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6-18 20:32:41

주세페 모로

파일:Giuseppe Moro.jpg
이름 주세페 모로
(Giuseppe Moro)
생년월일 1921년 1월 16일
사망년월일 1974년 1월 28일 (향년 53세)
국적 파일:이탈리아 국기.svg 이탈리아
출신지 이탈리아 왕국 카르보네라
포지션 골키퍼
신체조건 185cm | 80kg
소속팀 트레비소 FBC 1993 (1938-1941)
칼초 파도바 (1941)
트레비소 FBC 1993 (1941-1942 / 임대)
US 알레산드리아 칼초 1912 (1942-1943)
트레비소 FBC 1993 (1944-1947)
ACF 피오렌티나 (1947-1948)
AS 바리 (1948-1949)
토리노 FC (1949-1950)
루케세 1905 (1950-1951)
UC 삼프도리아 (1951-1953)
AS 로마 (1953-1955)
엘라스 베로나 FC (1955-1956)
국가대표 9경기 (1949-1953)
감독 산크리스피노 (1960-1964)
에바 크소르 (1964)
올랭피크 베자 (1965)



1. 개요2. 생애3. 플레이 스타일 & 평가4. 사생활5. 뒷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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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탈리아의 전 축구 감독.

2. 생애[1]

2.1. 어린 시절

어린 시절의 모로는 프란티셰크 플라니치카가 다이빙하는 그림이 그려진 공책을 빼면 학교와 관련된 모든 것을 싫어했다. 어렸을 때부터 유벤투스 FC의 팬이었던 모로는 10리라를 모아 축구공을 샀고 혼자 축구를 즐겼다. 모로는 카르보네라에서 학교를 다녔다. 하지만 그는 교실에서의 수업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학교 안뜰에서 열리는 축구 경기에만 관심을 기울이며 숙제 대신 가제타 델로스포르트를 읽었다. 그러나 모로는 발기술에 재능은 없었기 때문에 친구들의 강요로 골키퍼를 맡게 되었다. 모로 역시 자신이 그쪽에는 재능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골키퍼로 뛰는 것을 받아들였다.

모로의 아버지도 카르보네라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과수원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어린 시절의 모로는 다른 과수원을 돌아다니며 서리를 하다 분노한 주인들에게 쫓기는 것을 낙으로 삼고 있었다. 모로는 장대를 준비해서 포도밭에 있는 울타리를 장대높이뛰기로 넘어다니곤 했다. 하루는 모로가 문제를 일으켜 분노한 그의 아버지에 의해 집 2층에 갇힌 적이 있었다. 탈출 가능성이 매우 낮았음에도 모로는 창문 밖으로 몸을 던져 탈출에 성공했고 그의 아버지는 모로를 따라했다가 대퇴골 골절로 몇 달간 자리에 누워있었어야 했다.

모로는 12살때부터 축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는데 당시 모로의 소속팀은 어린 선수들에게 일주일에 1리라의 수수료를 요구했는데 이 돈은 모로의 할아버지가 내줬다.

2.2. 선수 생활

2.2.1. 클럽

2.2.1.1. 초기 선수 생활
모로는 1938년, 트레비소 FBC의 1군팀에 합류했고 촉망받는 젊은 골키퍼로 주목받았다. 그러나 모로의 트레비소 1기는 오래가지 못했고 1941년에 모로는 3명의 선수와 함께 3만리라칼초 파도바로 이적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파도바에는 골키퍼가 많아 모로는 다시 트레비소로 왔다.

제2차 세계 대전 때 모로는 1942년부터 징집되어 알레산드리아에서 운전병 임무를 수행했다. 몇달 후, 모로는 시칠리아로 옮겨 복무를 하다 그가 운전하던 트럭에 포탄이 떨어져 죽을 뻔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모로는 낙법을 이용해서 크게 다치지 않았다. 이 시기에 모로는 알레산드리아 칼초에서 뛰며 세리에 B에 데뷔했다.

