILO 교육 전문가의 지도 아래 직업 훈련 강사가 훈련 프로그램을 운영하면서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매년 검토 및 수정을 거쳤으며, 이를 통해서 발행된 훈련 출판물 및 교본은 1972년 기준으로 16권에 도달할 정도로 많은 노력이 들어간 작업이였다.

4. 중소기업은행과 ILO[19]

1960년대 중후반의 시기에 한국에서 중소기업은 전체 산업 생산 및 수출의 약 1/3을 차지했으며, 전체 산업 노동력의 약 50%를 고용하고 있는 상황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소기업은 관리 및 기술적인 한계로 인해 성장이 제한되는 상황이 발생했고, 더나아가 국제 시장에서 경쟁력이 부족한 상황이었다.ILO는 그들의 "저개발 국가의 지속가능한 생산"이라는 모토를 실현하기 위한 방법으로 중소기업의 성장을 도모하는것이 옳다고 생각했고, 이러한 중소기업의 경영 및 기술 능력을 개선하여 국가 경제의 발전과 고용 증대를 일으키기 위해서 당시 중소기업들을 상대하던 은행인 중소기업은행(현 IBK 기업은행)에 1967년 8월부터 다방면으로 원조를 시작했다.

중소기업은행은 ILO의 지원을 통해 중소기업의 경제적 발전과 사회적 안정성을 촉진하고자 했다. 구체적으로, ILO는 중소기업은행의 확장서비스부(이하 ESD, Extension Services Department)를 통해 관리 및 기술 자문 역량을 강화하고 한국 중소기업의 지속 가능성과 경쟁력을 높이는 것을 목적으로 했으며 ILO로부터 크게 ① 전문가 파견 및 자문 서비스와 ② 타당성 조사 역량 개발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을 원조 받았다.

크게 1967년부터 1971년까지의 ILO 및 UNDP의 1 단계 지원(phase 1)을 통해 ESD를 설립하고 해당 사업부를 통해 중소기업들에 한해서 기술 및 경영에 대한 컨설팅을 진행했다. 1972년 8월부터 1975년 12월까지 진행한 2 단계 지원(phase 2)에서는 ESD의 역할을 더욱 강화하고, 기존에 전문가를 파견하여 진행된 자문 서비스를 스스로할 수 있도록, 구체적으로는 은행에서 해당 사업을 독립적으로 할 수 있는 능력을 확보하기 위해 진행된 연속 프로젝트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4.1. 전문가 파견 및 자문 서비스

1 단계 지원과 2 단계 지원을 걸쳐서 진행된 ILO의 전문가를 통한 자문서비스는 실제 중소 기업 현장에서의 "실무 사례"를 중심으로 한 훈련에 주력했다. 그 중 2 단계 지원에 해당하는 phase 2(1972년부터 1975년까지)를 중심으로 보면 크게 4명의 ILO 기술 및 경영 전문가, 유엔 산업 개발 기구(UNIDO)에서 파견된 5명의 전문가, 그리고 일본에서 파견된 하청급 인력의 전문가 17명이 길게는 74개월, 짧게는 31개월 동안 중소기업들을 대상으로 관리 자문, 생산 관리, 제품 개발, 직업 안전 분야에 대한 컨설팅 및 자문을 진행했다.

이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제품을 생산하는 공정의 개선 및 제품 품질 향상, 폐기물 및 불량률 감소를 통한 자원 절약, 그리고 작업 안전 문제 해결을 하는 것이었으며, 전문가들이 모든 일을 직접 하기보다는 중소기업은행에 설립한 ESD의 직원들이 주도를 하면 외부 전문가들은 가이드 및 기술적 조언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진행해서 원조가 끝나더라도 한국에서 독립적으로 이와 같은 자문과 컨설팅을 진행 할 수 있도록 역량을 키우는 방식을 선택했다.

