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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칠 전차/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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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제2차 세계 대전
2.1. 서부전선
2.1.1. 디에프 상륙 작전2.1.2. 노르망디 상륙 작전2.1.3. 오버로드 작전2.1.4. 독일 본토 진격전
2.2. 북아프리카 전역
2.2.1. 엘 알라메인 전투2.2.2. 횃불 작전2.2.3. 튀니지 전투2.2.4. 베르트램 작전
2.3. 독소전쟁
3. 냉전
3.1. 6.25 전쟁

1. 개요

처칠 전차의 실전 기록을 정리한 문서.

2. 제2차 세계 대전

2.1. 서부전선

작전중인 영국 육군 소속 처칠 II[1]
파일:external/www.flamesofwar.com/Churchill-VII-Croc-01.jpg
기동중인 처칠 영국 육군 소속 VII 크로커다일

2.1.1. 디에프 상륙 작전

파일:attachment/Dieppe.jpg
디에프 상륙작전 당시 격파된 캐나다 자치령 육군 소속 처칠 III
처칠 전차의 최초의 실전 투입 기록이다. 그러나 당초의 기대와는 달리 복스홀은 원래 승용차와 트럭만 만들었을 뿐, 전차는 처음 개발한 것이라 시제차와는 달리 양산차는 온갖 문제가 속출했으며, 이러한 문제에도 불구하고 벌인 1942년 8월 디에프 상륙 작전에서 엉성한 작전 계획, 손발이 맞지 않는 육해공군, 모호한 목표, 경험이 부족한 병사들이라는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악조건 속에서 참패를 기록하게 된다. 특히 기동력이 워낙 좋지 않은 처칠 전차는 안그래도 전차가 기동하기 힘든 자갈밭인 디에프 해변에서 대부분이 돈좌되었다. 다만 이때 실제 상륙에 투입된 처칠 전차는 30대였는데, 대부분은 물에 빠지거나 고장이 나거나 궤도가 파손되거나 하는 식으로 무력화된 것이었으며 처칠 전차 특유의 두터운 장갑과 독일군의 빈약한 화력으로 인해 실제 격파된 전차는 아주 적거나 없었고[2] 그나마 멀쩡한 전차들은 상륙작전이 중단되면서 그냥 버려져 독일군에게 그대로 29대가 노획된다. 당시 전차 승무원들은 전투후 대부분 항복해서 피해는 거의 없었던 반면 보병들은 도륙 당했다.

이렇게 전차 자체의 신뢰성이 부족하고 데뷔전에서 처참하게 패배하자 영국 육군은 처칠의 양산을 중지하고 크롬웰로 차종을 통일할 생각을 했으며 이때 처칠은 대체하기 위해 개발한 전차가 바로 A33 엑셀시어였다. 다만 디에프 전투 때문에 나온 영국 수뇌부의 처칠 평가는 현재 역사학자들에게 반박당하는 상황이다. 애당초 작전 자체가 시궁창으로 갔고, 그 어떠한 전차라도 디에프에서 임무를 잘 수행할 수는 없었다고 평가하기 때문이다.# 거기다 디에프 상륙작전에 투입된 처칠은 엘 알라메인에서 대활약한 처칠 III 형식이었다. 즉 같은 전차인데 극과 극의 평가를 받은 것이다.

2.1.2. 노르망디 상륙 작전

파일:A_Churchill_tank_carrying_infantry_advances_towards_St_Pierre_Tarentaine,_Normandy,_3_August_1944._B8567.jpg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의 영국 육군 소속 처칠 IV
2차 엘 알라메인 전투에서 우수한 방어력과 높은 등판능력으로 평가가 좋아지자 계속 생산하게 된다. 이후 노르망디 상륙 작전 직전에 발된 양산 최후 형식인 처칠 VII에 이르면 전면 152mm의 중장갑에 전반적인 제설계로 성능을 일신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강화에도 불구하고 전쟁 후반은 후기형 처칠의 장갑도 무적이 될 수 없어서, 증가장갑을 장착한 처칠 IV, 처칠 VI는 물론이고 처칠 VII도 블루 코트 작전 중 큰 피해를 입었는데, 야간의 기습으로 야크트판터 3대에게 처칠 11대가 노르망디에서 순식간에 격파된 사례가 있을 정도였다.[3]

2.1.3. 오버로드 작전

2.1.4. 독일 본토 진격전

2.2. 북아프리카 전역

파일:Churchill_III_tanks_of_'Kingforce',_1st_Armoured_Division,_in_the_Western_Desert,_5_November_1942._E18991.jpg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작전중인 영국 육군 제1 기갑사단 "킹포스" 소속 처칠 III

2.2.1. 엘 알라메인 전투

처칠 III 6가 2차 엘 알라메인 전투에 투입되었다. 6파운더 50구경장 주포는 어떤 독일, 이탈리아 전차를 상대하는데 충분했으며, 튼튼한 장갑은 4호 전차 F2형의 7,5cm KwK 40 43구경장 전차포와 88mm 대공포를 제외한 어떠한 독일, 이탈리아군의 대전차포를 막아낼 수 있었다. 결국 전투가 끝날 때까지 처칠 III는 1대만이 격파되었으며, 수십발의 포탄을 맞고 견딘 처칠도 있었다고 한다.

