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5-16 16:51:52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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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공주, 키레나이카 여왕, 마우레타니아 왕비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2세 | Cleopatra Selene II
파일:클레오파트라 셀레네 2세.jpg
클레오파트라 셀레네(Κλεοπάτρα Σελήνη)
생몰년도 기원전 40년 ~ 기원전 5년

1. 개요2. 생애3. 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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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공주, 키레나이카의 여왕(기원전 34년~기원전 30년), 마우레타니아 국왕 유바 2세의 왕비(기원전 25년~기원전 5년). 어머니 클레오파트라 7세와 비슷한 지성을 갖췄고, 어머니보다 더한 절세미녀라는 찬사를 받았다. 마우레티니아 왕비가 된 뒤 남편과 함께 선정을 베풀어 마우레타니아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2. 생애

기원전 40년 여름 제2차 삼두정치의 일원이며 동부 지중해 일대의 최고 권력자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마지막 파라오로 유명한 클레오파트라 7세의 딸로 출생했다. 남자 형제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쌍둥이로서 같이 태어났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이전부터 클레오파트라와 깊은 관계였지만 정식 결혼한 건 아니었고, 기원전 40년 이집트를 떠나 이탈리아로 가서 라이벌인 옥타비아누스의 누이인 소 옥타비아와 결혼했다. 클레오파트라 셀레네는 쌍둥이 형제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 그리고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사생아인 카이사리온과 함께 알렉산드리아에서 어머니 클레오파트라에게 길려졌다.

기원전 37년, 클레오파트라는 안티오키아로 가서 안토니우스를 만났고, 그에게 자신이 낳은 쌍둥이 남매를 보여줬다. 두 아이가 아버지를 만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안토니우스는 이 자리에서 그들에게 각각 헬리오스와 셀레네라는 성을 주었다. 셀레네라는 이름은 지난날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공주로서 셀레우코스 왕조에 시집갔다가 나중에 여왕을 자처했던 클레오파트라 셀레네에서 본딴 것으로 보이며, 헬리오스는 태양의 신 헬리오스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그해 말에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7세의 셋째이자 막내인 프톨레마이오스 필라델포스가 태어났다.

기원전 34년 알렉산드리아에서 개선식을 거행하면서,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와 카이사리온, 그리고 자신의 세 자식에게 지중해 전역을 분배하겠다고 선포했다.(알렉산드리아 영토분할령)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는 아르메니아, 메디아, 파르티아를 분배받았으며, 클레오파트라 셀레네는 키레나이카와 리비아를 분배받고, 프톨레마이오스 필라델포스는 시리아와 킬리키아를 분배받았다. 그리고 클레오파트라와 카이사리온은 이집트의 공동 파라오이자 왕 중의 왕이라는 칭호를 받았으며, 카이사리온은 이와 별도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진정한 후계자로서 이탈리아와 지중해 서부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었다. 또한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와 이혼하고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해, 옥타비아누스와 맺었던 모든 관계를 단절했다. 로마 시민들은 이 소식을 듣고 심한 충격과 분노에 휩싸였고, 옥타비아누스는 그의 선언은 원천 무효라고 주장했다.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안토니우스의 유언장을 공개했는데, 거기엔 사후 로마가 아니라 이집트의 항구 도시 알렉산드리아에 묻어달라는 내용이 있었다. 원로원은 안토니우스를 국가의 적으로 선포했고,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클레오파트라 간의 전쟁이 벌어졌다.(안토니우스-옥타비아누스 내전)

기원전 31년 9월 2일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클레오파트라 연합군이 참패한 후, 전황은 옥타비아누스 쪽으로 급격히 기울었고, 결국 기원전 30년 옥타비아누스가 이집트로 입성했다. 안토니우스가 자결한 뒤, 클레오파트라는 자신과 자식들의 생명을 위해 옥타비아누스에게 협상을 제안했지만 거절당했다. 그가 자신을 로마에서 개최될 개선식에 내세울 계획이라는 게 분명해지자, 클레오파트라는 살아서 치욕을 받느니 죽기로 작정하고 자결했다. 이후 카이사리온은 옥타비아누스의 로마군에게 붙들려 처형되었고, 클레오파트라 셀레네와 두 형제 모두 체포되어 로마로 압송되었다. 개선식에 세워진 사람이 클레오파트라 셀레네와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 뿐이었고 프톨레마이오스 필라델포스는 일언반구도 없는 걸 볼 때, 그는 로마에 도착하기 전에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쌍둥이 남매는 개선식에 강제 참석해 어머니가 독사를 붙잡은 채 자살하는 모습이 새겨진 조각상 뒤로 끌려갔다. 에우세비우스에 따르면, 옥타비아누스, 즉 아우구스투스는 클레오파트라의 아이들을 자신의 병거보다 앞세워서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했다고 한다. 하지만 개선식이 끝난 뒤, 그는 아이들을 포로로 취급하지 않고 가족으로 대하기로 하고, 누나 소 옥타비아에게 두 아이를 기르게 했다. 일전에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에게 일방적으로 이혼당한 아픔이 있었지만, 무척 착한 심성의 소유자였던 그녀는 안토니우스의 아이들을 친모처럼 자상하게 길렀다. 다만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는 역사 기록에서 종적을 감춘 걸 볼 때, 로마에 온 지 몇 년 안 되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옥타비아는 자신에게 맡겨진 아이들이 최고 수준의 교육을 받고 예의범절을 익히도록 지도했고, 클레오파트라 셀레네는 그 덕분에 무탈하게 성장했다. 이윽고 성인이 될 무렵, 그녀는 세간으로부터 어머니와 비슷한 지성에 어머니를 능가하는 미모를 갖추었다는 찬사를 받았다. 이 당시, 옥타비아의 집에는 유바 2세도 함께 살았다. 그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대적했던 누미디아 왕이자 아버지 유바 1세가 패사한 뒤 인질로 끌려와서 카이사르의 가족에 의해 길려졌다. 그는 역사와 지리 분야에 깊은 관심을 품고 깊이 연구해, 기원전 20년대에 저명한 학자로 명성을 날렸다. 셀레네는 그런 그와 죽이 잘 맞았고, 두 사람의 관계는 점점 깊어졌다.

