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4 01:23:16

타마라 라자코비치

파일:BW72SovGymOly.jpg[1]
<colbgcolor=#131230> 이름 타마라 바실례브나 라자코비치
Tамара Васильевна Лазакович
Тамара Васілеўна Лазаковіч
Tamara Vasilyevna Lazakovich 
국적 파일:소련 국기.svg 소련(1954~1990)
파일:벨라루스 국기.svg 벨라루스(1991~1992)
출생 1954년 3월 11일
소련 러시아 SSR 칼리닌그라드
사망 1992년 11월 1일
벨라루스 비텝스크(향년 38세)
종목 기계체조
주종목 이단평행봉, 평균대
신체 162cm, 51kg[2]
은퇴 1973년
1. 개요2. 생애
2.1. 어려운 가정 환경과 체조 시작2.2. 국가대표팀 합류2.3. 1972 뮌헨 올림픽2.4. 미국 투어2.5. 알코올 문제
3. 은퇴 이후4. 사망5. 수상 기록6. 기타

[clearfix]

1. 개요

소련의 前 기계체조 선수이며, 소련이 붕괴한 이후에는 벨라루스 국적을 얻었다.

2. 생애

2.1. 어려운 가정 환경과 체조 시작

알코올 중독이며 무직자였던 아버지와 청소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6살 때 체조를 시작했다. 당시 12살이었던 라리사 페트리크[3]가 라자코비치가 체조하는 모습을 본 후 자신의 코치에게 데려가 엘리트 체조 교실로 옮겼다. 여기에서 나오는 장학금으로 7살부터 사실상 집안의 가장 노릇을 하게 되었다. 코치가 처음 봤던 당시 타마라는 남루한 옷을 입고 제대로 씻지도 못해, 한눈에 봐도 제대로 보살핌 받지 못하는 아이란 걸 알 수 있는 모습이었다. 코치는 후에 타마라의 아버지가 비텝스크 시내 한복판에서 돈을 구걸하고 있는 것을 봤는데, 이미 타마라는 가족에게 충분한 돈을 벌어주고 있던 때라 그 돈이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 걱정했다고 한다.

비텝스크 학교의 체조 연습은 매우 고되기 때문에 저녁에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에서 선수들은 골아떨어졌다. 선수의 가족들은 이들을 기다리다가 녹초가 된 선수들을 업고 돌아갔다. 타마라의 가족은 타마라를 돌보지 않았기 때문에 코치 중 한명이 업어서 집으로 들여보냈다. 잠시 타마라를 가르쳐 본 코치는 금방 이 아이가 천재라는 사실을 깨달았는데, 기술을 한번 보여주면 금방 따라하고, 하루만 연습하면 제법 잘했다. 곧 지역단위 경기 수준을 뛰어 넘어 벨라루스의 수도인 민스크의 대회에 참가하게 되었다. 이 경기에 벨라루스의 당서기가 참관을 하러 왔는데, 어린 타마라의 경기를 본 당서기는 깜짝 놀라 당장 비텝스크에 체조학교를 신축할 것을 명령했다.

2.2. 국가대표팀 합류

체조 대표팀에 대한 이야기인 "새 여자아이"라는 영화에 출연했다. 예쁘고 패션감각이 좋은 타마라는 사진작가들에게 인기가 높았고, 본인도 피사체가 되기를 즐겼다.

1968 멕시코시티 올림픽 대표 선발전에서 정식 멤버[4]로 합류할 성적을 내지만, '국가대표 선수들의 출신 지역을 균형 있게 배분해야 한다', '어린 선수를 올림픽에 보내주면 건방져진다'는 등의 이유로 대표팀에서 제외된다. 불과 몇 년 후면 나이를 속여 제한보다 어린 선수들을 국제 대회에 참가시키는게 흔한 일이 되었던 걸 생각하면 타마라는 최전성기에 국제대회에 참가하지 못한 것이다. 만약 정상적으로 대회에 참가했다면, 올가 코르부트나디아 코마네치가 각각 1972년과 1976년에 받았던 스포트라이트를 1968년에 받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국가대표 팀 감독인 라리사 라티니나는 고전적인 체조관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에게 체조란 아름다운 여성의 몸을 우아하게 연출하는 것이 아주 중요했는데, 14살 무렵의 라자코비치는 여성적이라기보다는 중성적인 소년에 가까운 외모였다.[5][6]

