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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차상명 車相明 | |
법명 | 운호(雲湖) |
출생 | 1895년 8월 2일 |
동래부 동래군 읍내면 신향교동 (現 부산광역시 동래구 명륜동) | |
사망 | 1945년 4월 7일 (향년 49세) |
경상남도 동래군 | |
종교 | 불교 |
비고 | 친일인명사전 등재 |
서훈 | 대통령표창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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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제강점기의 승려. 한 때는 독립운동가였지만 1930년대 후반 이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전락했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으나 2010년 서훈 취소되었다.2. 생애
2.1. 초기와 독립운동
1895년 8월 2일 동래부 동래군 읍내면 신향교동(現 부산광역시 동래구 명륜동)에서 부친 차인수(車仁守)와 모친 이수년(李守年)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범어사에 들어가 명정학교에서 수학했다. 1919년 당시 범어사 소속 승려로 있던 중 2월 하순경 한용운이 범어사로 와서 만세시위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자 이를 받아들이고 김법린 등과 함께 서울로 가서 3.1 운동에 참가했다.이후 기미독립선언서를 가지고 돌아온 그는 김법린과 함께 동래 장날인 3월 18일에 동래 장터에서 범어사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결의하고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등사하여 시위를 준비했다. 3월 17일에 열린 범어사 명정학교와 범어사 지방학원의 졸업생 송별회를 틈타 학생들에게 이튿날로 계획된 시위에 참가할 것을 권고했다.
그러나 3월 18일 새벽 범어사 동래포교원에 있던 차상명 등 주동자들은 명정학교 학생 오계운(吳啓運)의 밀고로 출동한 일제 경찰과 헌병의 습격을 받고 체포되고 말았다. 차상명은 4월 17일 부산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형기를 줄여 출옥하였다.
2.2. 친일 행적과 사망
1920년 조선불교청년회 범어지회를 담당하였고, 1923년에는 장안청년회·동래청년회·동래노농회에서 활동하였으며, 범어사 동래포교당 주지를 역임하였다. 1928년에는 범어사 동래포교당이 운영하는 싯달야학의 교장을 지내는 등 동래 지역의 사회 활동에도 활발하게 참여하였다. 1930년 6월 경상남도 김해군 삼방동의 은하사(銀河寺) 주지로 취임하여 1936년 6월까지 재직하였고, 1936년 4월 조선총독부의 인가를 받아 부산 범어사 주지로 취임하여 1939년 4월 임기 만료로 물러날 때까지 재임하였다.범어사 주지로 있을 때인 1937년 2월, 조선총독부에서 개최한 31대본사 주지회의에 참가해 사회교화와 민심작흥에 불교계가 기여해 달라는 총독과 학무국장의 훈시를 듣고 불교의 진흥책과 개선책을 토의했다. 이후 31대본산주지회의에서 송광사 주지 임석진과 함께 총본산건설위원회 상임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7월과 8월 두차례에 걸쳐 범어사에서 '국위선양 무운장구 기원 법요식'이 거행되었다. 그리고 그해 12월 북지 황군 위문금 600원을 조선불교 중앙교무원에 냈으며, 1938년 3월까지 국방헌금 888원 50전과 위문금 822원 14전을 합쳐 1720원 64전을 헌납했다. 범어사에서 낸 액수는 전국 31개 대본산 중 수원 용주사 다음으로 많았다.
8.15 광복 직전인 1945년 4월 7일 동래군에서 병사했다.
3. 사후
대한민국 정부는 차상명이 3.1 운동에 가담했다가 옥고를 치른 점을 고려하여 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러나 친일 행적이 드러나면서 2010년 서훈 취소되었다. 그리고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던 그의 유해는 다른 곳으로 이장되었다.[1] 친일 행적으로 인해 2010년 서훈 취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