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협률사는 우리나라 최초의 황실 극장이자, 국립 극장, 근대식으로 지어진 상설 실내극장이다. 창극(唱劇)이 주가 되고 때로는 잡가나 연희(演戱)도 공연한 상설극장으로, 서울 광화문 새문안교회 부근 야주현(夜珠峴)에 세워졌었다.2. 상세
1902년에 고종의 즉위 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처음엔 희대(戱臺)라는 이름의 궁내부 산하 황실 전용 극장으로 지어졌으나, 고종은 즉위 40주년 기념 행사를 위해 다시 황명을 내려 협률사(協律社)라는 이름으로 칭하고[1] 국창 김창환을 사장으로 임명하여 전국에서 가장 뛰어난 예인을 극장 협률사에 모이도록 하였다. 당시 170여 명의 예인이 모였으며, 그들은 협률사 전속으로 대우 받았고, 관급[2]도 지급 받았다.1906년 콜레라 등 당시 각종 질병의 만연과 영친왕의 투병으로 잠시 문을 닫고 관인 구락부로 사용되었는데, 1908년부터 원각사(圓覺社)라는 이름으로 재개관하였다. 당시 사실상 궁내부에서 직할하는 국립 기관이었으며, 대표는 '은세계', '혈의 누' 등의 작가 이인직, 사장은 대령숙수 안순환, 전속 단장은 당대 최고의 국창 이동백이었고, 배우는 김창환 외 명창 40명 등 총원 64명을 두었다.
재개관 당시 창극 '은세계' 등을 공연하였고, 경술국치 이후 1914년 화재로 소실되었다. 광복 후 한참이 흐른 2013년경에 복원 계획이 있었지만 지금은 감감 무소식이다. 그도 그럴 게, 남아있는 사진이라고는 단 한 장밖에 없는 데다가 내부고증도 완벽하지 않은 상태에서 함부로 복원을 진행하면 의혹만 남고 화젯거리도 되지 못할 것이기에 포기한 것으로 보인다.
판소리와 민속무용 등을 주로 공연하였으며, 판소리를 분창(分唱)하여 창극을 만들기도 하였다. 원각사가 없어지자 원각사 소속 예인들은 '조선성악연구회'라는 단체를 조직하여 직속 극단으로 창극좌를 만들어 전국적으로 돌아다니며 공연 활동을 하였다. '협률사(1902)' - '원각사(1908)' - '조선성악연구회 창극좌' - '국악원(대한국악원)'[3] 으로 이어지는 역사와 전통을 이은 단체가 현재 국립창극단이다.
[1] 협률사라는 이름은 새롭게 만든 이름이 아니라, 이미 희대라는 극장이 지어지기 40여 년 전부터 있던 명창들이 모인 단체의 이름이다.[2] 官給, 나라에서 주는 돈[3] 대한국악원 직속 산하 단체로 국극사, 국극협회, 조선창극단, 김연수창극단, 임방울일행 등 5개 단체가 있었다. 이중 조선창극단은 조선성악연구회 창극좌의 후신으로, 창극좌와 화랑창극단이 합병된 단체이다. 조선성악연구회 창극좌 단원이자 이후 조선창극단 단원으로 꾸준히 활동한 김소희는 국립창극단 창립멤버이자 부단장직을 맡았고, 같은 창립멤버이자 김연수창극단을 이끌던 김연수는 초대 국립창극단장으로 취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