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1-20 22:43:16

친지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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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국방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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秦基伟(진기위)
1914년 11월 16일 ~ 1997년 2월 2일

1. 개요2. 생애3. 가족

1. 개요

중화인민공화국의 전 군인.

후베이성 황안현(현재의 후베이성 황강시 홍안현) 출신이다. 중국공산당 11~13기 중앙위원, 12기 중앙정치국 후보위원, 13기 중앙정치국 위원, 중앙군사위 위원을 역임하였다. 1955년 중장 진급, 1988년 상장 진급.

2. 생애

1914년 11월 16일 중화민국 호북성 강한도(江漢道) 황안현(黃安縣) 칠리평(七里坪) 진라장(秦羅莊)[1]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진라장은 마을 사람들 전체가 같은 진씨(秦氏) 성을 쓰는 집성촌이었다. 각 세대가 나씨(羅氏) 성을 가진 지주들의 논밭을 소작하던 가난한 산촌이었기에 '진라장(秦羅莊)'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전한다. 1937년 10월부터 1938년 1월까지는 중국공농홍군 제28군 신병영의 초병처(招兵處)가 이 마을에 설치되기도 했다.

한편, 친지웨이는 8살에 아버지를, 10살에 형을 차례로 여읜 뒤 홀로 쓸쓸하게 선조들이 남긴 허름한 초가집에서 살면서 야채를 파먹고 땔감을 베어 내다 파는가 하면, 때로는 소를 치고 날품팔이를 하는 등 근근이 벌어 먹고 살았다. 그 뒤 아동단(兒童團)과 소년선봉대에 가입했고, 1927년에는 의용대에 가입했다. 그리고 그해 11월 고향인 황안현과 마성현(麻城縣)에서 발발한 황마봉기(黃麻蜂起)에 참여하고 1929년 8월 정식으로 중국공농홍군에 입대했다.

1931년 11월, 홍사방면군 본부 권총대대 2중대장으로 부임하여 후난(豫皖) 안수(安苏)구의 역대 반토벌 작전에 참가했다. 황안 전투에서 성동산 진지가 함락되자 그는 부대의 호위 서(部)를 이끌고 곧장 화선으로 달려가 지휘부대를 이끌고 진지를 탈환했다. 1935년 대장정에 참가하여 홍4방면군보충사단장을 거쳐 방면군본부 4국장으로 서로군 작전에 참가하였다. 1937년 1월, 소수의 작전 부대를 이끌고 서로군 총후근부를 엄호하다가 마자군 기병대에 의해 분할되어 간쑤 린쩌(肃临泽)에 포위되었다. 부대를 이끌고 악전고투하며 며칠 동안 겹겹이 포위망을 뚫었다. 서로군 패배 후 구사일생으로 연안으로 돌아왔다. 중일전쟁이 터지자 팔로군에 가담하였고. 1940년 6월 벌어진 백단대전에 129사단 11여단 부여단장으로 참전했다. 1941년에는 타이항군구 제1군 분구 사령원 겸 타이항일지위원회 서기를 맡았다.

제 2차 국공내전에는 타이항군구 사령관이었고 야전군으로 공산당군이 개편되자 제2야전군 15군 사령관이 되었다. 한국전쟁에서는 중국인민지원군 15군을 이끌고 저격능선 전투[2]에 참가하였다.

천안문 항쟁 당시 국방부장으로, 당시 중앙군사위 의장이었던 덩샤오핑의 진압명령이 내려오자 본인의 권한으로 유혈사태를 막아보려고 "국내 사건에 대한 군투입은 총리 자오쯔양의 재가를 받아야 한다"는 핑계로 여러 번 시간을 지연시켰다. 하지만 덩샤오핑이 이런 꼼수에 격노하자 결국 군투입을 허가했다. 이 때문에 덩샤오핑의 눈밖에 났다고 한다.[3] 이후 1993년 3월 제8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부주석으로 선출되었다가, 1997년 2월 2일 83세의 나이로 베이징 에서 병으로 사망했다.

3. 가족

장남 친웨이장은 인민해방군 동부전구 부사령관 겸 육군사령관 중장을 지냈다. 차남 친티엔은 무경 중장까지 진급했다.


[1]중화인민공화국 후베이성 황강시 홍안현(紅安縣) 치리핑진(七里坪鎭) 친뤄좡(秦羅莊).[2] 중국 측 명칭 상감령 전투[3] 원래 정년에 안걸렸으면 10년할 수도 있었지만, 당시에도 이미 고령(75세) 이었기 때문에 정년에 걸려서 더이상 맡기는 무리였다, 후임 츠하오톈 상장(1929년생)은 10년을 꽉 채웠는데, 이것은 연임(1998년) 당시 정년 (70세) 에 안걸렸기 때문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