이탈리아군의 휴전 이후, 모로는 군인으로 더 복무하기 싫어서 민간인으로 변장했다. 그렇지 않으면 독일 국방군이 대치하고 있는 전선으로 이동해야 했다. 모로는 독일 군인들이 다른 이탈리아 군인들을 모을 때 열차에서 내렸고 철도 노동자의 도움을 받아 밀라노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모로는 리소네로 이동, 지인의 가족들과 은신처에 한 달여간 숨어있다가 고향 트레비소로 돌아갈 수 있었고 다시 트레비소 FBC의 선수로 복귀했다. 그러나 1944년 4월 7일에 있었던 성금요일 폭격으로 인해 트레비소가 황폐화되자 모로는 베네치아로 이주해서 친선 경기에 참가했다.

전쟁이 끝나고 1945-46 시즌에 모로는 본격적으로 트레비소 FBC의 선수가 되었다. 이 시즌의 트레비소는 세리에 B-C 북부 리그의 C조에 속해 있었고 시즌은 마쳤지만 모로는 팀에 불만을 품고 팀을 떠나려 했다. 그러나 모로는 자신의 변심으로 일부 문서를 위조한 것을 감독에게 걸려 그 묵인을 대가로 팀에 남아야 했다.

그러나 이런 식의 봉합은 절대 오래 지속될 수 없었다. 이 봉합은 1947년 4월에 깨졌으며 모로는 이적을 위해 자신을 세일즈하다 걸렸다.
2.2.1.2. ACF 피오렌티나
루케세 1905 등과도 모로의 이적 이야기가 나왔지만 루케세는 발을 뺐고 모로의 행선지는 세리에 A 소속인 ACF 피오렌티나로 결정되었다. 모로는 새로운 팀동료, 스탭들과 좋은 관계를 맺었지만 디렉터 우골리니와는 관계가 좋지 못했다. 9월 14일, 세리에 A 개막전에서 모로는 AS 로마에 1:0 승리를 이끌었고 이후에 경기장에서 좋은 활약을 보였다. 이때의 모로는 세리에 A 최고의 골키퍼로 꼽히기에 부족함이 없었고 대표팀에도 선발되었다. 그러나 시즌이 지날 수록 모로는 들쭉날쭉한 경기력으로 의구심을 자아냈다.

경기장에서 뭔가 미친듯한 모습을 보이던 모로는 1948년 3월에 이적설로 경기장 밖에서도 논란의 중심에 섰다. 모로가 곧 아스날 FC로 이적한다는 기사가 나왔고 이는 우골리니조차 알지 못하던 일이었다. 우골리니는 기자들에게는 질문을, 서포터들에게는 공격을 받았고 소문의 진원지를 찾아냈다. 구단의 조사결과 이는 모로가 기자들을 조롱하기 위해 꾸민 자작극이었음이 밝혀졌고 구단은 모로에게 3주간의 출장 정지 징계를 매겼다.

1948년 6월 2일, 유벤투스 FC전에서 피오렌티나는 2:4로 패했는데 모로는 골을 허용하고 나서 우골리니에게 모욕을 들었고 이에 격분한 나머지 아예 피오렌티나의 골문에 공을 고의로 집어넣어버리는 대형 사고를 치고 말았다. 이 사고에 대해 피오렌티나는 모로에 출장 정지와 함께 벌금으로 3만 리라를 부과했고 모로는 징계에 항소했다. 모로의 출장 징계는 경감되었지만 모로는 복귀 경기에서 SS 라치오에 0:5로 대패했다. 그나마 피오렌티나는 마지막 2경기를 모두 이겨 7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다사다난한 시즌을 마친 피오렌티나는 모로와의 계약을 연장했지만 모로는 경제적 이득을 위해 모로를 AS 바리로의 이적을 선택했다.
2.2.1.3. AS 바리
모로는 AS 바리의 첫 3경기에서 모로는 3차례의 페널티 킥을 막아내며 인상 깊은 데뷔를 했다.

