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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李淳安 / Hiển Khánh vương / 히엔카인브엉생몰년도 미상
베트남 대월 리 왕조를 세운 리조 초대 황제 태조의 부왕이다. 생전 행적은 전해지지 않으며 사후 아들 리태조가 즉위하자 현경왕(顯慶王)으로 추존되었다.
그의 생애와 휘는 전해지지 않으며 그의 왕후로 전해지는 팜씨((họ Phạm, 范氏, 범씨)[1]는 초산사(焦山寺, chùa Tiêu Sơn)를 거닐다 신인을 만났고 그와 교제하여 리태조를 낳았다고 한다. 이후 977년 범씨는 리태조를 법사(法師) 리카인반(Lý Khánh Văn, 李慶文, 이경문)의 양자로 보냈다.
이렇듯 현경왕 본인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지만 현대 중국의 역사학자 이천석(李天錫)의 주장에 따르면 현경왕의 휘는 이순안(李淳安)이며 그의 부친은 중국 오대십국시대 당시 재상이였던 이숭(李崧)의 아들이였다고 한다.
하지만 해당 주장의 신빙성은 상당히 떨어진다. 《대월사기전서》 리 태조가 중국 출신이라는 주장은 북송의 학자 심괄(沈括, 1031~1095)이 저술한 《몽계필담》(夢溪筆談)의 기록[2]과 푸젠성에서 발견된 족보 《이장추내이씨방보》(李莊𤆬內李氏房譜)에 근거한 것인데, 《몽계필담》의 기록은 원나라의 베트남 침공 때 원나라 군대에 협조했던 쩐 왕조의 관료 레딱(Lê Tắc, 黎崱, 여즉, 1263~1342)의 베트남 관련 서적 《안남지략》(安南志略)[3]에서 부정했고,[4] 《이장추내이씨방보》(李莊𤆬內李氏房譜)에 기록된 리태조의 출생년도가 《대월사기전서》보다 10년 정도 늦기 때문.[5]
베트남 학계엔 현경왕의 정체에 대한 다양한 기록과 견해가 있는데, 리꽁우언의 왕위 등극을 예언했던 반하인 선사라는 견해, 리꽁우언의 양부로 기록된 리카인반이라는 견해, 리태조의 부계가 명확하지 않으니 현경왕은 가상의 인물이라는 응오티시(Ngô Thì Sĩ, 吳時仕, 1726~1780)의 견해[6], 응우옌 왕조 시절 판케빈(Phan Kế Bính, 潘繼炳, 반계병, 1875~1921)이 저술한 《남해이인열전》 (南海異人列傳)에 수록된 리태조의 아버지가 우물에 빠져죽고 흰개미에 묻혔다는 기록, 지금의 남딘성 부반현(Huyện Vụ Bản)에 있는 히엔카인이라는 지명에 관한 기록과 《대남일통지》(大南一統志)에 있는 히엔카인에 소재한 리 인종의 사당에 대한 기록을 근거로 히엔카인 출신일 수도 있다는 응우옌하이케(Nguyễn Hải Kế)의 견해, 12사군 중 시에우로아이(Siêu Loại, 超類, 초류)[7]에 근거하고 있던 리쿠에(Lý Khuê, 李圭, 이규)라는 쩐시에우(Trần Siêu)의 견해가 있다.
2. 참고 항목
[1] 태조가 명덕태후(明德太后, Minh Đức Thái Hậu, 민 득 타이 허우)로 추존함.[2] 여환이 죽자 안남이 매우 어지러워졌는데, 오랫동안 국주가 없었다. 나중에 국인들이 함께 민지역 사람인 이공온(리태조)을 국주로 삼았다. (桓死,安南大亂,久無酋長。其後國人共立閩人李公蘊為主。)[3] 《안남지략》은 레딱이 원나라가 베트남을 침입했을 당시 원나라 군대의 베트남 정벌을 도울 목적으로 저술한 베트남 안내서다.[4] 이공온은 교주 사람으로 (어떤 이는 민지역 사람이라고 하는데, 아니다), 병법에 밝았다. 李公蘊,交州人 (或謂閩人,非也),有韜略。[5] 북송(北宋) 옹희 원년(雍熙 元年, 984년) 1월 14일생이라 기록되어 있다.[6] 응오티시는 1018년에 황후로 추봉됐다는 리태조의 조모를 외조모로 파악했다.[7] 지금의 박닌성(Tỉnh Bắc Ninh) 투언타인현(Huyện Thuận Thàn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