라티니나의 고전적 소련 대표팀과 체코슬로바키아의 베라 차슬라프스카가 논란이 있는 판정에 힘입어 올림픽에서는 카린 얀츠를 성공적으로 제압했다. 이 덕분에 라티니나 감독은 계속 자신이 바라는 고전적이고 우아한 대표팀 구성을 유지할 수 있었고, 타마라는 구시대적인 코치에 의해 그런 고전적인 스타일의 체조선수로 계속 키워졌다. 이후 1971년 유럽선수권에 출전하여 류드밀라 투리셰바와 함께 대회를 양분하며 감독과 코치의 기대에 부응했다.

2.3. 1972 뮌헨 올림픽

1972 뮌헨 올림픽은 이미 많은 것이 변해 있었다. 얀츠를 거부한 멕시코시티 올림픽과는 달리, 뮌헨 올림픽은 올가 코르부트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라자코비치도 훌륭한 경기를 선보였지만, 코르부트 같은 대중적 임팩트가 없었다. 개인종합에서는 동메달을 땄다.
이 대회 여자 개인종합은 올림픽 체조 역사상 역대급 편파판정으로 악명이 높다. 정상적이라면 라자코비치나 카린 얀츠 둘 중 한명이 금메달을 땄을 것이나, 엉뚱하게도 비정상적 고득점을 몰아 받은 투리셰바에게 돌아갔다. 당시 대표팀 팀원이었던 안토니나 코셀은 타마라 라자코비치가 진정한 개인종합 금메달이라고 주장한다. 투리셰바는 공산당 소속이라 항상 지원을 많이 받았다. 평균대에서는 1위를 기록했지만, 마지막에 9.9점을 기록한 코르부트에게 역전을 당하고 시상대에서 울음을 터트렸다.

라자코비치와 코르부트는 사이가 매우 좋았던 것으로 보여졌다. 키가 큰 라자코비치가[7]작은 코르부트(152cm)를 마치 인형처럼 껴안고 행복해 하는 표정을 짓는다던가, 둘이 단짝처럼 같이 있는 사진들이 제법 남아 있었다.

2.4. 미국 투어

올림픽에서 올가 코르부트가 보인 혁명적 연기, 밝은 미소, 실수한 직후 흘린 눈물은 미국인들이 소련에 대한 인식을 바꿀 만큼 충격이었다. 찔러도 피 한방울 안흘릴 것 같은 류드밀라 투리셰바를 전형적인 소련 사람이라고 생각하던 미국인들은 귀여운 올가 코르부트를 보고 소련에 대한 친근감을 느끼게 된다. 한창 데탕트를 진행중이던 소련 당국과 미국의 리처드 닉슨은 올가와 동료들을 미국에 보내 체조 투어를 시켰다.

당시 최고의 인기는 코르부트였지만 어디까지나 귀여운 어린 아이였고, 뮌헨 올림픽에서 가장 우아한 체조선수라는 평을 받던 라자코비치도 인기가 많았다. 미국의 갑부가 라자코비치에게 접근해 둘이 사귀면서 간곡히 미국에 남아달라는 부탁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있고, 미국에 코치로 남아 달라는 제의가 들어왔다고도 한다. 진실 여부가 어쨋든, 투어 도중 부상을 당하고 그 결과 재활을 시작했다. 라자코비치는 올림픽 우승 포상으로 시내 중심가에 방2개가 달린 아파트와 가즈 볼가 자동차를 선물받았다. 라자코비치는 부모에게서 떨어져 살게 된 것을 정말 좋아했다.

2.5. 알코올 문제

라자코비치가 언제부터 술을 마신 시기는 정확하지 않지만, 나이 차가 많이 나는 팀 선배였던 지나이다 보로니나와 함께 몰래 술 파티를 벌이곤 했고 다른 선수들도 이들로 부터 간혹 술을 얻어먹었다는 대표팀 안무가의 증언이 있었다. 보로니나는 술을 마시기 시작하면서 금방 노화가 찾아와 대표팀을 떠났지만, 라자코비치는 술을 먹어도 여전히 대표팀에서 최고의 3인방 중 하나였다. 빈 술병이 숙소에서 발견된다든가 하는 사건들이 있었지만, 제자가 대표팀에서 쫓겨날까 두려워한 라자코비치의 코치는 타마라의 거짓말에 동참해 라티니나 감독을 속였다.