1949년 4월, 모로는 유벤투스 FC를 상대로 놀라운 선방을 선보였다. 모로는 피에트로 라바의 프리킥을 막아냈고 경기 종료 직전 이번에는 라바의 페널티 킥까지 막아내며 바리의 2:1 승리를 이끌어냈다. 모로는 이 시즌에 페널티 킥을 5회 막아냈으며 이 기록은 한동안 세리에 A 한 시즌 최다 페널티 킥 방어 횟수였다.[2]

바리는 간신히 강등을 면했고 모로의 실수와 우유부단함은 여전했지만 모로의 몸값은 갈수록 높아졌다.
2.2.1.4. 토리노 FC
몸값이 높아진 모로에게 여러 선택지가 있었지만 그의 입장에서 수페르가의 비극 이후의 토리노 FC 입단은 우선 순위가 가장 낮았다. 그럼에도 모로는 결국 토리노의 입단을 선택했다.

1949년 9월 11일, 베네치아 FC를 상대로 한 토리노 데뷔전에서도 모로는 페널티 킥을 막아냈고 토리노의 1골차 리드를 지켜냈다. 여기서 모로는 베네치아의 페널티 키커 피에트로 데가노(Pietro Degano)의 혼을 빼놓는 액션들을 선보였다. 모로는 그의 베레모를 땅에 던지더니 골포스트에 기대 신발을 땅에 문질러댔다. 킥 직전엔 데가노를 향해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내질렀고 이에 흔들린 데가노의 킥은 모로에게 걸리고 말았다.

다음 경기였던 노바라 FC와의 경기는 노장 공격수 실비오 피올라와의 맞대결로 치러졌다. 피올라는 모로를 페이크로 속이는 데에 성공했지만 모로도 본능적으로 다리를 이용해 피올라의 슈팅을 막아냈다. 경기는 토리노의 5:1 승리로 끝났다.

여기서도 모로를 둘러싼 이야깃거리는 멈추지 않았다. 1949년 10월 30일, AS 로마와의 경기에서 토리노는 1:3으로 로마에 패했다. 모로는 밤에 잠을 잘 이루지 못해 아침 6시에 숙소를 잠시 나갔는데 룸메이트가 이를 페루초 노보 감독에게 모로가 숙소를 이탈했다고 보고를 해버렸다. 경기 결과도 패배에 모로의 플레이 스타일도 위험천만했던 터라 노보 감독은 모로가 승부조작에 연관되었는지 의심을 했다.[3]

1950년 2월 19일에 토리노가 프로 파트리아에 1:6 대패를 기록했을 때에도 모로는 ACF 피오렌티나에서 있던 일과 비슷한 일을 겪었다.

이무렵의 모로는 경기력에 더 큰 기복을 보였고 유벤투스 FC와의 데르비 델라 몰레에서 잠피에로 보니페르티를 제어하지 못해 3:4 패배를 겪었다. 이렇게 토리노는 수페르가의 비극을 겪고 6위로 리그를 마쳤지만 모로는 다른 팀을 알아봐야했다.
2.2.1.5. 루케세 1905
1950년 월드컵을 끝내고 돌아온 모로는 유벤투스 FC와 직접 협상에 임했지만 토리노 FC가 제시한 높은 몸값으로 인해 유벤투스 합류에 실패했다. 모로는 베네치아 FC와 거의 합의에 이르렀지만 최종 행선지는 루케세 1905였다.

당시 루케세는 세리에 A에서 최고급의 수비진을 갖추고 있었고 모로도 유벤투스전에서 욘 한센페널티 킥을 막아내며 순조롭게 루케세의 수비진에 녹아드는가 했다. 그러나 이 경기를 포함해 루케세는 3경기에서 1무 2패에 그쳐 불안한 출발을 보였다. 모로는 이 시즌에도 번뜩이는 선방과 불안한 모습을 시즌 내내 노출했다.
2.2.1.6. UC 삼프도리아
모로는 1951년 5월말에 다시 한번 유벤투스 FC 입단을 추진했고 유벤투스 선수들과 훈련도 함께했다. 이는 모로가 6월에 UC 삼프도리아 이적이 공식화되기 전까지 계속됐다.

삼프도리아에 합류한 모로는 다시 기량을 끌어올려 당시 세리에 A 최고의 골키퍼로 꼽혔고 이탈리아 대표팀에도 다시 선발되기 시작했다.

