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8-20 01:23:40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왕자, 메디아, 파르티아, 아르메니아의 왕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 | Ἀλέξανδρος Ἥλιος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 Ἀλέξανδρος Ἥλιος)
생몰년도 기원전 40년 ~ 미상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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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왕자. 마르쿠스 안토니우스클레오파트라 7세의 아들이다.

2. 생애

기원전 40년 여름 제2차 삼두정치의 일원이며 동부 지중해 일대의 최고 권력자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마지막 파라오로 유명한 클레오파트라 7세의 아들로 출생했다. 여자 형제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2세쌍둥이로서 같이 태어났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이전부터 클레오파트라와 깊은 관계였지만 정식 결혼한 건 아니었고, 기원전 40년 이집트를 떠나 이탈리아로 가서 라이벌인 옥타비아누스의 누이인 소 옥타비아와 결혼했다.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는 쌍둥이 누이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2세, 그리고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사생아인 카이사리온과 함께 알렉산드리아에서 어머니 클레오파트라에게 길려졌다.

기원전 37년, 클레오파트라는 안티오키아로 가서 안토니우스를 만났고, 그에게 자신이 낳은 쌍둥이 남매를 보여줬다. 두 아이가 아버지를 만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안토니우스는 이 자리에서 그들에게 각각 헬리오스와 셀레네라는 이름을 주었다. 셀레네라는 이름은 지난날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공주로서 셀레우코스 왕조에 시집갔다가 나중에 여왕을 자처했던 클레오파트라 셀레네에서 본뜬 것으로 보이며, 헬리오스는 태양의 신 헬리오스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그해 말에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7세의 셋째이자 막내인 프톨레마이오스 필라델포스가 태어났다.

기원전 34년 알렉산드리아에서 개선식을 거행하면서,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와 카이사리온, 그리고 자신의 세 자식에게 지중해 전역을 분배하겠다고 선포했다.(알렉산드리아 영토분할령)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는 아르메니아, 메디아, 파르티아를 분배받았으며, 클레오파트라 셀레네는 키레나이카와 리비아를 분배받고, 프톨레마이오스 필라델포스는 시리아와 킬리키아를 분배받았다. 그리고 클레오파트라와 카이사리온은 이집트의 공동 파라오이자 왕 중의 왕이라는 칭호를 받았으며, 카이사리온은 이와 별도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진정한 후계자로서 이탈리아와 지중해 서부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었다. 또한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와 이혼하고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해, 옥타비아누스와 맺었던 모든 관계를 단절했다.

로마 시민들은 이 소식을 듣고 심한 충격과 분노에 휩싸였고, 옥타비아누스는 그의 선언은 원천 무효라고 주장했다.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안토니우스의 유언장을 공개했는데, 거기엔 사후 로마가 아니라 이집트의 항구 도시 알렉산드리아에 묻어달라는 내용이 있었다. 원로원은 안토니우스를 국가의 적으로 선포했고,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클레오파트라 간의 전쟁이 벌어졌다.(안토니우스-옥타비아누스 내전)

안토니우스는 파르티아로부터 독립하여 자신에게 지지를 표명한 메디아아트로파테네 국왕 아르타바스데스 1세와의 동맹 관계를 굳건히 하기로 하고, 기원전 34년 아르타바스데스 1세의 9살된 딸 이오타파를 아들 헬리오스와 약혼시켰다. 그러나 기원전 31년 9월 2일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클레오파트라 연합군이 참패한 후, 전황은 옥타비아누스 쪽으로 급격히 기울었고, 결국 기원전 30년 옥타비아누스가 이집트로 입성했다. 안토니우스가 자결한 뒤, 클레오파트라는 자신과 자식들의 생명을 위해 옥타비아누스에게 협상을 제안했지만 거절당했다. 그가 자신을 로마에서 개최될 개선식에 내세울 계획이라는 게 분명해지자, 클레오파트라는 살아서 치욕을 받느니 죽기로 작정하고 자결했다.

이후 카이사리온은 옥타비아누스의 로마군에게 붙들려 처형되었고,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는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2세, 프톨레마이오스 필라델포스와 함께 체포되어 로마로 압송되었다. 개선식에 세워진 사람이 클레오파트라 셀레네와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 뿐이었고 프톨레마이오스 필라델포스는 일언반구도 없는 걸 볼 때, 그는 로마에 도착하기 전에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쌍둥이 남매는 개선식에 강제 참석해 어머니가 독사를 붙잡은 채 자살하는 모습이 새겨진 조각상 뒤로 끌려갔다. 에우세비우스에 따르면, 옥타비아누스, 즉 아우구스투스는 클레오파트라의 아이들을 자신의 병거보다 앞세워서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했다고 한다.

하지만 개선식이 끝난 뒤, 옥타비아누스는 아이들을 포로로 취급하지 않고 가족으로 대하기로 하고, 누나 소 옥타비아에게 두 아이를 기르게 했다. 일전에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에게 일방적으로 이혼당한 아픔이 있었지만, 무척 착한 심성의 소유자였던 그녀는 안토니우스의 아이들을 친모처럼 자상하게 길렀다. 다만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는 역사 기록에서 종적을 감춘 걸 볼 때, 로마에 온 지 몇 년 안 되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