일탈의 조짐을 보이는 라자코비치가 딴짓을 하지 못하게 하려고, 코치들은 유난히 타마라의 스케쥴을 쉴틈 없이 빡빡하게 만들었는데, 타마라는 심적으로 더 힘들어진다. 올림픽 이후 라자코비치는 부상이 반복되는 선수 생활에 진절머리를 내기 시작했다. 재활 기간 동안 운동을 쉬면서 올림픽 경험에 대해 강연했으나, 머지잖아 술에 취해 강연을 빼먹고 나가지 않는 일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 이후로는 완전히 은퇴했다.

3. 은퇴 이후

좋은 집안 출신의 잘생긴 레슬링 선수와 성급한 결혼을 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둘은 계속 싸웠고 남편은 폭력을 휘둘렀다.  라자코비치는 더욱 음주에 기댔다. 체육대학을 졸업한 후, 학교에서 정식 코치가 아닌 강사로 아이들에게 체조를 가르쳤는데, 본인이 천재였던 라자코비치는 자신이 가르치는 아이들이 왜 가르쳐 주는 걸 따라하지 못하고 자꾸 기구에서 떨어지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아이들에게 금방 짜증을 냈기에 좋은 강사가 되지 못했다. 뛰어난 학생과 함께 올림픽에 다시 가고 싶어했지만 그런 선수가 쉽게 나오지는 않았다. 설사 그런 선수가 나왔어도 다른 유명 코치에게 결국 뺏겼을 것이다.

라자코비치는 이후 시내의 아파트와 차를 팔고 교외로 집을 옮겼다. 이사를 간 교외의 집에는 가구도 제대로 없었고 그냥 산다는 소문도 있었다. 1987년, 체조 선수들의 일생에 대한 다큐멘터리 "무도회에 가실까요?"가 제작되었는데, 삶을 보여주는 다큐멘터리인 만큼 다른 선수들은 각자의 실내 장식이나 가족과 지내는 모습을 보여주고 인터뷰도 집안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라자코비치만 집 밖에서 인터뷰를 한 것을 보면 정말 소문처럼 빈집에서 살고 있었을 수도 있다.
체조는 제게서 건강을 뺏어갔어요. 사지가 멀쩡한데가 없이 아파요. 어릴 땐 다쳐도 금방 나았죠. 이제 30이 넘으니까 예전에 다친게 다시 다 아파요. 발목도 접질러졌었고, 인대도 다쳤었고, 척추 부상에 어깨도 부러졌었죠. 체조 선수는 다 이래요. 무릎 연골도 나갔었어요. 제가 머리가 자주 아프고 기억도 못해서 종이에 메모를 많이 해요. 뇌진탕이 7번 났었어요. 그 중 2번은 응급실에 갈 정도였어요. 저는 뭐.... 장애인이죠.
(부끄럽게 웃으며) 저는 무식해요. 제 학교 성적은 다 가짜에요. 학교에 갈 때에는 특별 수업을 들었는데, 그냥 아주 쉬운 질문에 답하면 그걸 시험 통과한걸로 쳤어요. 나중에 대학에 가보고 싶어져서 원서를 썼는데, 코치가 제가 대학가는걸 싫어해서 자기 마음데로 그걸 체육학교에 보냈어요.
언제부턴가 제게 체조는 그저 돈벌이 수단이 됐습니다. 제 가족은 항상 돈이 없었어요. 제가 일곱살 때 부터 가족을 부양했죠. 제가 국가대표팀이 되면서 부터는 우리 가족은 풍족하게 살았어요. 제가 잘만하면, 돈도 주고 필요한건 다 줬죠. 스포츠 경쟁은 그 자체로 전력을 다 해야 해요. 항상 훈련해야 하죠. 쉬는 날에도 어디 못가게 통제 받아요. 외국에 나간다고 해도 제가 보는 건 경기장과 호텔 뿐이에요. 가게에 갈때도 감시가 따라와요.
명예와 돈은 운동 선수 자기 자신에게 달렸어요. 대표팀에서 처음엔 40루블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60루블이 되고 80, 120, 160, 180, 250 그리고 소련 대표로 300루블까지 받게 됐죠. 개인종목에서 우승하면 500루블이 나와요. 단체전에서 우승하면 300루블, 은메달은 250루블, 동메달은 180루블이 나오죠.
큰 대회에서 이기고 돌아오면 높으신 분들이 다 역에 나와 있어요. 검은색 고급차들. 우주비행사들 돌아오는 것 처럼 높이 들어올려져서 퍼레이드가죠. 연단에 올라서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어요.  여기 저기 초청 받아서 다니게 되죠.
1973년에 미국에서 다쳤고 수술을 받았어요. 재활하면서 복귀하려고 했는데, 다시 복귀하고 싶은 마음이 안드는거에요. 이젠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비행기를 타고 집으로 와 버렸어요.

