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1-21 19:55:45

허창두

파일:허창두.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본관 양천 허씨
출생 1909년 11월 2일
전라남도 대정군 우면 상모리
(현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1]
사망 1976년 8월 20일 (향년 66세)
일본 오사카시
학력 광주고등보통학교 (명예졸업)
상훈 대통령표창 추서

1. 개요2. 생애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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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2019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2. 생애

1909년 11월 2일 전라남도 대정군 우면(현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에서 태어났다. 이후 광주군으로 이주하였다.

전라남도 광주고등보통학교 5학년에 재학 중이던 1928년 6월, 그해 4월 항일 격문을 인쇄·배포했다는 이유로 체포당한 같은 학교 학생 이경채의 퇴학에 항의하는 동맹휴학이 재학생 2~5학년들의 결집된 참여로 그해 10월까지 약 5개월 동안 이어졌는데, 허창두는 이때 주동자 격으로 동맹휴학에 참여하였다.

이들은 조선인 교사 채용, 조선 역사 교육, 조선어 시간 증설, 도서실에 조선 서적과 신문 비치 등을 요구하기도 했다. 당시 5개월 동안 학생들을 비롯해 나중에는 졸업생 및 학부모까지 합세해 투쟁을 전개했지만 일제 당국의 폭압으로 중단되면서 결국 광주고보 학생 15명이 실형을 언도받고, 39명이 주모자라는 이유로 퇴학 처분을 받았다.

이에 그 또한 동맹휴학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퇴학 처분을 받았으며, 그후 일본 오사카시로 이주하여 양복점을 경영하며 생계를 유지하던 중 8.15 광복을 맞았다.#

1975년 11월 22일, 한국에 유학보냈던 아들 허경조가 학원 침투 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고초를 겪게 되자 많은 정신적 충격을 받았으며, 변변찮은 벌이로 아들의 변호사 선임 비용 및 면회 비용을 대는 등 악전고투하다가 1976년 8월 20일 심장마비로 별세하였다.#

2014년 2월 12일 광주제일고등학교로부터 85년만에 명예졸업장을 수여받았다.#

2019년 12월 10일, 주오사카대한민국총영사관에서 그의 아들인 허경민씨에게 대통령표창을 전수하였다.#

3. 여담

  • 일본 오사카로 건너간 후 슬하에 3남 3녀를 두었으며, 평소 조국을 잊지 말라고 민족의식을 자녀들에게 많이 고취했다고 한다. 그래서 1970년 아들 허경조와 허경민을 대한민국으로 유학 보내기도 했는데, 허경조는 이후 1973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의학과(73학번)에 입학했고, 이어 다른 아들 허경민 또한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했다.
그런데 제4공화국 시절이던 1975년, 이들은 학원 침투 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남산 중앙정보부 조사실에서 갖은 고문과 취조를 당했으며, 허경민은 일주일 만에 석방되었으나 형 허경조의 경우 간첩 혐의로 기소되어 1심과 2심에서 징역 3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3년 후 대법원 파기환송으로 고등법원에서 무죄 선고를 받긴 했지만 1년 3개월여동안 옥살이를 했다.
형 허경조는 2010년이 되어서야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 의해 인권침해사건 피해자로 인정되었으며, 2015년 6월 국가 배상 판결을 진행해 결국 대법원서 최종 무죄 선고를 받고 국가로부터 배상금 1억원이 주어졌다.#

[1] 양천 허씨 집성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