九七式中戦車 "チハ"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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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치하 전차는 1937년, 중일전쟁 당시 실전을 치렀으며, 이후 2차 대전이 발발하고 유럽 전선 및 북아프리카 전역을 제외한 일본 제국이 참전한 전선에서 끊임없이 등장하였다.마지막으로 전쟁에 동원된 것은 6.25 전쟁으로, 이후에는 예비 장비 및 치장 물자로 운용되었다가 퇴역하였다.
2. 대전기
2.1. 중일전쟁
중일전쟁 당시 뤄양 시로 진격 중인 일본 제국 육군 산하 기계화부대 소속 치하 개량형[1] |
특히 치하는 대전차화기가 부족한 국민당군을 상대로 큰 효과를 보았는데, 이 때문에 고관통 전차포의 개발성을 느끼지 못한 일본군은 이를 1942년경까지 계속 사용하게 되어, 후일 일어난 할힌골 전투와, 태평양 전쟁 시기 M3 스튜어트와의 전차전에서 큰 피해를 입게 된 원인이 되었다.
물론 중화민국 국민정부 측에서도 빅커스 Mk. E와 T-26RT 같은 명품 고성능 전차들을 투입하여 어느 정도의 대등함을 보였지만 1942년 이후, 새롭게 무장을 교체한 치하 개량형의 등장으로 중국 각지에 있던 치하들도 개량화를 진행하였으며, 이 치하 개량형들은 중화민국 국민정부 소속의 기갑차량들에게 큰 출혈을 강요하였다.
2.1.1. 대륙타통작전
대륙타통작전 당시의 일본 제국 육군 산하 제3전차사단 소속 치하 개량형 |
2.2. 소련-일본 국경분쟁
2.2.1. 할힌골 전투
할힌골 전투 당시의 일본 제국 육군 소속 치로와 치하 |
2.3. 제2차 세계 대전
2.3.1. 태평양 전쟁
미군 제716전차대대 소속 M4A2 셔먼과 일본 제국 육군 소속 제7전차연대 소속 치하 개량형 "1502번차" 간의 전투를 묘사한 일러스트[2] |
우선적으로 그나마 M3 리는 전면에서 47mm 포로 격파가 가능하였지만, M4A2 셔먼은 초근접이 아닌 이상 정면에서 날아오는 포탄을 모조리 도탄내며 포 구경이 거의 2배 차이나는 75mm 포로 치하들을 때려잡고 다니게 되며 치하의 좋은 시절은 끝나게 된다.
게다가 보병들에게도 본격적으로 M1 바주카 대전차로켓이 지급되면서 고전을 면치 못하게 되었고, 일부 차량들은 정글 속에 가까이 숨어있다가 지근거리 기습으로 셔먼을 격파했었지만, 그 직후에는 역습을 받아서 괴멸당하는 일이 잦았다.
2.3.1.1. 남방작전
남방작전 당시 루손 섬에 진입 중인 일본 제국 육군 소속 치하 |
추가로, 이 시기 노획한 M3 스튜어트와의 전훈을 바탕으로 기병전차와 보병전차 교리가 구식화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 일본군 측에서는 1식 기동 47mm 속사포로 무장을 교체한 치하 개량형을 개발하게 되었다.
2.3.1.1.1. 코레히도르 전투
코레히도르 전투 당시 미군의 요새를 침공 중인 일본 제국 육군 산하 제7전차연대 소속 치하 개량형 |
이에 미군은 사태가 심각하다고 판단하여 M3 리 전차를 실전 투입하게 되었다.
2.3.1.2. 과달카날 전역
과달카날 전역 당시 솔로몬 섬 마타니카우 강 하구에서 격파된 일본 제국 육군 산하 제1전차독립중대 소속 치하[3] |
2.3.1.3. 임팔 전투
임팔 전투 당시 유기된 일본 제국 육군 산하 제14전차연대 소속 치하 개량형 |
2.3.1.4. 필리핀 탈환전
루손 섬 전투 중 격파당한 일본 제국 해군 육전대 소속 치하 개량형 |
2.3.1.5. 사이판 전투
사이판 전투 당시의 미 해병대 제2기갑사단 노획 일본 제국 육군 제26전차연대 소속 치하 개량형[4] |
2.3.1.6. 이오지마 전투
이오지마 전투 직후 제382고지의 일본 제국 육군 산하 제26전차연대 소속 치하 개량형[5] |
지휘관이었던 쿠리바야시 타다미치 중장의 "옥쇄는 금지한다. 그리고 어차피 우리는 이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 그러니 미군이 본토로 가지 못하게 최대한 발을 묶어라!"라는 명령으로 일본군은 독기가 바짝 올라서 최대한 미군에게 큰 피해를 주기 위해 제382고지에 전차호를 마구잡이로 파고, 여기에 치하들과 곡사포를 위치시켜 미군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
그러나 결국 전량이 격파당하며 제382고지는 함락당하고, 이오지마 전투는 미군의 승리로 끝을 냈다.