4. 사망

라자코비치는 눈에 보일 정도로 망가지기 시작했다. 방치되었던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그는 씻지도 않고, 늘어나고 쭈글쭈글한 낡은 옷을 입고 다녔다. 너무나 초라한 모습에 경찰이 경계할 정도였다. 마지막 몇년 간 형무소 생활을 했다는 루머도 있다.

1992년 11월 1일 비텝스크 기차역 뒤에서 신원 미상의 여성의 사체가 발견되었는데, 타마라 라자코비치였다.

5. 수상 기록

올림픽
금메달 1972 뮌헨 단체전
은메달 1972 뮌헨 평균대
동메달 1972 뮌헨 개인종합
동메달 1972 뮌헨 마루
세계선수권
금메달 1970 류블랴나 단체전
유럽선수권
금메달 1971 민스크 개인종합
금메달 1971 민스크 이단평행봉
금메달 1971 민스크 평균대
은메달 1971 민스크 도마
은메달 1971 민스크 마루

6. 기타

  • 벨라루스선수권 직후 지어진 학교에서는 지금도 교사 인솔하에 라자코비치의 무덤을 방문하여 그에 대해 배운다. 매년 연말 타마라 라자코비치를 기념하는 작은 규모의 국제 학생 체조 대회가 모교의 주최 하에 열리고 있다.

[1] 사진에서 가장 오른쪽의 인물이 라자코비치다.[2] 현역 시절[3] 1968 멕시코시티 올림픽 단체전 & 마루 금메달, 평균대 동메달리스트다.[4] 올림픽 참가 정식 멤버는 6명이고 여기에 1명의 비상시 대체 선수를 뽑아 팀과 동행한다.[5] 당시 체조계에서는 심상찮은 조짐이 벌어지고 있었다. 1969 유럽선수권에서 카린 얀츠(동독)의 경기가 각국의 체조 지도자들에게 충격을 안겼다. 기존의 고전적 우아한 동작이 아닌 가볍고 경쾌한 카린 얀츠를 본 여러 체조 관계자들은 이게 바로 체조의 미래라는 확신을 하게 된다. 이들은 카린 얀츠에 대항할 자국 버전의 카린 얀츠들을 육성하기 시작했다. 올가 코르부트가 대표적인 예시의 선수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새로운 유형의 선수들이 커가면서 체조계의 경향은 타마라와 같은 스타일의 체조 선수에게는 점점 불리해지게 되었다.[6] 안타깝게도 타마라의 코치는 이런 변화에 대한 안목이 없었으며, 어린 선수들은 본인이 시대 흐름까지 읽는 것이 불가능했다. 선수는 코치가 하자는데로 최선을 다할 뿐이다. 상황이 이렇기 때문에 코치가 유행의 변화에 맞게 선수를 훈련시켜 줘야하는게 필수적이였다. 타마라의 코치는 원래 시골에서 코치를 하며 이전에도 페트리크를 발굴해내긴 했지만, 대표 선수가 되면서 페트리크가 이적했기 때문에 국제대회 경기 경험은 없었다. 타마라는 이런 코치와 끝까지 함께했다.[7] 162cm 였는데, 단신들이 유리한 기계체조 선수 치고는 굉장히 큰 키이다, 당장 오늘날 남자 선수들도 160 초중반의 신장이 대부분이다, 더군다나 당시에는 평균 신장도 오늘날보다 작았을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