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조위 최고의 장수 중 하나이자 조씨 황족 중 최고의 장수로 평가된다. 하후돈, 하후연, 조홍, 조휴, 조진, 하후상이 모두 조씨의 인척이기에 다수가 정치적 안배로 실제 능력에 비해 정부 군부의 높은 고관대작 지위에 올랐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는 반면,[1] 조인은 지용을 겸비한 명장으로 능력으로 보나, 정치적 위치로 보나 조조에게 있어 누구보다도 믿음직한 수하장수였다. 인척 버프를 빼고 평가해도 독보적인 위용을 자랑하는 장군이었다고 볼 수 있다.
전반적으로 보면 조인은 군웅 조조의 시작과 끝을 함께한 대들보 같은 용장으로서, 언제나 조조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조인은 용맹을 바탕으로 거병 초기엔 우금, 악진과 더불어 정벌전을 담당하며 조조군을 먹여살린 3톱으로 맹활약했다. 관도대전 이후 활약상이 줄어든 우금, 악진과는 달리 조인은 관도대전 이후에도 명성을 이어나가는데, 특히 남군이나 번성에서 성공적인 방어전을 이끌며 조위 사직을 지켜낸 대장은 언제나 조인이었다. 그의 훌륭한 수성 덕분에 손유 연합군은 적벽대전이라는 희대의 대승을 이뤄내고도 점령한 지역은 형북 이남에 그쳤고 또한 한중에 이어 번성에서까지 크나큰 실패를 맞을 뻔 했던 상황에서도, 끝내 강역 보존과 전세 역전에 성공할 수 있었다. 조인이 지켜낸 이 조위의 강역이 대체로 삼국통일 직전 촉한멸망전 시점까지 이어졌다.
남군 공방전 단락에도 나와있지만 수백명의 군사들이 수천의 적들에게 포위당한 상태에서 수십 명을 이끌고 용맹을 발휘해 아군을 구출한 점은 조인이 괴물같은 맹장임을 증명했다.
더불어 조조의 부하 장수들 중 유비를 단독으로 상대해서 승리한 것은 조인이 유일하다. 정사의 유비가 거물급 야전 지휘관이었음을 감안하면 상당한 전과인 셈. 조인이 직접 말한 바가 있듯 유비는 원소의 병사들을 새로 받아 원활히 지휘하기 어려웠기에 가능한 전과였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이는 여남에서 공도, 유벽 등을 받아들이며 군세를 늘리던 유비의 모습을 고려하면 조인이 스스로를 낮추기 위해 말한 겸양의 발로였을 가능성도 있다.
1.1. 비판
그러나 우금에게 고작 수백의 병력으로 수천 군사에게 무모한 싸움을 걸게 하여 적진에 고립시킨 점은 지휘관으로서 비판받는다. 이때 우금을 구출하여 천인이라는 감탄을 들었지만 애초에 우금에게 고작 300명으로 무모한 공격을 시키지 않았다면 위험에 처할 일도 없었다.또한 말년엔 번성 공방전 당시 위험을 대비하지 못한 측면이 있어 온회가[2] 조인이 적진에 고립되어 대비를 못하고 있다고 경계하기도 하고 결국 이 우려대로 조인에게 지원된 위의 7군은 그대로 전몰되고 만다. 거기다가 번성 공방전 관련 기록에는 이상하게 촉 수군에 대한 기록은 있는데 번성에 주둔했을 법한 위 수군에 대한 기록이 없다. 수군을 데리고 오지 않았거나 관우의 수군에 격파되었거나 중 하나일 것인데 어쨌든 이 부분에선 관우의 공격에 밀린 계기를 제공하였고 이로 인해 번성에서는 조인보다 서황과 만총의 활약이 두드러지게 되었다.
위서 무제기에 따르면 우금(于禁)을 보내 조인을 도와 관우를 공격하게 한 것으로 애당초 조인의 목표는 원군을 기다리며 수성하는 것이 아니라 관우를 치는 것이었다. 그러나 조인은 온회의 걱정대로 역으로 홍수에 대비하지 못해 밀려서 번성에 고립된 처지가 되어버려 관우가 서황과 만총의 협공으로 번성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면수를 촉군이 장악해 양양을 완전히 포위했을 지경이었다.
