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1-25 02:07:55

크리스티안 1세 폰 부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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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스카나 변경백 및 후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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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스카나 16대 후작
Christian I. von Buch | 크리스티안 1세 폰 부흐
성명 한국어 크리스티안 1세 폰 부흐
독일어 Christian I. von Buch
이탈리아어 Cristiano di Magonza(마인츠의 크리스티아노)
생몰 년도 1130년 ~ 1183년 8월 23일
재위 기간 1160년 ~ 1161년, 1165년 ~ 1183년(마인츠 대주교)
1173년 ~ 1183년(토스카나 대리 통치자)

1. 개요2.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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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인츠 대주교, 토스카나 후작령 대리 통치자.

2. 행적

부흐와 베르클링겐 백작 가문의 일원으로, 튀링겐의 영주 루트비히 2세에 의해 메르세부르크 주교와 마인츠의 마리아그레덴 주교의 주임으로 선임되었다. 1160년 마인츠 시민들이 과중한 세금을 부과한 아놀드 폰 셀렌호펜 대주교를 살해했다. 이후 일부 반군이 도시 성직자들에게 루돌프 폰 체링겐을 새로운 대주교로 선출하도록 강요하자, 일부 성직자와 평신도들은 프랑크푸르트로 망명한 뒤 1160년 10월 말에 크리스티안을 마인츠의 대주교로 선출해 대항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1세는 두 대주교를 인정하지 않았고, 1161년 6월 로디 공의회에서 두 대주교를 해임시킨 뒤 콘라트 1세 폰 비텔스바흐를 마인츠 대주교로 세웠다.

그 후 크리스티안은 1162년 마인츠 대성당의 관장이 되었고, 뒤이어 마스트리흐트의 성 세르바티우스 대성당의 관장이 되었다. 1163년 프리드리히 1세가 이탈리아 원정에 착수하여 밀라노를 파괴했을 때 동행했으며, 프리드리히 1세가 뷔르프부르크 의회를 소집한 뒤 대립 교황 파스칼 3세를 세웠을 때 주교단에 선임되었다. 1165년 콘라트 1세 폰 비텔스바흐가 파스칼을 교황으로 인정하지 않자, 프리드리히 1세는 콘라트를 해임하고 크리스티안을 마인츠 대주교로 세웠다.

1167년 프리드리히 1세와 파스칼 3세의 이탈리아 원정에 참여했다. 그는 황제와 파스칼을 반대하는 나르니 시를 탄압했으며, 1167년 5월 투스쿨룸 공방전에 참가해 1,3000명의 독일 분견대를 지휘했다. 5월 29일 투스쿨룸을 구원하기 위해 달려온 교황군을 상대로 몬테 포르치오 전투에서 맞붙어 제국군의 승리에 일조했다. 일설에 따르면, 그는 성직자가 검을 소지하여 적병을 살해할 수 없다는 규정을 우회하고자 철퇴를 사용했다고 한다. 이리하여 구원군을 격파하고 투스쿨룸을 공략한 뒤, 프리드리히 1세와 파스칼 3세는 로마에 입성했고 교황 알렉산데르 3세는 아니니로 피신했다. 그러나 군영에서 말라리아가 창궐하면서 2,000명의 병사들이 사망하자, 프리드리히 1세는 더는 견디지 못하고 철수했다. 이때 크리스티안은 이탈리아의 대법관으로 임명되었고, 이듬해 로마인들이 제국에 협력하여 자신들을 공격하는 것을 도운 알바노 시를 초토화하는 것을 방관했다.

이후 독일에 귀환한 그는 프리드리히 1세와 작센 공작 하인리히 사자공의 갈등을 중재했으며, 1168년 영국의 헨리 2세와 프랑스의 루이 7세의 갈등을 중재하기 위해 루앙으로 갓다. 1169년 6월 밤베르크에서 프리드리히 1세의 아들 하인리히 6세로마왕으로 옹립하는 대관식을 주관했으며, 1170년 신성 로마 제국의 대사로서 동로마 제국에 파견되어 동방 교회와 서방교회의 분열을 종식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1171년 프리드리히 1세에 의해 이탈리아에 파견된 그는 알렉산데르 3세를 따르는 도시들을 응징하라는 황제의 뜻에 따라 스폴레토와 아시시 등지를 제압하고 1173년 5월 안코나를 공격했다. 당시 안코나는 신성 로마 제국의 지배를 대놓고 거부하고 동로마 제국의 황제 마누일 1세에게 충성을 맹세했기 때문에, 프리드리히 1세로서는 반드시 제압해야 했다.

