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합중국 초대 육군부참모장 제임스 하버드 James Harbord | |
본명 | 제임스 거스리 하버드 James Guthrie Harbord |
출생 | 1866년 3월 21일 |
미국 일리노이주 블루밍턴 | |
사망 | 1947년 8월 20일 (향년 81세) |
미국 뉴욕주 라이 | |
복무 | 미합중국 육군 |
최종 계급 | 중장 |
복무 기간 | 1889 ~1922 |
학력 | 캔자스 주립농업 칼리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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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군인.2. 생애
일리노이주 블루밍턴에서 태어났고 미주리주 페티스 카운티, 캔자스주 라이언 카운티에서 성장했다. 캔자스 주립농업 칼리지를 졸업하고 육군사관학교 입교에 실패했다. 이후 교사로 일하다가 1889년 육군 사병으로 입대해 제4보병연대에 배치되었다.이후 1891년 병참부대에 배치되어 병장까지 진급했고 1891년 장교 전형에 지원해 기병 소위로 임관했다. 오클라호마주 포트 리노 제5기병연대에 배치되었으며 포트 레번워스에서 근무했다. 모교인 캔자스 주립농업 칼리지에서 석사학위도 취득했다.
1899년 미국-스페인 전쟁이 발발하자 쿠바로 배치되었다. 대위로 진급하고 병참장교, 전속부관으로 복무했다. 필리핀 전쟁 당시 제11기병연대에 배치되어 모로족과 전투를 치렀고 1914, 1916년 베라크루스 원정대에 참가했다.
1917년 육군전쟁대학을 수료하고 미국 원정군 본부 참모로 임명되었다. 8월 전시계급 준장으로 진급했고 본토에서 신병훈련과 배치업무에 종사하다가 1918년 5월 서부전선에 투입되어 제임스 W. 매캔드루의 참모장으로 임명되었고 곧 이어 제4해병여단을 지휘했다.
7월 전시계급 소장으로 진급해 오마 번디의 후임으로 제2보병사단장이 되었고 제2차 마른 전투, 수아송 전투에 참가했다. 특히 수아송 전투 당시 철저한 사전준비로 야밤에 병력을 3방향으로 분산해 돌격해 24시간동안 7마일을 전진했고 인근 철도를 확보했다. 하지만 독일군의 저항도 완강해서 사단에서 4,2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후 프랜시스 J. 커넌의 후임으로 원정군 병참사령관이 되었다.[1] 여러 악재에도 불구하고 보급체계를 안정시켰다.
종전 후 영구계급 소장으로 진급하고 육군, 해군수훈훈장을 수여받았으며 레지옹 도뇌르도 수여받았다. 1919년 아르메니아 대학살을 목격하고 이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해 우드로 윌슨대통령에게 제출했으며 제2보병사단장으로 복귀했다. 페이턴 C. 마치 육군참모총장 밑에서 부참모장[2]으로 복무한 것을 마지막으로 1922년 퇴역했다.
전후 RCA의 대표로 취임했고 1947년 사망했다.
3. 여담
- 부인은 새뮤얼 오번샤인 준장의 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