또 유수 전투에서 주환에게 병력과 전술의 우세를 점하고도 대패하기도 했다. 조인은 처음에 선계를 공격하려는 척해서 주환을 속이고 유수를 공격하는 책략을 썼다. 주환은 조인에게 속아 5천의 병력만 유수에 남기고 나머지는 선계로 보냈으며 조인에게 속은 것을 깨닫고 급히 선계로 가던 병사들을 다시 불렀으나, 병사들이 도착하기 전에 조인이 유수에 도착했다.
그러나 조인은 유수성을 공격하는건 스스로 지옥에 들어가는 길이라는 장제의 말을 무시하고 공격했다가 수천의 병력을 잃고 패했다.
그러나 이 정도는 병가지상사로 쳐줄 수 있는 부분이며, 〈주환전〉의 기록을 살펴보면 수전의 기록이 있기에 기병 중심의 위나라에는 수전에 능한 장수가 없었을 것이라는 점을 감안할 여지가 있다.
이를 보면 조인의 전공은 대부분 조조의 지휘 하에 기병대장으로서 한 활약에 치우쳐진 것을 알 수 있다. 단독으로 군대를 지휘하는 외군 사령관으로서는 뚜렷한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다.[3]
2. 장료와의 비교
당대 조조군 내에서의 평가는 최고로, 장료보다 조인을 더 윗줄로 쳐주기도 할 정도이다. 물론 조인이 조조의 친척이기에 전공이 부풀려졌다고 말할 수도 있다. 실제로 커리어 면에서 조인과 비견할 만한 조조군의 장군은 오자양장, 후대의 사마의 정도인데, 적어도 패전 기록이 적은 축인 서황이나 적은 병력으로 오나라 대군을 박살낸 장료보다 조인의 커리어가 우위라고 말하기는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벽 패배 이후 주유와 유비의 협공을 견뎌낸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며, 이 당시 조인이 보여준 무용과 성과는 조조군에서 손꼽을 만하다. 무엇보다 조인은 위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조조 생전, 초기부터 후기까지 항상 조조군의 중심장수였다는 점에서 다른 장군들보다 확실히 더 조조군내에서의 입지가 탁월했으며, 단독으로 군 운용권을 가지고 전적을 올린 경우가 매우 많다. 오자양장과 비교해도 이러한 부분은 우위라고 볼 수 있다.[4] 여포 격파 이후에 합류하여 중기 이후부터 커리어를 쌓았으며 가장 빛나는 전공을 자랑하는 합비에서도 악진 이전과 공동으로 군을 운용했던 장료, 수적, 질적으로 월등한 군세를 보유한 상태에서 진행된 관우 격파 이전까지는 단독 작전이 거의 없는 서황, 중기 이후 커리어가 부실한 우금, 전반적으로 단독작전 기록이 없는 악진, 종종 큰 패배를 경험했고 관도대전 이후 합류한 장합과 비교해보면 명확해진다. 조조군 내부의 전공 면에서 조인과 비견될만한 장수는 아예 없다.그러나 후대의 왕조에서 선정한 무성왕표나 십칠사백장전, 광명장전에는 장료와 달리 조인은 한번도 들어가 본 적이 없다. 흔히 장료와 조인의 우열을 비교하는 글이 많으나 이런 과거에는 장료가 조인보다 평가면에서 우위였던 듯 싶다. 관우와 장비가 관장지용이라고 불리며 후대 용맹한 장수들의 기준이 되었고 마이너하게 감녕과 장료가 이존효 같은 후대의 장수와 비교된 것과 달리 조인이 후대의 장수에 비유된 기록은 없다.
