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처칠 전차의 실전 기록을 정리한 문서.2. 제2차 세계 대전
2.1. 서부전선
작전중인 영국 육군 소속 처칠 II[1] |
기동중인 처칠 영국 육군 소속 VII 크로커다일 |
2.1.1. 디에프 상륙 작전
디에프 상륙작전 당시 격파된 캐나다 자치령 육군 소속 처칠 III |
이렇게 전차 자체의 신뢰성이 부족하고 데뷔전에서 처참하게 패배하자 영국 육군은 처칠의 양산을 중지하고 크롬웰로 차종을 통일할 생각을 했으며 이때 처칠은 대체하기 위해 개발한 전차가 바로 A33 엑셀시어였다. 다만 디에프 전투 때문에 나온 영국 수뇌부의 처칠 평가는 현재 역사학자들에게 반박당하는 상황이다. 애당초 작전 자체가 시궁창으로 갔고, 그 어떠한 전차라도 디에프에서 임무를 잘 수행할 수는 없었다고 평가하기 때문이다.# 거기다 디에프 상륙작전에 투입된 처칠은 엘 알라메인에서 대활약한 처칠 III 형식이었다. 즉 같은 전차인데 극과 극의 평가를 받은 것이다.
2.1.2. 노르망디 상륙 작전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의 영국 육군 소속 처칠 IV |
2.1.3. 오버로드 작전
2.1.4. 독일 본토 진격전
2.2. 북아프리카 전역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작전중인 영국 육군 제1 기갑사단 "킹포스" 소속 처칠 III |
2.2.1. 엘 알라메인 전투
처칠 III 6가 2차 엘 알라메인 전투에 투입되었다. 6파운더 50구경장 주포는 어떤 독일, 이탈리아 전차를 상대하는데 충분했으며, 튼튼한 장갑은 4호 전차 F2형의 7,5cm KwK 40 43구경장 전차포와 88mm 대공포를 제외한 어떠한 독일, 이탈리아군의 대전차포를 막아낼 수 있었다. 결국 전투가 끝날 때까지 처칠 III는 1대만이 격파되었으며, 수십발의 포탄을 맞고 견딘 처칠도 있었다고 한다.2.2.2. 횃불 작전
작전 도중 일부 차량에 파손 또는 고장난 M4 셔먼에서 떼어낸 M3 75mm 전차포를 장비한 형식의 처칠 IV NA75를 사용하였다. 이 75mm형 전차포를 개수한 처칠을 운용한 영국군은 6파운더 대전차포보다 다양한 상황에 사용할 수 있는 범용성에 만족하여 처칠 IV부터 주포를 Qf 75mm 전차포로 환장하여 생산된다.2.2.3. 튀니지 전투
튀니지 전투에 투입된 영국 육군 소속 처칠 IV와 해당 전차에 피격된 이후 영국군에 노획된 티거 131호차 |
2.2.4. 베르트램 작전
베르트램 작전 당시 위장용 트럭 커버를 장착한 영국 제8군 소속 처칠 IV |
2.3. 독소전쟁
3. 냉전
3.1. 6.25 전쟁
한국 전쟁에서의 영국 육군 소속 처칠 VII |
[1] 사단 마크는 보이지 않으나 적색 사각형 부호로 보아 B중대인 것은 확실하다.[2] 독일군 주장은 2대 격파, 영국군 주장은 직접 격파된 전차는 없음.[3] 흔히 이를 처칠의 문제라고 언급되곤 하는데 사실 상황을 따져보면 어떤 중전차라도 어지간하면 큰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는 전술적 실패였다. 처칠 부대가 보병 엄호 없이 단독으로 공격에 투입되었고, 야간에 전차장들이 작전 회의를 위해 모인 시점에서 15cm 포병대의 포격과 동시에 400~600미터 거리에서 매복한 야크트판터 3대의 후방 기습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는 영국군의 야크트판터와의 첫 조우였다. 처칠의 반격은 야크트판터에 거의 피해를 주지 못했으나, 다음날 이 야크트판터 3대 중 2대는 궤도 손상으로 유기된 상태로 발견되었으며 1대는 승무원들이 소각했지만 다른 1대는 멀쩡한 상태로 노획되었다.[4] 공교롭게도 이날은 히틀러의 생일이었다.[5] 영화 퓨리에도 출연한, 현재 유일하게 기동이 가능한 그 티거다.[6] 장포신형은 500M 거리에서 100mm를 넘는 관통력으로 대전차전에선 유용했으나, 범용성에서 75mm에 밀렸다.[7] 이때 생긴 파편이 차 안으로 튀어서 조종수와 통신병에게 부상을 입혔을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