4.2. 타당성 조사 역량 개발을 위한 교육

중소기업에 대한 타당성 조사는 해당 기업에서 진행하는 특정 산업 프로젝트의 성공 가능성을 평가하기 위해 마케팅, 기술, 재무적 관점에서 데이터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과정[20]으로, 당시에 중소기업들이 대출을 신청할 때 은행의 입장에서는 그 사업이 돈을 빌려주거나 투자할 가치가 있는지 판단하는 능력이 힐수적이었고 프로젝트가 실현 가능한지, 그리고 재정적으로 수익성이 있는지를 판단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대부분 외국의 전문가들에게 이런 과정을 의존하는 경향이 강했기에 ILO 및 UNIDO의 전문가들은 한국이 스스로 회사의 가치 판단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기 위해서 중소기업은행의 직원들을 중심으로 중소기업의 사업 타당성을 조사할 수 있는 역량을 키우기 위한 위한 교육을 진행했다.

교육은 실무중심적으로 운영되었으며, phase 2 기준으로 3~4명의 ESD 직원들로 구성된 팀에 ILO와 UNIDO의 전문가들이 담당하여 총 8가지 분야에 대한 중소기업들의 사업 타당성 조사를 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이 8가지 분야는 섬유 염색, 주조, 전기 도금, 기계 설비 및 가공, 세라믹, 프레스 툴, 섬유 생산, 그리고 최종적으로 여러 중소기업의 경영 및 재무 시스템 내용으로 이와 같은 교육들을 통해서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대출 및 투자를 할 평가 모델 개발을 위한 기초 데이터를 확보할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특정 산업 및 기술 문제를 해결하면서, 중소기업은행이 타당성 조사 시스템을 정착시키고 직원들에게 실질적인 역량을 배양하는 데 크게 기여했으며 한국의 독립성이 성장할 수 있던 중요한 시발점이 되었다.

5. 결론

ILO를 중심으로 한국생산성본부, 노동청과 중앙직업훈련원, 그리고 중소기업은행은 여러가지 원조를 받았으며, 실제로 한국의 산업 및 경제 발전에 있어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일으킨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의 의도와 다르게 여러 한계를 살펴볼 수 있다.

우선 ILO는 이 세 가지 원조를 통해 관리 및 개발 지향적인 실용적 지식의 기업내 확산을 의도했다. ILO의 입장에서는 노동자 관리를 과학화 그리고 체계화하는 것이 생산성을 향상시키고 경제 성장에 도움될 것으로 보았으며 궁극적으로 노동자들의 고용개선 및 생활 향상으로 이어질 것으로 예상하고 기업과 산업의 관리자들에게 "실용적인" 경영 기술을 원조한 것이다. 또한 ILO가 보기에는 경영 기술을 원조하는 것은 저개발 국가의 생산성을 증가시킬 수 있는 방법이었고, 생산성의 향상은 국가의 생활수준을 높이기에 향후 노동 조건과 노동 임금의 인상을 가져오게 하는 간접적인 노동자의 생활향상 방법으로 여긴 것이다.

ILO가 당시 저개발국에 대한 원조 프로그램을 계획할 때 참고한 "커와 하비슨의 근대화론"[21][22]에서 더 자세히 살펴볼 수 있는데, 해당 이론에서는 경영자를 산업 엘리트로, 노동자를 인적자원으로 규정하며, ILO는 이런 이론에 입각하여 저개발 국가가 근대적인 공업사회로 변하기 위해서는 노사관계가 원만해야 하며 무엇보다 경영자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여겼다.이를 근거로 하여 저임금과 같은 근로조건 개선이나 산업안전 문제보다 경영 능력의 부재를 더 큰 문제로 보았기에 경영 기술원조와 이에 따른 인력 개발, 그리고 노동자들의 직업 훈련에 더 관심이 많았던 것이다.[23]