1952년 2월 3일, SS 라치오와의 경기가 스타디오 나치오날레에서 열렸다. 이 경기에서 라치오는 페널티 킥을 얻었고 키커로는 터키 출신의 공격수 쉬크뤼 귈레신(Şükrü Gülesin)이 나섰다. 모로는 쉬크뤼가 초조해하며 킥을 서두르는 것을 눈치채곤 장갑과 모자를 땅바닥에 던져대며 도발을 했고 준비가 된듯하면서 몸을 돌려 골대 뒤를 바라보는 행동을 3~4회 반복했다. 보다 못한 주심이 이를 제지했지만 결과는 쉬크뤼의 실축이었다. 쉬크뤼는 이 사건 이후 기량이 눈에 띄게 저하되었고 시즌을 마치고 라치오를 떠나게 되었다.

1952년 4월에 있었던 볼로냐 FC 1909와의 경기에선 후반 34분, 2:0으로 끌려가던 상황에서 볼로냐가 페널티 킥을 얻었음에도 모로를 상대로 도전하는 키커가 나오지 않았다. 결국 키퍼로 디노 발라치(Dino Ballacci)가 나섰지만 결과는 실축이었다. 나중에 모로는 이 경기에서 볼로냐를 꺾는 대가로 6만리라의 뒷돈을 받았다고 고백했다.

모로는 이 시기에 여러차례 승부조작 제안을 받았는데5월 11일에 펼쳐질 루케세 1905와의 경기를 앞두고 루케세를 도와달라는 친구의 제안을 받았다. 그러나 모로는 대표팀 경기때문에 이 제안을 거절했다. 6월에 있었던 칼초 파도바와의 경기에서 승부조작 제안이 들어왔고 이번에는 모로가 삼프도리아 동료 4명을 모아 20만리라를 전달했다. 경기는 파도바의 2:1 승리로 끝났지만 모로는 페널티 킥을 막아냈다는 이유로 그 동료 4명에게 욕을 먹었다.

1952년 11월 23일, 모로는 유벤투스의 감독 샤로시 죄르지와 충돌을 일으켰다.[4] 당시 유벤투스는 자신들이 가진 기술적 우위를 활용하기 위해 리그 규격보다 살짝 작은 공을 썼는데 모로는 이를 알고 있었다. 이 경기에서 모로는 유벤투스가 코너킥을 얻자 이 사실을 심판에게 알려 공을 바꿨지만 샤로시도 가만히 있지 않았고 둘의 말싸움으로 번졌다. 모로가 그동안 해놓은 행동들때문에 처음 여론은 싸늘했지만 조사 결과 모로의 말이 맞았다.

1953년 5월 3일, 우디네세 칼초와의 경기에서 삼프도리아는 0:1로 지고 있었고 경기 종료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동료 공격수들의 위력없는 공격을 보던 모로는 알베르토 갈라시를 불러 옷을 바꿔입어버렸다. 아웃사이드 라이트 포워드로 배치된 모로는 올리비에로 콘티의 동점골을 어시스트한 후 다시 포지션을 바꿨다.
2.2.1.7. AS 로마 그리고 마지막
1953년, 모로는 AS 로마로 이적했고 도착하자마자 로마는 해외 투어를 떠났다. 해외에는 1950년 월드컵 당시의 모로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이에 힘입어 모로도 투어 경기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였다.

1954년 2월 7일, 모로는 상당히 기분 나쁜 하루를 보내야 했다. ACF 피오렌티나에 로마는 1:2로 패했고 모로의 경기력에 사람들은 비난을 쏟아냈다. 게다가 경기가 끝난 그날 밤, 설상가상으로 모로가 새로 산 알파 로메오 1900을 도둑맞았다. 전화를 받고 그는 친구와 함께 차를 찾으러 다녔지만 허사로 끝났다. 이 일로 모로는 7경기 연속 선발에서 제외가 되었는데 나중에 모로는 자동차 도난으로 실망스러워서 스스로 경기 출전을 거부했다고 밝혔다.

