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본관 | 청주 한씨[2] |
출생 | 1900년 6월 18일 |
충청북도 영동군 군동면 주곡리 (現 충청북도 영동군 영동읍 주곡리 153번지) | |
사망 | 1959년 12월 19일 (향년 59세) |
충청북도 영동군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5묘역-105호 |
상훈 | 대통령표창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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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5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2. 생애
1900년 6월 18일 충청북도 영동군 군동면 주곡리(現 영동군 영동읍 주곡리 153번지)에서 아버지 한긍리(韓兢履, 1880. 2. 7 ~ 1954. 4. 24)와 어머니 밀양 박씨 박미성(朴未成, ? ~ 1942. 1. 29)[3] 사이의 4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1919년 전국적으로 3.1 운동이 일어나자, 장인덕(張寅得)·김태규(金泰奎)·정우문(鄭友文)·박성하(朴聖夏)·한의교(韓義敎)·정성백(鄭聖白) 등과 함께 영동면 장날인 4월 4일에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계획하고, 기미독립선언서를 인쇄하고 태극기를 제작하는 한편, 군중을 모집하는 데에 힘을 쏟았다.
거사 당일인 4월 4일 오후 2시, 일제의 삼엄한 경계망을 뚫고 영동면 장터에 2천여 명의 군중이 모이자, 이들을 이끌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시위를 전개했다. 이 때 일본 경찰 및 일본군 수비대는 군중을 향해 무자비하게 총격을 가했고, 현장에서 만세시위자 6명이 순국하고 10여 명이 중상을 입었다.
이후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고, 1919년 4월 29일 공주지방법원 대전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8개월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은거하다가 8.15 광복을 맞았다. 1959년 12월 19일 충청북도 영동군에서 별세했다.
1995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당초 영동군 영동읍 주곡리 새재마을에 안장되었다가 2016년 3월 19일 배우자 김해 김씨 김귀열(金貴烈, 1900. 9. 11 ~ 1953. 12. 19)[4]의 유해와 함께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5묘역에 이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