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10 01:25:38

클르츠 아르슬란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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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어, 아랍어 : قلج ارسلان
튀르키예어 : Kılıç Arslan

생몰 : 1079년 ~ 1107년 6월 3일
재위 : 1095년 ~ 1107년 6월 3일

1. 개요2. 생애
2.1. 대 십자군2.2. 전성기2.3. 모술 원정과 죽음
3. 매체에서4. 기타

1. 개요

룸 술탄국의 2대 술탄. 군중 십자군을 전멸시키고 니케아를 지켜내었으나 이로써 십자군을 과소평가하고 다니슈멘드 왕조와의 싸움에 치중하다 제1차 십자군에게 수도를 잃었다.[1] 콘야로 천도한 그는 절치부심하여 1101년 롬바르드 십자군을 메르지푼에서, 느베르-아키텐 십자군을 헤라클레아 전투에서 괴멸시켰다. 이러한 참사들로 인해 십자군의 진로는 육로 대신 점점 해로를 택하게 된다.

안정적으로 아나톨리아를 통치하던 클르츠 아르슬란은 1107년 모술 시민들의 초청으로 남하했다가 알레포-셀주크 연합군에 패한 후 도주하다 하부르 강에서 익사하였다. 이때 장남 멜리크샤가 포로가 되었다가 1110년에야 콘야로 돌아와 계승한다. 서양권에서 그는 십자군에 맞선 첫 무슬림 군주로 알려져 있다. 동로마와 십자군의 압력으로 무너질뻔 했던 룸 술탄국은 클르츠 아르슬란의 지도 하에 장기간 존속할 토대가 마련되었다.

2. 생애

클르츠 아르슬란은 칼의 사자라는 뜻이다.[2] 부친 쉴레이만샤 1세는 동로마 내전을 틈타 1077년 니케아를 점령했고, 1081년 알렉시오스 1세의 즉위를 도우며 그 일대의 지배권을 공인받아 술탄을 칭하였다. 클르츠 아르슬란은 두 시기의 사이인 1079년 니케아에서 태어났다. 같은 해 셀주크 술탄 말리크샤 1세의 동생 투투쉬는 시리아를 정복하였다. 쉴레이만샤 1세는 1083년 킬리키아를 병합하며 아나톨리아 서부와 남부를 평정하였고 시리아를 노렸다. 1085년, 알렉시오스 1세의 승인 하에 안티오크를 점령한 쉴레이만샤는 파죽지세로 알레포를 포위하곤 우카일 왕조의 아미르를 전사시켰으나 이듬해 투투쉬에 패해 전사하였다. 원정에 동행했던 7세의 클르츠 아르슬란은 포로가 되어 이란으로 압송되었다.

6년간 이스파한에 유폐되어 있던 그는 1092년 말리크샤 1세가 사망하고 도래한 혼란기에 간수들이 다투는 틈을 타서 탈출하여 아나톨리아로 돌아왔다. 클르츠 아르슬란은 오우즈 계열의 이바 부족을 이끌고 니케아로 돌아와 말리크샤가 임명한 총독 아미늘 가즈니를 축출하고 술탄에 올랐다. 동시에 다니슈멘드, 살투크 왕조, 아르투크 왕조, 아흘라트샤 등이 자립하며 완충 지대가 생기자 룸 셀주크는 비로소 셀주크 제국의 영향권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클르츠 아르슬란은 스미르나 (이즈미르)의 군웅 차카의 딸 아이셰 하툰과 결혼하여 첫 튀르크 해군을 지닌 그와 동맹하였다. 하지만 1094년 차카가 콘스탄티노폴리스 원정을 준비하자 그는 알렉시오스 1세와 몰래 결탁하고 스미르나로 향하여 장인을 연회에 초대한 후 독살하였다.

2.1.십자군

1096년 수도 니케아 앞에 은자 피에르가 이끄는 2-3만의 민중 십자군이 당도하자 클르츠 아르슬란은 기병대를 이끌고 나아가 이들을 격파하였고, 레이날드의 선발대가 점거한 제리고르돈 요새를 봉쇄하였다. 보급도 없이 갇혀버린 레이날드의 선발대는 이슬람으로 개종한 (레이날드 등의) 소수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포로가 되거나 학살되었다. 클르츠 아르슬란은 은자 피에르의 본대에 선발대가 성과를 얻었다는 소문을 퍼뜨렸고, 이에 본대 역시 제리고르돈으로 향하였다가 매복을 당하여 괴멸되었다. 은자 피에르를 포함한 소수만이 동로마 해군에 구출되어 도주하였다. 대승을 거둔 클르츠 아르슬란은 서방에 대한 걱정을 접어두고 동쪽의 다니슈멘드를 침공하여 말리크 가지 귀뮈쉬티긴과 싸웠다.

