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세인 이븐 무사 알 카짐 영묘
카자르 왕조기 타바스 성채
1. 개요
페르시아어: طبس영어: Tabas
이란 동부 남호라산 주의 도시. 비르잔드에서 서북쪽으로 170km, 페르두스에서 서남쪽으로 115km 떨어진 분지에 위치한다. 인구는 약 5만 5천명으로, 주내에서 두번째로 큰 도시이다. 북쪽의 카비르 사막과 남쪽의 루트 사막이라는 이란의 양대 사막 사이에 오아시스처럼 위치한 도시로, 과거부터 '호라산의 관문'으로 여겨지며 대상들이 거쳐가는 교통의 요지였다. 시내에는 옛 타바스 성채와 대사원, 저수조 등의 유적이 있다.
도시 서북쪽에는 호세인 빈 모사 알카젬 성지가 있는데, 매년 수만명의 쉬아 순례객들이 찾는다. 시가지 북쪽 외곽에는 아자드 이슬람 대학교 타바스 캠퍼스, 서쪽 외곽에는 파얌누르 대학교 타바스 캠퍼스가 있다. 전통적으로 농업이 활발하여 주변에는 대추야자와 오렌지 나무가 많다. 사막과 산지로 둘러싸인 오지에 있다보니 외부에서 신선한 물품을 공급받을 수 없어 대부분 자급자족에 의존하고, 건조 식품 정도만 외부에서 들여온다.
2. 역사
지진으로 파괴된 타바스 성채
사산 제국기부터 카나트 (관개 수로) 설치와 함께 도시가 형성되었다. 이슬람 정복기인 649년 이슬람 제국군이 당도하자 주민들은 평화 협상에 나서 매년 6만 디르함의 지즈야를 바치는 대가로 항복하였다. 쉬아 전승에 따르면 타바스의 주민들은 칼리파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의 치세에 이슬람으로 개종했다고 한다. 이어진 우마이야 왕조와 압바스 왕조 시기 타바스는 고립된 위치 덕에 자치를 유지하였다. 10세기의 지리가 나세르 호스로는 타바스가 샤리아를 잘 준수하고 치안이 안정된 도시라 묘사하였다. 그 무렵 타바스는 이스마일파 선교사들의 영향으로 이스마일리 쉬아가 주를 이루게 되었고, 이스마일파 세력은 인근 산지에 요새를 구축하였다. 13세기 몽골 제국군이 당도하자 주민들은 저항 대신 그들을 환영하여 파괴를 면하였다.
하지만 16세기 티무르 제국의 붕괴와 함께 유입된 우즈베크 유목민들이 수차례 습격하여 주민들을 살해하거나 트란스옥시아나로 납치해가는 비극을 겪었다. 1747년 나디르 샤의 사후 타바스와 툰 (페르두스) 일대에는 잔구이 아랍인들의 토후국이 세워지기도 하였다. 1750년 그들은 북호라산 카부샨의 쿠르드 인들과 함께 아프샤르 왕조의 샤로흐를 축출, 황자 나데르 미르자를 납치하고 마슈하드를 장악한 후 사파비 황가의 솔레이만 2세를 옹립하기도 하였다.[1] 1785년 숙부 나스롤라 미르자가 후계자 자리를 두고 벌인 내전에서 패배한 나데르 미르자는 타바스로 도주했다가, 2년 후 나스롤라가 사망한 후 마슈하드로 돌아갔다. 얼마 후에는 잔드 왕조의 로프트 알리 칸이 타바스를 방문하여 골샨 정원을 조성하였다.
카자르 왕조기에는 쉬바니 아랍 가문이 타바스를 다스렸고, 저소조와 하맘 (목욕탕) 및 모스크 등이 세워졌다. 이러한 자치 공국은 1920년대 팔라비 1세의 중앙 집권화로 혁파되었고, 이후 타바스는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1978년 9월, 타바스 동남쪽 90km 지점에서 규모 7.4의 대지진이 발생하여 무려 2만에 달하는 사망자가 나는 비극이 있었다. 당시 크게 파괴된 시가지는 현재의 질서정연한 모습으로 복구되었다. 이란 혁명과 함께 격화된 반미 감정 속에서 납치된 미국인 인질들을 구하기 위해 1980년 4월 미국은 독수리 발톱 작전에 나섰으나, 특수부대의 집결지인 타바스 인근 사막에서 헬기 사고로 인해 실패로 돌아갔다. 이로써 타바스는 이란 내에서
[1] 솔레이만 샤는 샤로흐를 실명시켰으나 사냥 나간 틈에 아프샤르 충성파들이 정변을 일으켜 솔레이만 역시 실명시키고 샤로흐를 복위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