결과적으로 ILO는 진정한 인력개발의 효과를 보기 위해서는 노사 간의 갈등이 없어야 하며 평화가 유지되어야 한다는 자문위원들의 의견을 간과하게 되었다. 물론 정부, 기업, 그리고 노동자가 참가한 3자 심포지움을 열어서 대화의 장을 펼치려는 일부 노력을 보여주었지만, 대부분의 원조는 경영기술, 생산 관리, 노동자 육성에 한해서 받게 된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노사 협조적인 분위기가 형성이 되어야 인력 개발과 직업 훈련과 같은 교육의 효과가 나타날 수 있지만[24] ILO의 노동자 교육을 담당한 교육자들은 오직 인력 개발 그 자체에 중심을 두었기 때문에 노동청, 한국생산성본부 그리고 중소기업은행 등과만 교류하고 노동자 해고 문제, 노조 간부 육성에는 큰 신경을 쓰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추가적으로 1960년 ILO의 "한국의 산업보건", 1969년 ILO의 "사업장안전보건실태조사 결과보고서"로 1960년대 한국의 산업 보건과 안전에 관한 문제점들이 지적되긴 했지만 기본적인 노동자 복지, 안전 기준 준수, 그리고 작업장 환경 개선조차 하지 못한 곳들이 대부분이었기에 노동자들의 산업안전과 보건 관리, 그리고 산업 재해 방지를 위한 조사와 지식 제공도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한계 또한 지적할 수 있다.[25]

정리하면, ILO는 경영 기술 원조를 위주로 기업을 운영하는 경영인들의 육성을 통해 경제 개발을 일으키고 이에 따라 필요한 노동자들의 능력을 인력개발을 통해 키워서 노동자들의 삶을 간접적으로 향상시키려고 했지만, 적어도 1960년대와 1970년에서는 그들의 가장 중요한 가치인 "노동자들의 권익 향상"을 충분히 이루진 못했다.

