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헨리 레트퍼드 Henry Retford | |
생몰년도 | 미상 ~ 1459년 | |
출생지 | 잉글랜드 왕국 링컨셔 | |
사망지 | 잉글랜드 왕국 슈롭셔 러들로 | |
아버지 | 헨리 레트퍼드 | |
어머니 | 캐서린 페이넬 | |
직위 | 보르도 시장, 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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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에 귀속된 가스코뉴 공국의 중심지인 보르도의 마지막 시장으로, 백년전쟁 최후의 전투인 보르도 공방전 이후 프랑스에 항복했다. 이후 장미 전쟁에서 요크 왕조를 지지했다가 랭커스터 왕조에 의해 처형되었다.2. 생애
아버지 헨리 레트퍼드는 버킹엄셔 출신의 기사로, 1397년 서방교회 대분열의 종식을 협상하는 임무를 수행했고, 링콘셔의 순회 판사 및 보안관을 역임했다. 1399년 볼링브로크의 헨리가 리처드 2세를 상대로 반기를 들었을 때 대세를 파악하고 헨리를 지지했고, 볼링브로크의 헨리가 헨리 4세로 등극한 뒤 헨리 4세의 근위 기사가 되었다. 이후 링컨셔 의원에 선출되어 1409년 사망할 때까지 링컨셔의 지역 문제에 전념했으며, 웨일스에서 반란을 일으킨 오와인 글린두르를 상대로 원정을 벌이는 왕실군에 가담해 여러 전투에 참여했다. 이 인물은 케이소프의 기사 랄프 페이넬의 딸인 카트린과 결혼해 아들 헨리를 낳았다.1427년 링컨셔 보안관을 역임했으며, 가스코뉴로 가서 여러 전투에 참여했다. 1452년 10월 존 탈보트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보르도를 비롯한 가스코뉴 서부 일대를 일시적으로 탈환한 뒤 보르도 시장에 선임되었다. 그러나 1453년 7월 17일 카스티용 전투에서 존 탈보트가 전사하고 많은 잉글랜드군이 목숨을 잃었다. 이에 살아남은 병력을 규합하여 보르도로 귀환한 로저 카모이스와 함께 프랑스군의 공세로부터 보르도를 지키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두 사람은 보르도, 리부른, 케딜락, 블랑크포르 요새의 방어를 조직했고, 프랑스와 협상을 벌이면서 원군이 올 때까지 시간을 가능한 끌려 했다.
그 후 보르도를 포위한 프랑스군을 상대로 3개월간 악전고투했지만, 원군이 끝내 오지 않자 결국 10월 19일에 무기와 물품을 가지고 잉글랜드로 안전하게 돌아가는 조건하에 보르도를 넘겼다. 이후 보르도 종신 시장에 카스티용 전투의 승리를 이끈 장 뷔로가 선임되었고, 그는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장미 전쟁이 발발했을 때 요크 왕조를 지지했다가 1459년 러들로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패배하여 생포된 뒤 랭커스터 왕조 지지자들에 의해 반역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처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