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 한시량(韓時良), 한화농(韓花農) 한세량(韓世良), 한남농(韓南濃, 韓南農) |
자 / 호 | 주언(周言) / 세량(世良) |
본관 | 청주 한씨[1] |
출생 | 1867년 3월 26일[2] |
경기도 광주유수부 돌마면 당우리 (현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분당동) | |
사망 | 1935년 10월 4일 |
중화민국 베이징 | |
묘소 |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율동[3]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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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014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한영복은 1867년 3월 26일 경기도 광주유수부 돌마면 당우리(현 성남시 분당구 분당동)에서 아버지 한순용(韓舜鏞, 1848. 7. 29 ~ ?. 8. 3)과 어머니 연일 정씨(1845. 7. 18 ~ ?. 5. 19) 정선제(鄭善濟)의 딸 사이의 2남 4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구한말 강화군수 겸 공립강화보통학교 교장을 지냈다.#그는 1914년 11월 중국으로 망명하여 처음에는 인삼 장사를 했다.# 그 뒤 1921년 6월 중국 베이징에서 신채호, 이회영과 함께 잡지 <천고(天鼓)>를 창간했으며, 그해 8월 15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교부 베이징 주재 외교위원으로 임명되어 활동했다. 또한 그해 9월 25일 북경 거주 조선기독교청년회 소속 회원들과 박용만이 주도한 군사통일회(軍事統一會)와 보합단(普合團)에 독립운동자금 등을 후원할 것을 협의하였다.[4]
1921년 이광(李光)·조성환 등과 함께 교육회를 조직하고 <부득이(不得已)>란 신문을 발행하였으며, 1922년 국한문 신문 <독립공보>를 발행하였다. 1930년 대한대독립당주비회 기관지 <조선(朝鮮)의 혈(血)> 기자로 활동하였으며, 1931년에는 북경 조선유학생회 조직을 지도하였다. 그러나 1935년 10월 4일 베이징에서 병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4년 한영복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