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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학회

한글 학회에서 넘어옴
파일:조선어학회.jpg
1935년, 현충사에서 찍은 조선어학회 회원들. 앞줄 가운데에 있는 이윤재, 한징은 7년 후에 체포되어 옥사했다.
<colcolor=#fff><colbgcolor=#003764> 한글학회
韓㐎學會 | Korean Language Society
파일:한글학회 로고.jpg
설립일 1908년 8월 31일
연혁 국어연구학회 (1908~1911)
배달말글몯음 (1911~1913)
한글모 (1913~1921)
조선어 연구회 (1921~1931)
조선어 학회 (1931~1949)
한글학회 (1949~ )
학회장 김주원
주소
웹사이트

1. 개요2. 상세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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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MBC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중에서
1908년 8월 31일 설립된 한국어한글 연구하는 민간 학술 단체.

1908년 최초의 명칭은 "국어연구학회"였고 1911년 9월 3일, 총회에서 학회 이름을 "배달말글몯음(조선언문회)"로 바꾸었다. 1913년 3월 23일 임시총회에서 학회의 이름이 "한글모"로 바꾸었다.

그러나 일제의 감시로 학회 활동이 위축되었다가 1921년 12월 3일 총회를 열어 "조선어연구회"로 조직을 확대하며 되살아났다. 시간이 지나 조선어연구회의 외연이 커지고 사업이 확장되며 1931년 1월 10일 총회를 열어 "조선어학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많은 이들이 옥고를 치렀다.

1945년 광복 후 재건되었으며, 1949년 10월 2일에 "한글학회"로 이름을 바꾸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5호선 광화문역 근처에 있는 한글회관 5층에 사무실이 있다. 주소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새문안로3길 7.(홈페이지)

2. 상세

한글학회에서 펴낸 "한글학회 100년사"에 따르면 학회의 시작은 주시경 선생과 여러 사람이 모여 만든 "국어연구학회"를 그 시작으로 본다. 따라서 학회의 시작은 1908년 8월 31일로 보는 것이 마땅하다. 실제로 한글학회는 매해 8월 31일에 창립 기념 잔치를 열고 있다.

1921년 12월 3일에 <조선어연구회>로 재탄생했다. 장지영, 김윤경, 이윤재, 이극로, 최현배, 이병기, 안호상 등을 회원으로 하여 연구발표회와 강연회를 하고 한글의 우수성과 소중함을 홍보하는 한편, 1927년 2월부터 기관지 <한글>을 발간했다. 이 기관지는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이후 조선총독부에서 일본인 관변학자들을 모아 똑같은 이름의 '조선어 연구회'를 만들자, 1931년 명칭을 조선어학회로 바꾼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많은 사람들이 옥고를 치렀다. 이극로, 최현배, 이희승, 정태진, 정인승 등이 실형을 선고받았고, 이윤재와 한징은 옥사했다. 그 밖에 많은 사람들이 집행유예 혹은 기소유예로 풀려날 때까지 1~2년간 옥고를 치렀다.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 조선어학회의 주축을 이루었던 최현배, 이희승, 정태진, 정인승 등이 석방되면서 조선어학회는 조직을 재건하고, 일제의 탄압으로 중단되었던 '조선말 큰사전' 사업을 재개했다. 이는 유실된 줄 알았던 큰사전 원고가 광복 이후 서울역 창고에서 온전히 발견되어서 가능했다. 조선어학회 사건을 재판에 넘긴 일제 당국이 증거품으로 법원에 제출할 요량이었는데, 태평양 전쟁 막바지 난리통에 그냥 서울역 창고에 처박힌 채 잊혀졌던 것이다.

이후 1949년 한글날을 기해 이름을 '한글 학회'로 바꾸고, 현재까지 존속하고 있다. 아마도 1948년 고착화된 남북 분단이 계기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북한의 경우는 해외에서 북한으로 돌아온[1] 김두봉이 따로 한국어 및 한글 정비 사업을 주도하여 분단 이후 남과 북의 말이 표준어문화어로 달라지는 계기가 된다. 그러나 이 '문화어'라는 것도 대한민국의 표준어와 같이 1933년 맞춤법을 기반으로 만들어졌으며, 심지어 평양 방언이 아닌 '서울 방언'을 기반으로 규범화되었다. 두음법칙의 폐지와 띄어쓰기의 차이, 몇몇 단어들의 차이 등이 존재하나 기본적인 문법 자체는 표준어와 별 차이가 없다.

한글학회가 조선어학회가 같은 단체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지만, 한글학회는 옛 조선어학회가 광복 후 이름만 바뀐 것일 뿐 그 시절 그 단체의 명맥과 법인까지 그 자체로 온전히 유지해오고 있다.

해방 이후 1949년까지 장지연 선생이 간사장을 맡았으며, 1949년부터 한글학회로 이름을 바꾸며 외솔 최현배 선생이 이사장을 맡아 타계할 때까지 21년간 학회를 이끌었다. 외솔 선생 타계 이후 1971년부터 외솔 선생의 애제자인 허웅 서울대 교수가 2004년 타계할 때까지 이사장 및 회장을 역임했다.

조선말 큰사전은 1947년 10월 9일(한글날) 제1권이 간행되었고, 1957년 총 6권으로 완간되었는데 그 사이의 우여곡절도 많았다. 한글 학회는 록펠러 재단으로부터 지원을 받아 사전을 편찬하고 있었는데, 1953년 이승만 정권에 의해 한글 간소화 파동이 터지게 되었다. 이승만 정권은 표기 간소화에 반대하는 한글 학회를 압박하고자 록펠러 재단의 지원마저 막아 버린다. 이 소동은 1955년 간소화 훈령이 철회되며 겨우 마무리된다. # 조선말 큰사전은 현재도 '우리말 큰사전'이란 이름으로 배포되고 있다.

1988년 문교부에서 고시한 한글 맞춤법은 조선어학회의 한글맞춤법통일안을 토대로 일부 고쳐서 고시한 것이다.

3. 기타

영화 말모이조선어학회 사건을 모티브로 하여 만들어진 작품이며, 제작단계에서부터 한글학회의 도움을 받았다. 영화 끝 스탭롤에 보면 한글학회가 보관중인 자료의 실물 사진들이 등장한다.


[1] 정확히는 월북이 아니라 그냥 북한으로 귀국한 것이다. 조선어학회 사건 당시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했기 때문에 일제 당국에 체포당하지 않은 사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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