조인의 이런 푸대접은 그의 임팩트가 약한 부분에서 있는 듯하다. 조인은 후대에 회자될 만한 일화나 명언이 거의 없고, 그다지 임팩트 있는 장면도 없다. 지금 조인이 가장 고평가를 받는 부분은 혼자서 군을 이끌었다는 것인데 혼자 싸워서 임팩트가 없다. 조인이 단독으로 작전을 지휘하며 삼국지의 중심에 서 있던 장면은 남군 공방전과 번성 공방전이다. 남군 공방전에서 혼자 용맹을 떨치는 명장면도 있지만 결국 패전한 것은 조인이었다. 조인이 용맹을 떨쳤던 상황도 자세히 살펴보면 우금에게 수천의 적을 달랑 3백의 병사로 공격하게 하고, 우금이 포위당하자 본인이 수십의 병사를 이끌고 용력으로 아군을 구출했다. 조인 개인의 용맹은 대단했을지언정 잘못된 지시로 우금을 위험에 처하게 만들었다는 점은 지휘관으로서 좋게 평가받을 수 없다. 물론 적벽대전 패전의 여파 등 조인에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어서 무척 잘 싸웠다는 얘기도 많지만 치열한 싸움 끝에 이겨낸 주유와 유비, 제갈량 등이 주목받을 수밖에 없다. 또한 번성 공방전에서도 사실 잘 버틴 것이지만 이야기의 흐름이나 임팩트는 관우와 여몽, 서황에게 쏠려 있다. 만총 등의 진언을 잘 받아들이던 다른 사례와 달리 옳은 말도 화를 내며 내치는 거나 수명으로 보아 노화의 영향이 강한 것으로 추측될 수 있지만 어쨌건 최후의 전투 유수 전투에서는 부하의 진언을 물리치며 어리석게 패배하고 말았다.
장료와 비교하자면 부자에서의 평가 때문에 조인 > 장료라는 평가가 있는데, 이 평가에서는 단순히 조인의 용맹함이 조조군 내에서 최고였고 장료는 그 다음으로 용맹했다는 것이지 누가 더 명장이냐를 평가한 게 아니다. 단순한 개인의 용맹만 보면 장료가 기록이 더 많고, 주장으로 악진과 이전을 이끌며 손권의 친정을 아주 임팩트 있게 막아내는 장면이 많다. 반면 조인은 주유와 유비, 관우 상대로 수성해낸 것이 별다른 임팩트가 있지 않다. 결국 삼국지에서의 임팩트는 아군이건 적군이건 삼국지의 주요 장수들과 상호작용을 하던가, 엄청난 일화가 있던가 둘 중 하나인데 조인에게 그런 게 없거나 주목을 받지 못했다.
[1] 이들이 무능했던 건 결코 아니다. 실제로 하후연은 마지막에 황충에게 허무하게 썰려서 그렇지 상당히 유능한 지휘관이었고, 하후돈은 여러 말이 많지만 어쨌건 어려서부터 평생을 조조를 충심으로 섬겼고 흔들리지 않았으며 조홍도 충성으로는 누구 못지 않고 따져보면 생각보다 이것저것 많이 역할을 수행했다. 하지만 조위에 그들보다 뛰어난 무장들이 없었냐면 그렇지는 않았다. 오자양장은 이들에게 밀려서 도독제군사 한 번 못 해보고 죽을 때까지 전선에서 활동해야 했는데 하후연이나 조진 정도를 빼면 딱히 오자양장에 비길 만한 무장들은 아니었다.[2] 당시 대오 전선에 있었음에도 이를 예측했다.[3] 다만 삼국지에서 단독으로 작전지휘권을 가진 외군 사령관으로 뛰어난 활약을 보여준 장군이 별로 많진 않다. 번성에서 7군을 수몰시키고 우금을 사로잡았으나 결과적으로는 패하고 죽은 관우도 그렇고, 주군이 단독 작전권을 맡겼던 상황에서 활약했던 장군들은 주유, 여몽, 육손, 제갈량, 사마의 등이 전부다.[4] 다른 장군들을 볼 때 단독작전권을 가지고 있었다고 다가 아니라는 반론이 있으나 굳이 여기서 다른 장군들과 조인을 비슷하게 취급할 필요는 적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