1097년 봄, 이번에는 1차 십자군이 당도하여 니케아를 포위하였다. 말라티아 공방전을 벌이던 클르츠 아르슬란은 말리크 가지와 휴전을 맺고 회군하여 구원에 나섰으나 격퇴되었고, 니케아 수비대는 한달여 항전 끝에 동로마 측에 항복하였다. 십자군의 기대와 달리 알렉시오스 1세는 옛 동맹인 클르츠 아르슬란의 처자식을 아무 조건 없이 석방해주었다. 한편 클르츠 아르슬란은 십자군의 위력을 통감하곤 귀뮈쉬티긴과 동맹을 맺었고, 룸-다니슈멘드 연합군은 그해 6월 도릴라이온 전투에서 흩어져 있던 십자군을 매복했으나 보에몽의 역습에 패퇴하였다. 연패를 겪은 클르츠 아르슬란은 더이상 십자군과의 정면 대결을 포기하고 경기병 위주의 게릴라와 치고 빠지기 및 청야 전술로 전환하였다.[3]

2.2. 전성기

1차 십자군의 풍랑과 십자군 국가들의 수립 후, 안티오크 공이 된 보에몽은 1100년 귀뮈쉬티긴에 의해 포로가 되었다. 그러자 1101년 롬바르드 십자군이 (동향 이탈리아 출신인) 그를 구하기 위해 네오카이사레아 (니크사르)로 향하였고, 클르츠 아르슬란은 알레포-다니슈멘드 연합군과 함께 메르지푼 전투에서 그들을 전멸시켰다. 같은해에는 콘야를 거쳐 남하하던 느베르 및 아키텐-바이에른 십자군을 헤라클레아 전투에서 격파하며 지하드 전사로서 명성을 높혔다. 승전 후 클르츠 아르슬란은 콘야를 새로운 수도로 삼았고, 십자군의 위협이 잠잠해진 후 1104년 귀뮈쉬티긴이 사망하자 보에몽 몸값의 절반을 요구하며 재차 다니슈멘드를 침공, 말라티아를 점령하였다. 이에 보에몽은 다니슈멘드와 동맹하였다.

2.3. 모술 원정과 죽음

1107년 셀주크 술탄 무함마드 타파르가 자왈리를 모술의 아타베그로 임명하자 주민들은 전임자의 양자이자 명망이 있던 이마드 앗 딘 장기를 추대하며 맞섰다. 후자의 요청을 받은 클르츠 아르슬란은 남하하여 모술에 입성했으나, 아르투크 왕조 및 알레포측 원군과 함께 돌아온 자왈리에게 하부르 전투에서 패배한 후 강에 빠져 익사하였다. 다만 말라티아에 남아있던 부인과 막내 토그릴이 패잔병을 수습하여 자왈리의 진군을 막았고, 콘야에서는 친척 하산이 섭정으로 추대되었다. 한편 부친과 함께 종군했다가 3대에 걸쳐 셀주크 제국의 포로가 된 장남 말리크샤는 1109년 무함마드 타파르에 의해 석방된 후 이듬해 콘야로 돌아와 하산을 제거하고 술탄에 올라 왕조를 이어가게 된다.

3. 매체에서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에서 젊은 튀르크인 군주로 묘사된다. 보에몽에게 원수를 갚겠다고 하는 부분에서 알렉시오스 1세와 오마주된다. 이후 보에몽 협상에서 알렉시오스와 함께 열렬히 참가한다. 그러나 최종 승자는 보에몽

4. 기타

2021년 1월, 디야르바크르 주의 실반 (마야파리킨)에서 디즐레 대학 소속 발굴팀이 클르츠 아르슬란과 그의 달 사이데 하툰의 무덤을 발견하였다고 발표하였다.

[1] 이후 1차 십자군은 예루살렘 왕국과 안티오키아 공국 등의 십자군 국가를 건설한다. 1차 십자군의 명장이자 안티오키아 대공이었던 보에몽 1세는 다니슈멘드 왕조에 포로로 사로잡히게 되는데 이때 다니슈멘드는 보에몽 1세를 경매품으로 내놓고 경매를 한다. 이때 입찰인에 알렉시오스 1세와 아르슬란도 참가한다.[2] 킬리지, 아슬란 문서 참고[3] 이로써 십자군은 보급난에 시달리며 더욱 악랄해졌고, 동로마의 해상 지원으로 연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