촉한사영 ,蜀漢四英, | |||
제갈량 | 장완 | 비의 | 동윤 |
1. 개요
蜀漢四英
삼국시대 촉한의 뛰어난 정치가 4명을 묶어 이르는 병칭(竝稱)으로, 촉한사상(蜀漢四相)으로 부르기도 한다. 유비가 입촉을 완료한 214년부터 최후의 촉한사영인 비의가 암살당하는 253년까지 장장 40여 년간 촉한의 정사를 도맡아 나라를 부강케하고 안정시킨 명재상들이었다.[1] 《정사 삼국지》에 주석을 단 배송지는 화양국지 7권 유후주지를 인용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2. 행적
촉한은 이 4명이 살아 있던 시기까지는 무능했던 유선을 데리고도 그럭저럭 시의에 맞는 판단을 하며 가장 약소국임에도 국력이 몇 배나 되는 위나라를 상대로 밀리지 않을 만큼 부강했지만,[2] 이들이 사망한 이후로 진지 때부터 간신 황호가 스멀스멀 등판하더니, 진지 사후엔 전면에서 득세하면서 국가가 얼마 가지 않아 막장테크를 타고 만다.순서를 보면 동윤이 가장 늦게 죽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동윤이 비의보다 7년 먼저 죽었으며 제일 늦게 죽은 건 253년에 암살당해 죽은 비의다. 동윤이 죽을 당시 재상은 비의로 동윤은 나머지 3명과 다르게 재상을 하지 못하고 죽었다. 이때 동윤의 죽음이 놀라운데 장완 사후 비의가 재상에 오르면서 비의가 맡았던 자리를 동윤이 채웠는데 동윤이 비의의 일머리를 따라가지 못해 열흘만에 일이 꼬였으며 동윤은 재능의 차이를 한탄하면서도 노력으로 커버치며 쉴새없이 일하다가 2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이렇게 보면 동윤이 나머지 3명에 비해 많이 부족해 보이는 건 사실이나 동윤은 형주 출신이었던 나머지 인물들과는 다르게 아버지 대부터 촉지방의 유지였으며 올곧고 강직하면서 겸손한 성격으로 황제인 유선도 어려워할 정도였다. 그가 황실 내부의 일을 맡았을 때는 황실의 기강을 제대로 잡아 그가 살아있는 동안은 황호같은 간신들이 얼씬도 못하고 유선도 뻘짓을 못했을 정도. 때문에 재상의 자리에 오르지는 못하였지만 진지를 대신하여[3] 촉한사영에 포함되었다.
다만 이들의 능력에 비해 끝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제갈량, 장완, 동윤은 모두 병사했고 비의는 암살당했다. 제갈량을 제외하고는 생년이 기록되지 않아 정확한 나이는 알 수 없으나 제갈량과 동윤은 사인이 과로로 추정되는 만큼 제 명에 살지 못하고 죽은 것으로 보인다.[4]
위 동상은 쓰촨 성 면양(綿陽)의 부락산 공원에 있는 동상이다. 해당 지역 안내원의 설명에 따르면 부락산은 면양의 제일산이라고도 하는데 원래 부락산의 이름은 동산(東山)이었고 후한 헌제 건안 16년(서기 211년)에 익주목으로 있던 유장과 유비의 만남이 바로 부락산에서 이루어졌다고 한다.
부성회관 아래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자 문 위로 공연무대가 있다. 12m쯤 떨어진 맞은편에 촉한이시(蜀漢伊始)라는 편액이 걸린 큰 건물이 있는데, 촉한이 이곳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뜻이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유비와 유장이 이곳에서 100일간 잔치를 벌이며 건너편 무대에서 벌이는 무희들의 춤을 바라보면서 술잔을 기울였다고 한다.
동산은 당나라 때 부락산으로 이름이 바뀐다. "풍성하구나, 오늘의 즐거움이여!(富哉樂乎)"라며 술을 마시던 유비는 산 아래 펼쳐진 촉 지방의 기름진 농토를 바라보며 탄성을 쏟아냈고 후일 유비가 익주를 탈취하고 소원을 이룬 데 대해 당나라 때 이 고사를 기념하여 부락산이라고 개칭하고 부락사를 세운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그때부터 부락산으로 불려진다고 한다. 이 공원에는 촉한사영 외에도 오호상장의 동상과 유장, 유비, 방통의 동상이 있다.
촉한사영은 모두 형주 출신이라며 같은 부류, 파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텐데, 제갈량은 서주 냥야 출신에 남양군의 호족들과 교류, 장완은 오지 취급이었던 형주 영릉군 출신, 비의는 강하군 출신으로 유비가 입촉하기 전에 유장의 인척이라 익주로 유학, 동윤은 아버지가 형주 출신 유장의 신료였는 데다가 집안이 원래 익주출신이고 익주로 집안이 복귀한 것도 유비의 입촉 전인지라[5] 흔히 언급하는 유비의 입촉 전 인재풀인 형주 중-북부(남양, 남군-강릉, 양양 등) 출신들과 들어맞는 것은 제갈량밖에 없다. 유비의 입촉 때 익주에 들어선 제갈량-장완과 원래 유장의 관료 및 인척으로 익주에 들어선 비의-동윤은 다른 배경을 가지고 있다는 말.
거기다 제갈량은 사실상 구 유장세력과 가까운 이들인 비의와 동윤을 중용하여 촉한의 최상위 관료로 성장시켰으니 이런 종류의 파벌론은 그 근거가 부족하다고 할 수 있다.
[1] 실제 재상에 해당하는 상국과 승상은 촉한에선 오로지 제갈량의 것이었다. 물론 장완, 비의가 제갈량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남겨둔 것이지 사실상의 승상 역할을 했기 때문에 재상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다만 동윤은 재상에 오르기 전에 사망했다. 자세한 건 각 인물들 문서를 참고하면 된다.[2] 이 시기에 위와 오는 반대급부로 정치적으로 가장 혼란스러운 시기여서 그랬던 탓도 있긴 하다.[3] 비의 사후 직을 나눠 내무는 진지가, 군무는 강유가 맡았다. 진지가 유선에게만 총애받은걸로 기억이 되는데 그가 중앙 정계에 진출할 수 있게 된 계기는 다름아닌 비의다. 촉한사영중 하나인 비의의 총애를 받을 정도의 인물이었으니 어느정도 능력은 있는걸로 보이지만(정사 삼국지의 저자인 진수는 총애를 받아 특별한 포장이 더해졌다라며 비판에 가까운 평가를 하긴 했다) 동윤과는 다르게 환관과 사귀며 촉한의 멸망을 앞당겼다는 평가를 받아 촉한사영에 포함되지 못했다.[4] 물론 제갈량의 나이는 사망 당시 만 54세로 노인이라고 불릴 나이긴 했다. 그래도 사마의가 그렇게 밥도 제대로 안 먹고 일만 해서 어디 오래 살겠냐고 평한 일화도 있으니만큼 대체로 과로사로 여겨진다.[5] 동윤의 집안은 원래 익주에 살았지만 형주 남군으로 이주했었고, 동윤의 아버지 동화 대에 익주로 복귀했다. 동화는 익주호족들과 충돌이 언급되고 동주병과도 관련이 있다고 여겨지는 등 오히려 유장 직속에 가까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