기원전 25년, 아우구스투스는 소 옥타비아로부터 셀레네와 유바의 결혼을 성사시켜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는 누나의 설득을 받아들여 두 사람을 결혼시켰고, 뒤이어 마우레타니아 왕국의 왕과 왕비로 선임했다. 당시 마우레타니아는 기원전 31년부터 두 왕 사이에서 격렬한 내전이 벌어져 혼란이 극에 달했는데, 마침 내전의 당사자들이 모두 죽어서 왕이 비어 있었다. 두 사람은 마우레타니아의 수도 이올에 도착한 뒤 황폐화된 도시를 재건하고 카이사레아로 개명했다. 로마의 문화를 본따서 체육관, 목욕탕, 극장 등 값비싼 공공 시설들이 건설되었고, 그리스-이집트 풍의 문화도 함께 들어왔다.또한 농업 진흥 정책을 실시했으며, 무역을 장려했다. 마우레타니아 주민들은 곧 농사에 익숙해졌고, 목재, 곡물, 티리안 보라색 염료 같은 고급 상품들을 수출하면서 막대한 돈을 벌어들었다. 이 시기 카이사레아 항구에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일컬어지는 알렉산드리아 등대를 모방한 등대가 건설되었다.

클레오파트라 셀레네는 자신을 프톨레마이오스 군주로 칭했다. 그녀의 모습을 담은 동전에는 "클레오파트라, 클레오파트라의 딸"이라는 문구가 새겨졌으며, 프톨레마이오스 왕가의 귀족과 통치자의 초상화가 마우레타니아 왕실의 미술품에 추가되었다. 이것은 클레오파트라 7세를 로마의 적으로 규정한 아우구스투스의 정책에 위배되는 것이었지만, 아우구스투스는 별다른 제지를 하지 않았다. 한편 마우레타니아 궁전에는 라틴어와 그리스어가 공용어로 사용되었다. 그녀는 클레오파트라 바실리사('클레오파트라 여왕' 이라는 뜻의 그리스어)로서 주화에 등장했다.

그녀는 기원전 10년경 프톨레마이오스라는 아들을 낳았고,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딸을 별도로 낳았다. 기원전 5년에 사망했으며, 오늘날 알제리 체르셸에 있는 마우레타니아 왕립 묘지에 묻혔다. 미틸렌의 크리네고라스는 그녀의 죽음을 기리는 장례 경구를 지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해질녘에 일어나서 밤으로 상복을 가릴 때에, 달빛이 스스로 어두워졌다.
그녀의 우아한 이름인 셀레네는 우울한 하데스에 숨쉬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녀 자신과 빛의 아름다움을 나누었고, 죽음과 함께 그녀의 어둠을 섞었다.

클레오파트라 셀레네의 아들 프톨레마이오스는 서기 20년 마우레타니아 왕위에 오른 뒤 최전성기를 구가하며 막강한 재력과 군사력을 길러냈지만, 티베리우스 생전부터 프린키파투스(원수정)과 원로원의 약한 연결고리를 약점삼아 로비를 펼치고 로마 내정에 개입해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원로원, 로마군부의 진노를 샀다. 그럼에도 그는 위험천만한 줄타기를 하면서, 로마를 자극한다. 그 결과, 로마 원로원은 당시 황제 칼리굴라가 게르마니아 원정과 갈리아 방문을 마치고 귀국하기 전인 서기 39년 말, 일찌감치 프톨레마이오스를 제거하기로 결심하고 칼리굴라는 위험인물인 그를 서기 40년 로마에 방문한 틈을 노려 암살한다. 이때 로마 원로원은 칼리굴라와 프라이토리아니가 클레오파트라 셀레네의 아들을 암살하기에 앞서 마우레타니아 강제 병합 법안을 통과시켰고, 황제에게서 그를 제거했다는 소식을 받자마자 이를 공표한다.

이후 로마는 마우레타니아를 강제 병합하는데, 칼리굴라는 왕국을 둘로 쪼개 속주화 작업을 지시한다. 이에 왕국 주민들은 반발하는데, 반란을 일으키지 않고 항의만 하다가 서기 41년 칼리굴라가 카시우스 카이레아 등에게 암살된 직후 혼란을 틈타 반란을 일으킨다. 이때 로마군은 황제 암살 정국 속에 갈팡질팡하면서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데, 칼리굴라의 뒤를 이은 클라우디우스 1세가 티베리우스-칼리굴라 시대때 야전사령관으로 명성이 자자한 가이우스 수에토니우스 파울리누스, 그나이우스 호시디우스 게타를 파견해 얼마 안 가 제압되고 2년 뒤 완전히 속주로 병합된다. 이때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칼리굴라 생전, 원로원과 황제의 결정으로 계획된 법안에 근거해, 왕국을 둘로 쪼개 마우레타니아 팅기타나와 마우레타니아 카이사리엔시스 속주로 관리한다.

3. 매체에서

3.1. 게임

3.1.1. 도미네이션즈

클레오파트라 세레네의 팔찌가 유물 중 하나로 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