2.2.2. 횃불 작전

작전 도중 일부 차량에 파손 또는 고장난 M4 셔먼에서 떼어낸 M3 75mm 전차포를 장비한 형식의 처칠 IV NA75를 사용하였다. 이 75mm형 전차포를 개수한 처칠을 운용한 영국군은 6파운더 대전차포보다 다양한 상황에 사용할 수 있는 범용성에 만족하여 처칠 IV부터 주포를 Qf 75mm 전차포로 환장하여 생산된다.

2.2.3. 튀니지 전투

파일:external/www.39-45war.com/tiger131.jpg
튀니지 전투에 투입된 영국 육군 소속 처칠 IV와 해당 전차에 피격된 이후 영국군에 노획된 티거 131호차
1943년 4월 20일[4]에는 튀니지의 제펠자파에서 약 10마일(16km) 북동쪽에 위치한 174고지에서 제 48 왕립전차연대 소속 처칠 1개 소대가 501 중전차대대 1중대 3소대 1호차 6호 전차 티거 H1형 북아프리카 사양[5]을 발견하고 OQF 6파운더[6]로 선제 공격을 하여 포탄 3발을 명중시켰다. 첫 번째 탄은 포신에 맞고 도탄되었는데 하필 이게 튕겨나오면서 포방패 아래를 강타했고(Shot trap), 포탑링이 파손되어 포탑의 회전이 불가능해진다.[7] 그리고 두 번째 탄을 포탑 측면의 기중기용 돌출부에 명중, 이 또한 도탄되었으나 이 포탄은 포신 아래의 주포 상하작동기구를 파손시켰다. 그리고 세 번째 탄을 초기형 티거의 대표적인 약점 중 하나인 비교적 높은 원통형 전망탑(큐폴라)에 명중시켜 무력화시킨 후 노획하는 활약을 펼쳤다.

2.2.4. 베르트램 작전

파일:A Churchill Mark IV with a truck 'sunshield' on during operation Bertram in the lead up to the second battle of Alamein.jpg
베르트램 작전 당시 위장용 트럭 커버를 장착한 영국 제8군 소속 처칠 IV

2.3. 독소전쟁

3. 냉전

3.1. 6.25 전쟁

파일:한국전처칠.jpg
한국 전쟁에서의 영국 육군 소속 처칠 VII
한국 전쟁 때는 영국 제 29 여단에서 차출해 제 7 왕립 전차 연대의 C중대에 센추리온 전차, 크롬웰 전차와 함께 처칠 VII, 처칠 ARV(구난 전차)로 전쟁에 참여했다. 이 중 처칠 VII의 경우 크로커다일에서 화염 방사기를 제거하고 다시 기관총을 장착해 처칠 VII로 재활용한 것들이다.


[1] 사단 마크는 보이지 않으나 적색 사각형 부호로 보아 B중대인 것은 확실하다.[2] 독일군 주장은 2대 격파, 영국군 주장은 직접 격파된 전차는 없음.[3] 흔히 이를 처칠의 문제라고 언급되곤 하는데 사실 상황을 따져보면 어떤 중전차라도 어지간하면 큰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는 전술적 실패였다. 처칠 부대가 보병 엄호 없이 단독으로 공격에 투입되었고, 야간에 전차장들이 작전 회의를 위해 모인 시점에서 15cm 포병대의 포격과 동시에 400~600미터 거리에서 매복한 야크트판터 3대의 후방 기습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는 영국군의 야크트판터와의 첫 조우였다. 처칠의 반격은 야크트판터에 거의 피해를 주지 못했으나, 다음날 이 야크트판터 3대 중 2대는 궤도 손상으로 유기된 상태로 발견되었으며 1대는 승무원들이 소각했지만 다른 1대는 멀쩡한 상태로 노획되었다.[4] 공교롭게도 이날은 히틀러의 생일이었다.[5] 영화 퓨리에도 출연한, 현재 유일하게 기동이 가능한 그 티거다.[6] 장포신형은 500M 거리에서 100mm를 넘는 관통력으로 대전차전에선 유용했으나, 범용성에서 75mm에 밀렸다.[7] 이때 생긴 파편이 차 안으로 튀어서 조종수와 통신병에게 부상을 입혔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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