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6-23 02:48:08

제임스 더글러스(제9대 더글러스 백작)

성명 제임스 더글러스
James Douglas
출생 1426년
스코틀랜드 왕국
사망 1491년
스코틀랜드 왕국 파이프
아버지 제7대 더글러스 백작 제임스 더글러스
어머니 베아트리스 싱클레어
형제 베아트리스, 윌리엄, 아치볼드, 휴, 존, 재닛, 마거릿
배우자 마거릿 더글러스, 앤 홀랜드
직위 제9대 더글러스 백작
1. 개요2. 생애

1. 개요

스코틀랜드 왕국 더글러스 백작. 스코틀랜드 왕실에 대적해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4세와 동맹을 맺었으나, 끝내 패망했다.

2. 생애

1426년생이며, 아버지는 제7대 더글러스 백작 제임스 더글러스이고, 어머니는 오크니 백작 헨리 2세 싱클레어의 딸 베아트리스 싱클레어였다. 형제로 그보다 몇분 앞서 태어난 쌍둥이 형 윌리엄 더글러스, 베아트리스[1], 아치볼드[2], 휴[3], 존[4], 재닛[5], 마거릿[6]이 있었다.

그는 본래 성직자의 길을 걸으려 했고, 쾰른 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그러던 1452년 2월 22일, 제8대 더글러스 백작으로서 더글러스 가문 영지를 통치하던 형 윌리엄 더글러스가 스코틀랜드 국왕 제임스 2세에게 살해당했다. 이리하여 형의 뒤를 이은 제임스는 왕에게 복수하기 위해 군대를 일으켜 스털링으로 진군했다. 제임스 2세는 딴 곳에 가 있었고, 스털링 성은 곧 함락된 뒤 철저하게 불태워졌다. 여기에 군도의 왕 존 2세 맥도널드, 크로퍼드와 모레이 백작 등이 반란에 가담했다. 그러나 그들은 하급 귀족들이 왕에 맞서 싸우기를 거부하고 잇달아 이탈하는 바람에, 제대로 된 군사력을 투사하지 못했다. 그 사이 제임스 2세는 스코틀랜드 의회의 지지를 확보하고 더글러스 영지에 대한 원정을 단행했다.

1452년 5월 18일, 제임스 2세의 부관인 알렉산더 고든이 지휘하는 왕실군이 더글러스 가문 휘하의 알렉산더 린제이가 이끄는 반란군을 상대로 브레친 전투에서 격파했다. 이에 제임스 더글러스가 화해를 제안하자, 제임스 2세는 수락했다. 이후 폅상이 이어진 결과, 1452년 8월 22일 협정이 체결되었다. 제임스 더글러스를 형 살해에 연루된 사람들을 용서하고 다른 귀족들과 동맹을 맺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 대가로, 왕은 갤러웨이 서부의 영지를 백작에게 양도하고 더글러스가 갤러웨이의 상속녀인 마거릿 더글러스와 결혼하는 것을 허락했다.

1455년 3월, 제임스 더글러스와 동맹을 맺었던 제3대 요크 공작 요크의 리처드가 잉글랜드의 최고 권력에서 실각하자, 제임스 2세는 이때를 틈타 더글러스 가문과의 전쟁을 재개했다. 왕실군은 더글러스 영지 일부를 접수하고, 그의 성 몇 개를 파괴했으며, 뒤이은 아킹홀름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뒀다. 제임스 더글러스는 잉글랜드로 망명했고, 그를 지지했던 사람들이 대거 처형되었다. 이후 제임스 2세의 주도로 소집된 의회는 제임스 더글러스를 반역자로 규탄하고 그의 모든 재산을 영구히 몰수하기로 결의했다.

그 후 제임스 더글러스는 에드워드 4세의 시중을 들었고, 에드워드 4세는 그를 이용해 스코틀랜드 내정에 간섭했다. 1462년, 에드워드 4세는 제임스 더글러스를 헤브리디스 제도에 외교 사절로 파견했다. 존 2세 맥도널드는 아드토리시 성에서 제임스 더글러스와 협상한 뒤, 런던에 사절을 보냈다. 1462년 2월, 런던에서 웨스트민스터-아드토리시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에 따르면, 군도의 왕 존 2세 맥도널드와 제임스 더글러스는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4세를 주권자로 인정하고, 그 대가로 포스만 이북의 스코틀랜드를 자기 영토로 삼기로 했다. 이후 제임스 더글러스는 잉글랜드 분견대를 이끌고 스코틀랜드 국경 지역을 상대로 여러 차례 원정을벌였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475년, 제임스 더글러스는 에드워드 4세의 프랑스 원정에 참여했다. 이후 그는 스코틀랜드에서 왕실에 대한 반대 세력을 형성하고자 하는 에드워드 4세 정책의 핵심이 되었고, 제임스 3세의 통치에 불만을 품은 많은 스코틀랜드 귀족과 서신을 주고받았다. 제임스 3세는 이에 대응해 제임스 더글러스의 목에 현상금을 걸었고, 그와의 어떤 접촉도 반역으로 간주한다고 선언했다. 1483년 스코틀랜드 귀족들이 왕을 상대로 반기를 들자, 그는 올버니 공작 알렉산더 스튜어트와 함께 스코틀랜드에 대한 에드워드 4세와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의 침공을 지원했다.

그러나 1484년 7월, 더글러스는 스코틀랜드 귀족 중 한 명에게 로크마벤에서 체포되어 제임스 3세에게 넘겨졌다. 그는 린도네스 수도원에 감금되어 고초를 겪다가 1488년 제임스 4세가 제임스 3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켜서 제거한 뒤 왕위에 오른 후 그에게 사면받고 국고에서 연금을 받았다. 하지만그의 영지는 반환되지 않았다. 1491년, 그는 쓸쓸히 눈을 감았다. 이리하여 로버트 1세가 잉글랜드의 침략을 물리치고 스코틀랜드 국왕으로 등극하도록 절대적응로 공헌한 인물인 제5대 더글러스 영주 제임스 더글러스의 후손들의 대가 끊겼다.
[1] 스코틀랜드 치안대장이자 초대 애롤 백작 윌리엄 헤이의 아내.[2] 1426 ~ 1455, 모레이 백작[3] ? ~ 1455, 오몽드 백작,[4] 1433~1463, 발베니 영주[5] 초대 플레밍 경 로버트 플레밍의 부인.[6] 보르그의 헨리 더글러스의 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