1954년 4월 25일, 모로는 유벤투스 FC와의 경기를 앞두고 개업으로 돈이 필요했었는데 이때 누군가가 접근했다. 그러면서 돈으로 모로를 회유했지만 모로는 리그와 소속팀에 이를 보고해버렸다. 결과는 아무도 처벌받지 않은 채로 끝났다.

1953-54 시즌을 마친 모로는 이 무렵 도시의 유혹에 빠져 인생을 망치게 되었다. 모로는 커스텀 카를 구매하고 나이트클럽에서 포커를 치는 데에 시간을 쓰기 시작했다. 도 구매해서 경영했지만 사기까지 당해서 모로는 1,500만달러 상당의 금전적 손실을 입었다. 이렇게 되자 모로는 클럽의 신뢰를 얻을 수 없었다. SS 라치오로부터 모로의 이적 제안이 들어왔지만 로마가 라치오에 선수를 넘기길 거부했다.

1954-55 시즌에 모로는 주전 경쟁에 다시 들어갔고 팽팽한 경쟁 속에 1955년 5월 15일의 우디네세 칼초전에서 근육 파열로 경기장을 떠나야 했다. 이는 모로의 커리어에서 첫 부상이었다.

모로가 로마에서 뛴 마지막 경기는 1955년 7월 4일의 FK 보이보디나전이었는데 4:1로 이기고 있었음에도 모로는 무려 4골을 더 허용해 4:5로 역전패했다. 구단은 모로에게 패배의 책임을 물려 30만리라의 벌금을 부과했다. 결국 1955년 오프시즌에 루치아노 파네티를 영입한 로마는 모로와의 결별을 선언했고 모로는 1956년에 로마를 떠났다.

1956년, 세리에 B 소속이었던 엘라스 베로나 FC로 팀을 옮긴 모로는 거의 출전 기회를 잡지 못했고 그대로 은퇴했다.

2.2.2. 국가대표

모로는 1947년 12월부터 이탈리아 대표팀에 소집되었지만 그의 실제 데뷔 경기는 1949년 6월 12일에 있었던 헝가리전이었다. 모로는 이 경기에서 나름 좋은 활약을 펼쳐 축구팬들에게 긍정적인 평을 받았다.

당해 11월 30일, 모로는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을 상대로 두 번째 경기를 치렀다. 모로는 스탄 모텐슨의 슈팅을 몇미터 앞에서 막아내는 등 잉글랜드의 공격수를 상대로 효과적인 세이브를 올렸지만 경기는 이탈리아의 0:2 패배로 끝났다.

모로는 1950년 월드컵에서 이탈리아의 주전 골키퍼로 내정되었지만 컨디션 문제로 인해 첫 경기 스웨덴전에서는 벤치를 지켰다. 루치아노 센티멘티가 모로 대신 골키퍼로 나섰지만 이탈리아는 스웨덴에 2:3으로 패해 탈락 위기에 몰렸다.

다음 경기였던 파라과이전에서야 모로는 선발로 나섰지만 스웨덴과 파라과이가 무승부를 거둬 이탈리아는 이미 탈락이 확정된 상황이었다. 그래도 이탈리아는 파라과이를 2:0으로 이겨 유종의 미를 거두고 이탈리아로 돌아올 수 있었다.

모로는 1953년에 기술위원회와의 갈등으로 대표팀을 스스로 나갔다.

2.3. 이후

모로는 1974년 1월에 병으로 사망했다.
저에게 모로는 위대한 골키퍼이자 진정한 전설입니다. 저 역시 그가 플레이하는 것을 몇 번 봤죠. 그의 부고를 듣고 저는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담아 국가대표팀 유니폼을 트레비소에 보냈습니다. 그 셔츠는 수년간 무패의 영광을 누렸던 모로가 입을 가치가 충분합니다. 제 입장에선 본능적인 행동이었죠.
디노 조프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모로는 기행과 쇼맨십을 곁들여 상당히 화려한 플레이를 펼친 골키퍼였다. 그는 공격수가 슈팅한 공이 골문을 위협하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되면 가만히 서서 공격수를 경멸적인 눈빛으로 쳐다보곤 했다. 물론 그와 정반대로 미친 것처럼 보일 정도로 큰 리액션을 선보이기도 했다.