[1] 특집 인권의 역사를 다시 본다: 인권레짐과 인권없음의 사이에서: 인력개발과 노동자 인권 사이에서 1960년대 한국, 그리고 국제노동기구(ILO), 이봉규, 79-89페이지 참고.[2] 본 문서는 "인력개발과 노동자 인권 사이에서 1960년대 한국, 그리고 국제노동기구(ILO), 이봉규"와 국제노동기구인 ILO에서 직접 발행한 1960년대와 1970년대 지원한 사업들에 대한 진행 및 결과를 담은 보고서의 내용들을 바탕으로 기재했음을 밝힌다.[3] 본 내용은 모두 "International Labour Organisation., and International Labour Organisation. 1970. Korea Productivity Centre, Seoul - Final Report Prepared for the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Geneva: ILO"를 참고하여 기재하였다.https://labordoc.ilo.org/discovery/search?query=any,contains,productivity%20korea&tab=ALL_ILO&search_scope=ALL_ILO&vid=41ILO_INST:41ILO_V2&offset=0[4] 한국생산성본부가 1968년 9월 1일 국내에서 처음 개최한 '제 1회 국제사무기계화촉진전시회'의 홍보 포스터로 이와 같은 행사를 ILO의 도움으로 개최하여 기업의 생산성을 향상 시키는 컨설팅들을 진행했다.[5] 한국이 처음 요청했던 것과 UN에서 수정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원 기간을 3년에서 5년으로 연장, 총 특별기금 지원액을 991,550달러에서 860,600달러로 축소, 10명의 한국 직원을 해외에서 훈련하기 위한 30,000달러를 할당, 교육 장비 및 사무 장비를 위해 20,000달러(후에 30,000달러로 증가) 배정, 번역 서비스 및 기타 비용으로 32,000달러 배정.[6] 이외에 마케팅 관리 교육, 회계 사무 관리 교육, 그리고 전자 및 데이터 처리 서비스 교육에 관한 프로그램도 있었으나 가장 중요한 경영 기술 원조와 관련된 것은 위 네 가지 원조가 가장 직접적이므로 이에 대해서만 기재한다.[7] 여기서 기본이 되는 work study(생산성과 효율성을 향상시키기 위해 작업 과정을 분석하고 최적화하는 기법)를 배운 기술자가 회사로 돌아갔을 때, 상위 경영진이 작업 연구의 이점을 이해하지 못하면 해당 기술을 실제로 적용하기 어려워지는 문제점이 발생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경영진이 이러한 전문 기법의 가치를 이해하면, 조직 내에서 해당 기법을 수용하려는 움직임이 촉진되고 더 나아가 기업이 빠르게 최신 경영 기술을 도입할 수 있게 된다.[8] 조직 내 인재의 채용, 배치, 평가, 보상, 개발 과정을 체계적으로 수행하는 접근법[9] 타 기업에서 대응되는 동일한 역할을 하는 사람, 멘토와 비슷한 느낌[10] 2주 이론 교육 → 3주 기업 적용 → 1주 평가 및 분석[11] 첫 심포지엄은 4일 동안 24개의 회사, 2개의 정치 정당, 노동청, 대학들, 보건복지부에 소속된 115명의 사람들이 참가함.[12] 본 내용은 모두 "International Labour Organisation., and International Labour Organisation. 1973. Republic of Korea: Central Vocational Training Institute; Report on Project Results, Conclusions and Recommendations. Geneva: ILO"를 참고하여 기재하였다.https://labordoc.ilo.org/discovery/search?query=any,contains,training%20korea&tab=ALL_ILO&search_scope=ALL_ILO&vid=41ILO_INST:41ILO_V2&offset=0[13] 1975년 11월 29일에 제작된 대한뉴스 1058호로, 노동청이 ILO와 UNDP의 지원을 받아 설립한 중앙직업훈련원에 박정희 대통령이 방문하는 모습[14] 요청에는 165만 1,400달러의 UNDP 기금이 포함[15] ILO가 1973년에 발행한 직업 훈련 강사의 누적 데이터로 용접(welding), sheet metal(판금), electrical fitting(전기 배선)등 여러 분야의 노동자들을 교육할 수 있는 강사들을 양성했음을 알 수 있다.[16] 노동 현장의 감독자에게 감독자의 기본적인 기능을 몸에 익히게 해서 감독능력을 발휘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으로서 제일선 감독자(직장, 반장, 조장 등)를 대상으로 한 정형훈련이다. 쉽게 말하면 감독자로서 노동자에게 어떤 작업을 해야할지 설명하는 것부터, 어떻게 작업을 해야하는 지, 잘못하고 있다면 어떤 점을 잘못하고 있는지 지적하는 방법과 안전에 위협이 될만한 요소들에 대해서 사고하는 방법과 같이 산업 현장에서 사람을 다루는 전반적인 방법을 훈련시키는 방식이다.[17] ILO가 1973년에 발행한 중앙직업훈련원에서 교육한 skilled worker(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누적 데이터로 양성된 직업 훈련 강사들과 마찬가지로 다방면의 산업 분야에 기여할 수 있는 인력이 양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18] ILO의 도움으로 1972년까지 중앙직업훈련원에서 발행한 교본들의 목록[19] 본 내용은 모두 "International Labour Organisation., and International Labour Organisation. 1975. Republic of Korea: The Development of Management and Technical Consultancy Services of the Extension Services Department of the Medium Industry Bank. Geneva: ILO"를 참고하여 기재하였다.https://labordoc.ilo.org/discovery/search?query=any,contains,korea%20bank&tab=ALL_ILO&search_scope=ALL_ILO&vid=41ILO_INST:41ILO_V2&offset=0[20] 현재 기준으로는 은행, 투자 회사, 증권사에서 근무하는 분석가들이 진행하는 회사내 사업에 대한 가치 평가와 비슷하다[21] 미국의 경제학자였던 클라크 커와 미국의 노동 경제학자였던 프레드릭 하비슨이 발표한 근대화론으로, 1968년 9월에 일본 도쿄에서 진행된 ILO의 아시아지역 회의에서 이와 관련하여 논의함.[22] Kerr, C., Harbison, F. H., Dunlop, J. T., & Myers, C. A. (1996). Industrialism and industrial man. International Labour Review, 135(34), 383–392. https://researchrepository.ilo.org/esploro/outputs/journalArticle/Industrialism-and-industrial-man/995219291402676을 참고[23] 특집 인권의 역사를 다시 본다: 인권레짐과 인권없음의 사이에서: 인력개발과 노동자 인권 사이에서 1960년대 한국, 그리고 국제노동기구(ILO), 이봉규, 91-92페이지 참고.[24] 특집 인권의 역사를 다시 본다: 인권레짐과 인권없음의 사이에서: 인력개발과 노동자 인권 사이에서 1960년대 한국, 그리고 국제노동기구(ILO), 이봉규, 93-94페이지 참고.[25] 특집 인권의 역사를 다시 본다: 인권레짐과 인권없음의 사이에서: 인력개발과 노동자 인권 사이에서 1960년대 한국, 그리고 국제노동기구(ILO), 이봉규, 94-95페이지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