미군의 승리로 이오지마에서의 격전은 끝이 났지만, 이오지마의 일본군은 어차피 이길 수 없다라고 단념한 상태였으며, 그나마 미군이 본토에 상륙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목표였으므로 일본군의 계획은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오지마에서의 전훈과, 이후 이어질 본토 상륙의 피해를 계산한 미군은 리틀 보이와 팻 맨을 일본 본토에 투하하여 전쟁을 끝내게 되었다.
2.3.2. 소련-일본 전쟁
2.3.2.1. 만주 전략 공세 작전
만주 전략 공세 작전 당시의 소련 극동군 노획 일본 제국 육군 소속 치하 지휘차형 |
도합 총 389량의 치하가 만주 작전 당시 소련군에 노획되었으며 노획된 차량 중 대다수가 중국 공산당에 지원되었다.
2.3.2.2. 슘슈 섬 전투
슘슈 섬 전투 당시의 일본 제국 육군 산하 제11전차연대 소속 치하 개량형 |
양측의 엄청난 희생 끝에, 슘슈 섬은 결국 소련이 점령하게 되었으며, 현재까지도 당시 격파된 치하들의 잔해를 이곳에서 볼 수 있다.
전투가 끝난 후, 소련 측에서는 몇몇 치하를 노획하여 복원 작업을 거친 뒤, 냉전 초기 극동군에 편제하여 사용했다가 현재는 의장용으로 운용하거나 혹은 러시아 각지의 박물관들에 전시하고 있다.
3. 냉전
3.1. 국공내전
중일전쟁 직후 다수의 치하 및 치하 개량형이 중국 내륙에 유기되어 이를 노획한 중화민국 국민정부와 중국공농홍군 소속으로 사용되었으며, 특히 공농홍군 소속의 치하들이 국공내전 시기 대활약하였다.3.1.1. 요심 전역
요심 전역 직후 심양 시에 진입하는 중국공농홍군 소속 치하 개량형 |
3.1.2. 진저우 공방전
진저우 공방전 당시의 중국공농홍군 소속 치하 개량형 |
이때, 조종수 둥라이푸, 포수 리췬, 무전수 우파이롱으로 구성된 전차병들은 102호차를 타고 참전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에 지휘관은 허락하였으나, 일주일 내에 정비를 완벽하게 끝내야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그리고 마침내 일주일 뒤 수리에 성공하는데, 이는 조종수였던 둥라이푸 덕분이었다.
그는 일본강재주식회사에서 노동자로 일했던 경력이 있어, 평소 일본인 기술자들에게 많은 것을 배웠고, 그 덕에 기차가 탱크를 운반하는 도중 수리를 지속하여, 마침내 창무에 이르기 전에 102호차를 움직이게 했다.
창무에서 하차한 전차연대는 다시 100km를 전진해 진저우 공방전에 참전했다.
진저우 공방전이 시작되고, 102호차가 포함된 전차연대 소속의 탱크 4대가 마름모꼴로 진을 치고 돌격하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치하 한대가 앞서있었고, 94식 경장갑차 2대가 양 옆에 자리를 잡고 있었으며, "102호차"는 지휘관이 갑자기 고장이 날 것을 우려하여 진의 맨 뒤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공산군의 예상과 달리 진저우역은 이미 성채화가 완료되어 있는 상태였으며, 국민당군에 의하여 벽이 쌓여져 있는 상태였다.
선두의 치하는 벽을 파괴하려다 오히려 포격에 맞아 파괴되어 버리고, 결국 "102호차"가 선두에 서게 된다. 결국 성벽이 파괴되고 전차들은 진입하게 되었다.
이 때, 102호차는 평소와 다르게 아무런 고장 없이 94식 경장갑차 한대와 함께 협공으로 진저우역과 구시가지를 모두 점령하는데에 성공했다.
이후 진저우 구시가지를 점령하며, 전차연대가 탱크 3대를 증파하면서 "102호차"는 지휘 전차가 됐다.
그러나 국민당군의 기습으로 102호차가 속해있던 전차 소대는 큰 타격을 입었는데, 이 중 전차 한대가 탄약 유폭으로 폭발하여 두 대가 잔해에 끼어 움직일 수 없게 되었고, 102호차도 이 충격으로 도랑에 추락하는 바람에 차체 하부가 장애물에 걸려, 움직일 수 없는 절체절명의 상황에 빠지게 되었다.
