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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샤쿠니 18대 샤 Պապ | 파파스 | ||
제호 | 한국어 | 파파스 |
아르메니아어 | Պապ | |
라틴어 | Papas | |
존호 | 샤 | |
생몰 년도 | 미상 ~ 374년 또는 375년 | |
재위 기간 | 370년 ~ 374년 또는 37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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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르메니아 아르샤쿠니 왕조의 18대 샤.2. 생애
아르사케스 2세와 프란쳄 왕후의 아들이다. 367년 사산 왕조와의 오랜 전쟁에 지친 아버지가 사산 왕조 샤한샤 샤푸르 2세의 평화 협상 제의에 응하여 바삭 마미코니안 장군과 함께 티즈본으로 향했다가 도중에 체포되어 실명형에 처해졌다. 그 후 샤푸르 2세는 아르메니아의 주요 도시를 파괴하고 많은 주민을 페르시아로 압송했으며, 기독교를 버리고 조로아스터교로 개종하고 자신에게 협조한 메루즈한 아르츠쿠니와 바한 마미코니안을 아르메니아 총독으로 삼았다. 많은 교회가 파괴되고 조로아스터교 사원으로 대체되었고, 기독교 신자들은 모진 박해를 받았다.그는 어머니 프란쳄과 함께 아르토게르사 요새로 피신하여 그곳에서 사산 왕조군을 상대로 항전했다. 사산 왕조군은 요새를 포위하고 맹공을 퍼부었지만, 아르메니아인들이 결사적으로 항전하는 데다 지형이 매우 험준해 쉽사리 공략하지 못했다. 하지만 장기전으로 흘러가면서 식량이 궁핍해지자, 프란쳄은 아들에게 로마 제국에 가서 원군을 청하라고 지시했다. 파파스는 어머니의 뜻에 따라 포위망을 뚫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달려가서 발렌스 황제에게 원병을 보내달라고 청원했다. 그러나 발렌스 황제는 고트족과 전쟁을 벌이고 있던 터라서 구원병을 쉽사리 보내지 못했다. 그러던 369년 초, 아르토게르사 요새가 2년간의 항전 끝에 끝내 함락되었다. 프란쳄은 페르시아 궁전으로 끌려간 뒤 적군 장병들에게 윤간당한 후 피살되었다.
370년, 고트족과 평화 협약을 맺어 다른 곳으로 군대를 돌릴 수 있게 된 발렌스 황제는 휘하 장군인 아인타이우스를 아르메니아로 파견해 파파스를 아르메니아 국왕에 즉위하게 했다. 아인타이우스가 로마군을 이끌고 아르메니아 영내로 들어오자, 메루즈한 아르츠쿠니와 바한 마미코니안의 폭정으로 고통받던 아르메니아인들이 대거 봉기했다. 바한 마미코니안은 아들 삼벨 마미코니안에게 피살되었고, 메루즈한 아르츠쿠니는 페르시아로 피신했다. 파파스는 아르메니아인들의 환호를 받으며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샤푸르 2세가 재차 아르메니아를 침공하자, 그는 로마로 재차 망명했다.
이후 훨씬 더 많은 로마군의 호위를 받으며 아르메니아에 돌아온 그는 371년 봄 테렌티우스 장군이 지휘하는 로마군과 합세했다. 이후 로마-아르메니아 연합군은 사산 왕조와 반역자 메루즈한의 적군을 상대로 바가반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메르주한은 슴바트 바그라투니에게 살해되었다. 이후 샤푸르 2세가 페르시아 동쪽 국경 지대를 침략한 이민족들을 막으러 바쁜 덕분에 전쟁이 몇년간 중단되었다.
이리하여 아르메니아 왕위를 확고히 한 그는 국내 문제에 관심을 돌렸다. 당시 아르메니아의 많은 토지가 수도원에 넘어갔고, 많은 처녀가 결혼을 거부하고 수녀가 되어버리는 바람에 인구 증가율이 크게 줄어들었다. 그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교회에 부여된 거대한 토지를 몰수하여 군대에 분배하고 처녀들이 수녀가 되는 것에 제약을 두었다. 이에 총대주교 네르세스가 반발하자, 그는 네르세스를 죽이기로 작정했다. 372년, 그는 네르세스를 잔치에 초대해 융숭한 대접을 했다. 그러나 집에 돌아온 네르세스는 중독 증세를 보이다 결국 사망했다. 그 후 파파스는 수녀원을 폐쇄하고 그곳에 있던 수녀들을 강제 결혼시키고 수도자들을 군대에 복무시켰다. 또한 교회에 바치는 십일조를 몰수해서 국고에 충당했다.
한편, 네르세스의 뒤를 이어 총대주교가 된 샤하크는 파파스의 명령에 따라 카이사리야로 가서 서품을 받던 전례를 따르지 않고 아르메니아 주교들의 의해 서품받았다. 로마 측은 이에 대해 불쾌감을 표시했지만 파파스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티그라네스 2세의 영광을 재현하겠다는 야심을 품고, 9만에 달하는 장정을 징집하여 강도 높은 군사훈련을 수행케 한 뒤 자신에게 복종하지 않은 아르메니아 귀족들을 철저히 탄압하고 분열되었던 아르메니아 고원을 평정했다. 여기에 에데사를 포함한 로마인이 거주하는 여러 도시들에 대한 지배권을 요구하는 등 고압적인 행동을 보였다.
이러한 파파스의 행보에 불안감을 품은 발렌스는 아르메니아에 주둔 중인 로마 수비대 사령관 테렌티우스에게 파파스를 암살하라고 명령했다. 374년 테렌티우스가 사산 왕조에 대항하는 원정에 관해 논의할 게 있으니 타르수스로 와달라고 청하자, 그는 300명의 기병을 이끌고 그곳으로 향했다. 그러나 곧 음모를 눈치채고 도주하여 추격병을 뿌리치고 아르메니아에 복귀했다.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는 아르메니아 관료들은 왕의 귀환을 반갑게 맞이했고, 파파스는 이후에도 로마 제국과의 동맹을 이어갔다고 기술했다.
그러나 테렌티우스는 포기하지 않고 음모를 이어갔고, 결국 파파스는 374년 또는 375년에 테렌티우스가 주최한 연회에 참석했다가 피살되었다. 사후 파파스의 조카 바라다테스가 발렌스 황제의 지명으로 왕위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