크리스티안은 안코나의 해상 라이벌인 베네치아 공화국과 손잡고 베네치아 함대의 지원에 힘입어 안코나 시를 6개월간 포위 공격했다. 그러나 안코나 시민들은 압도적인 수와 우수한 공성 무기로 밀어붙이는 제국군에 격렬하게 항전했다. 그러던 어느날 밤, 안코나 시민들이 어둠을 틈타 성밖으로 빠져나와 적의 공성무기에 수지와 송진이 든 통 여러 개를 던졌다. 이제 불만 붙이면 공성무기를 모조리 태워버릴 수 있었지만, 섣불리 불을 붙였다가 자기도 불길에 휘말릴 것을 걱정해서 아무도 선뜻 나서지 않았다. 이때 안코나 출신의 과부 스타미라(Stamira)가 뛰쳐나와 도끼로 통을 부수고 불을 질렀다. 그러자 불길이 순식간에 주변을 휩쓸면서 공성 무기들을 모조리 불태웠고, 스타미라 역시 불길에 휘말려 사망했다. 제국군은 수비대의 이같은 항전으로 인해 좀처럼 안코나를 공략하지 못하다가 10월 중순 베르티노로의 백작부인 알드루다 프란지페네(Aldruda Frangipane)와 구엘프 지도자 굴리에모 마르케셀리(Guglielmo Marcheselli)의 구원군이 당도하자 철수했다.

한편 1173년 명목상 토스카나 후작을 맡고 있던 벨프 6세가 사임했다. 프리드리히 1세는 토스카나를 제국령으로 삼고 크리스티안을 대리 통치자로 지명했다. 1174년 3월 토스카나로 돌아온 크리스티안은 테르니를 약탈했고 1174년 여름까지 토스카나에 머물렀다. 이후 마인츠에 잠시 돌아갔다가 프리드리히 1세가 이탈리아로 재차 원정을 떠났을 때 합세했다. 그는 로마냐로 이동하여 토스카나 귀족 귀도 게라가 통치하던 도시인 파엔차를 볼로냐를 겨냥한 군사 작전의 중추로 삼았다. 그러나 그의 공세는 몇몇 소규모 전투에서 승리한 것을 제외하면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175년 7월 파비아에서 프리드리히 1세를 섬기던 그는 시칠리아 왕국을 공격하라는 황제의 지시에 따라 아드리아해 연안을 따라 남하하여 1176년 3월 10월 또는 16일 첼레서 인근의 카르솔리에서 안드리아 백작 루지에로와 레체 백작 탕크레디가 지휘하는 노르만군과 맞붙어 승리했다. 이후 6개월간 주변 지역을 약탈하던 그는 1176년 5월 29일 레나노 전투에서 롬바르디아 연맹에게 참패한 프리드리히 1세로부터 소환령을 받고 돌아가면서, 9월 21일에 페르모를 점령하고 철저히 약탈했다.

이후 프리드리히 1세와 교황 알렉산데르 3세의 협상을 중재하여 프리드리히 1세가 알렉산데르 3세를 교황으로 인정하기로 한 합의가 성립되게 한 그는 1178년 3월 12일 알렉산데르 3세를 로마로 호위한 뒤 대립 교황 칼리스투스 3세가 머물고 있는 비테르보를 포위해 굴복시켰다. 1179년 3월 제3차 라테란 공의회에 참석해 파스칼 3세가 결정한 모든 정책을 무효로 확정짓는 데 기여했다. 이후 몬페라도의 콘라도가 비테르보로 쳐들어오자, 그는 즉시 요격에 나섰으나 그해 9월 카메리노에서 참패해 생포된 후 생 플라비아노 성, 로카 베네레 성, 아쿠아펜덴테 성에서 15개월 동안 갇혀 지내야 했다. 동로마 제국 역사가 니키타스 호니아티스에 따르면, 콘라도는 황제 마누일 1세에게 재정 지원을 받는 대가로 크리스티안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보내려 했지만 마누일 1세가 고심 끝에 거부하면서 무산되었다고 한다.

1181년 석방된 크리스티안은 비테르보에서 로마인들에게 축출된 교황 루치오 3세를 접견했으며, 1183년 루치오 3세가 투스쿨룸에서 로마인들에게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군대를 이끌고 가서 그들을 물리치고 교황을 로마로 복귀시키려 했다. 그러나 도중에 중병에 걸린 그는 그해 8월 25일 투스쿨룸에서 사망했다. 사후 콘라트 1세 폰 비텔스바흐가 마인츠의 대주교로 복위했고, 토스카나 후작 직위는 수년간 비어 있다가 1195년 프리드리히 1세의 아들 필리프에게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