그렇게 모로는 관중들의 환호를 유도하던 골키퍼였으며 그다지 어렵지 않게 날아오는 슈팅에도 더 극적으로 몸을 날렸다. 평온함, 용기, 자신감, 직관, 빠른 반사 신경을 통해 어려운 슈팅 방어에도 능했지만 자신의 능력을 과시한 것으로 판단되는 실수를 저지를 때가 종종 있었고 상황 판단에서 다소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일 때도 있었다.
나는 모로가 실수를 저지르고서도 자신감 있게 플레이하는 것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실비오 피올라
모로는 마치 의도적으로 보일 정도로, 엄청난 실수와 놀라운 업적을 번갈아 가며 보여줬다. 이 불쾌한 의심 속에서 모로는 많은 추종자들을 남겼다. 그러나 그의 가벼움으로 인해 결과는 좋지 않게 끝났다.
잔니 브레라

그러나 모로는 항상 자신이 상대해야 할 공격수들을 면밀히 분석하는 데에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공격수들의 습관과 그들이 득점을 노릴 때 쓰는 방식, 주로 노리는 코스를 항상 분석했고 국가대표팀 훈련 때에는 공격수들의 의도를 전부 읽고 있고 그들을 조종할 수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특히 골키퍼로서 모로가 강점을 보인 부분은 페널티 킥 방어였는데 그는 키커가 페인트를 써서 골키퍼를 속이는 것처럼 골키퍼도 페인트를 써서 킥을 막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여기에 모로는 키커를 도발해 그들의 실수를 유발시키는 데에도 능했다.
페널티 킥을 막으려면 키커의 특성을 먼저 알아야합니다. 그리고 몸통과 다리의 방향도 읽을 줄 알아야 하죠. 그를 위해서는 직관과 처음부터 빠른 스프린트가 필요합니다.
주세페 모로

4. 사생활

모로는 1945년, 마리아 톨로트(Maria Tolot)와 결혼해 슬하에 3남 1녀를 두었고 모로의 사촌 중 루게로는 프로 사이클리스트였다.

모로의 부족한 경제 관념으로 모로는 은퇴 후 한동안 가족들을 특별한 직업 없이 부양해야 했고 우울증에 빠져 자살 시도도 했다. 그러나 주위 사람들의 도움으로 모로는 축구계에서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5. 뒷이야기

  • 1965년, 튀니지에서 돌아온 모로는 가제타 델로스포르트 사무실에 나타나 안토니오 기렐리를 만났다. 기렐리는 마리오 펜나키아(Mario Penacchia)를 모로에게 소개시켜줬고 모로는 펜나키아에 자신의 삶과 경력을 이야기했다. 펜나키아는 이 이야기를 11월 16일부터 12월 1일까지 10회에 걸쳐 절망적인 삶이라는 제목의 칼럼으로 연재했다.
모로는 10시간 동안 자신의 터무니없지만 영웅적이며 절박했던 삶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야기는 중단되지 않았고 원고로 인해 우리의 가슴이 아팠다. 감정과 메스꺼움, 분노, 즐거움과 수치심이 하나의 감각으로 합쳐진다. 우리는 충격을 받았다.
마리오 페나키아


[1] 출처: 위키피디아, 11v11[2] 현재 기록 보유자는 사미르 한다노비치로 6회의 페널티 킥을 막아냈다.[3] 모로가 이 무렵 승부조작 제안을 받은 것은 사실이었다. 모로의 주장에 따르면 AS 바리측에서 모로에게 2차례 승부조작을 제안했는데 첫번째는 모로가 거절했고 두번째는 모로가 바리에 좋은 감정을 갖고 있어서 제안을 받아들였지만 결국 모로 스스로가 부정적인 감정들에 휩싸여 스스로 경기 출전을 거부하고 돈을 돌려줬다고 한다. 그리고 모로가 역으로 상대팀 선수들을 포섭해서 바리에 지도록 사주한 적도 있지만 바리가 1:4로 지면서 거래가 성립되지 않은 적도 있었다.[4] 샤로시와 모로는 AS 바리 시절에 감독과 선수로 만난 적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