아군 전차는 도움을 줄 수 없는 상황이고, 옆에 있던 보병들은 기관총에 당해 사상자가 속출하는 이 때, 조종수 동라이푸는 전차 밖으로 나와서, 전차 하부로 기어들어가서 장애물을 제거한 후, 다시 한번 탈출을 시도했다.
그 순간, 노력에 응하기라도 하듯, 102호차는 갑자기 도랑에서 솟구쳐 올라서는 국민당군을 밀어버리고 적진 한가운데로 진입하는데에 성공했다.
102호차는 수많은 총탄과 몇 발의 포탄을 맞았으며, 이 때문에 장갑이 갈라지고, 엔진의 냉각핀이[6] 파손되었으며, 연료탱크에 구멍이 생겼지만, 이러한 상황에서 102호차는 이 모든 공격을 버텨내면서 진격했다.
102호차는 진저우의 구시가지를 열심히 돌아다니면서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침착하게 사격하여 수많은 기관총 진지를 부수고, 최종적으로 국민당군의 사령관까지 처치하는데 성공하며 잔존 국민당군이 백기를 들게 만들었다.
이 때 공산군은 엄청난 활약을 보여준 "영감 전차" 102호차에 "공신호"라는 이름을 붙였으며, 이후 중국에서 개량된 치하들에게도 이 명칭을 붙여주게 되었다.
3.1.3. 화이하이 전역
화이하이 전역 직후 중국공농홍군이 노획한 국민혁명군 소속 치하 개량형 |
3.2. 도호쟁의
도호쟁의 당시의 진압 중인 일본 경찰 소속 치하 갱정전차 |
3.3. 6.25 전쟁
6.25 전쟁 당시 격파된 국적 불명의 치하 개량형[7] |
먼저 위 사진의 출처는 중국의 인터넷 신문에 게재된 칼럼(#)에서 해당 서적을 인용한 것인데, 칼럼은 취재를 통해 객관적인 사실을 보도하는 기사와는 달리 기고자 개인의 주장을 전달하는 데 목적이 있고, 종종 사실과는 거리가 먼 내용이 사실인 양 전파되기도 한다.[8] 그리고 이 칼럼에서 게재한 사진이 정말로 이 서적에서 발췌한 것인지, 이 서적에 정말로 이러한 내용이 적혀 있는지는 확인된 바 없다. 학술문헌에서 재인용이 권장되지 않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또한 해당 서적에 정말로 그러한 내용과 사진이 있다 할지라도, 해당 사진이 정말로 한국전쟁 도중 찍힌 사진인지, 그리고 해당 사진의 치하가 국군이 운용하던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푸총비 개인의 주장에 불과하고, 교차검증을 할 수 있는 다른 출처가 없기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2차대전 종전 후 한반도에 남아 있던 치하는 모두 미군정의 관리감독하에 스크랩 처분되었다는 사실과 충돌한다.
다만 이와 별개로, 중공군의 치하 개량형인 "공신호"의 경우, 중공군 1차 공세 시기 부족한 T-34-85 대신 투입되었다가 다시 본국으로 송환된 것이 확인되었다.
3.3.1. 중공군 1차 공세
중공군 1차 공세 당시의 중국 인민지원군 육군 소속 "공신호" 경전차 |
[1] 1944년 대륙타통작전의 일부인 평한작전 중에 촬영된 사진이다.[2] 오스프리 Duel 43권 M4 Sherman vs Type 97 Chi-Ha THE PACIFIC 1945에 나온 일러스트로 1945년 1월에 벌어진 루손 섬 산 마누엘 전투를 묘사하였다.[3] 1942년 10월 24일 촬영된 사진이다.[4] 1944년 6월 16일에 촬영된 사진으로, 1944년 6월 15일 사이판 전투 시작 당일 미 해병대에게 노획되었다.[5] 전투 후 미군이 촬영한 사진이다. 후술하겠지만 이 고지전에서 미군도 엄청난 피해를 감수해가나면서 제26전차연대와 맞서 싸웠다.[6] 치하는 공랭식 엔진이라 라디에이터가 없는 대신 냉각핀이 장착되어 있었다.[7] 출처에서는 해당 차량이 대한민국 국군 소속으로서, 1952년에 격파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8] K9 자주포를 노르웨이에 수출하면서 노르웨이의 고등어와 물물교환했다고 주장하는 사설로 인하여 한동안 이러한 주장이 사실인 양 알려지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