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2-12 18:17:05

찐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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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호 성조(成祖)
시호 공화관정철왕(恭和寬正哲王)[1]
예무왕(睿武王)[2]
작위 평안왕(平安王)
찐(Trịnh, 鄭/정)
뚱(Tùng, 松/송)
생몰년도 1550년 12월 19일 ~ 1623년 7월 17일
재위기간 1570년 ~ 1623년 7월 17일

1. 개요2. 생애3. 묘호와 시호4.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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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정주의 제3대 왕. 막씨 대월을 정벌하는 업적을 세웠지만 후술할 권신으로서의 전횡과 황제 시해로 평가가 엇갈리는 편이다. 묘호는 성조(成祖).

2. 생애

투언빈 2년 11월 12일(1550년 12월 19일), 찐끼엠(정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훗날 복량후(福良侯)로 봉해졌다. 앞서 형인 찐꼬이(정회)는 찐찌 13년(1570년) 아버지 찐끼엠이 죽자 뒤를 이었으나 무능하고 정사에 신경쓰지 않아 실망한 동생 찐뚱(정송)과 대립했고, 결국 같은 해 8월 참다 못한 찐뚱이 형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그런데 동시에 막 왕조의 막경전도 정가의 내분을 틈타 침공했고, 편리하게도 막경전이 정회 세력을 붕괴시킨 후 정회가 막조에 투항하자 정송이 뒤를 이어 정왕으로 즉위했다. 이후 찐뚱은 장군공(長郡公), 절제각처수보제영(節制各處水步諸營)으로 봉해졌다. 9월, 찐뚱에게 좌상(左相)이 가봉되었다.

찐찌 14년(1571년) 2월, 찐뚱이 태위장국공(太尉長國公)으로 진봉되었고, 막조를 향한 북벌을 개시하여 한 차례 탕롱을 공격해 점령했다. 그러나 이듬해 1572년에 막낀디엔이 남하하여 청화(淸化)를 습격하자 전황이 역전되었고, 황제 레 영종은 예안(乂安)으로 달아나니 찐뚱은 할 수 없이 회군하여 이를 구원하였다. 이후 레 영종이 조정의 신하들과 공모하여 찐뚱을 제거하려고 기도했으나 찐뚱에게 발각되었고, 찐뚱은 선수를 쳐 영종을 폐위한 뒤 시해하고 레 세종을 옹립하였다.

찐뚱은 쉬지 않고 막 왕조와 전쟁을 벌여 막낀디엔과 서로 이기고 지곤 하였다. 그런데 막낀디엔이 1580년에 병사하자 막 왕조의 세력은 급격히 쇠락하였다. 찐뚱은 이 틈을 타 1591년에 대거 북벌하여 이듬해 1592년에 탕롱을 공격해 크게 이겼으며, 막 왕조의 황제 막머우헙과 그의 아들 막전을 차례로 잡아 살해하였다.

꽝흥 22년(1599년), 찐뚱이 막 왕조를 멸한 큰 공로를 세웠다 하여 레 세종에 의해 도원수총국정상부평안왕(都元帥總國政尙父平安王)으로 봉해졌고, 탕롱에 머무르며 지켰다.

호앙딘 20년(1619년), 레 경종이 찐뚱의 아들 찐쑤언과 공모하여 찐뚱을 죽이고 황권을 되찾기로 계획하였다. 그러나 이는 결국 찐뚱에게 발각되었고, 찐뚱은 찐쑤언을 폐서인한 뒤 경종을 협박하여 자살하게 하고, 레 신종을 옹립하였다.

빈또 2년(1620년), 찐뚱이 남쪽 응우옌 주응우옌푹응우옌의 형제인 응우옌푹짝(阮福澤), 응우옌푹헙(阮福洽)과 함께 응우옌 주가 위치한 광남(廣南)을 분할하기로 밀약을 맺고, 이에 병사를 내어 남침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응우옌푹응우옌은 이로 인해 찐씨와의 관계를 단절한다고 선포했다.

빈또 5년(1623년), 찐뚱이 연로하여 죽을 때가 가까워지자 권력을 그의 두 아들인 찐짱과 찐쑤언에게 균등하게 나누어 주어 사후 충돌이 발생하는 것을 면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는 결국 성공하지 못했고, 두 아들 뿐만 아니라 동생인 찐도(鄭杜, Trịnh Đỗ)마저 권력을 얻기를 기대했다. 찐뚱이 죽기 전에 찐씨는 내홍이 발생했다. 찐쑤언이 병변을 일으켜 동도(東都)를 불태우고, 찐뚱을 협박하여 청춘관(靑春館, 현재의 靑威縣)으로 거처를 옮기도록 했다. 찐뚱은 교자에 앉아서 탕롱을 탈출하였으나 오래지 않아 교자를 매고 가던 하인이 찐도의 지시를 따라 그를 버리자 찐뚱은 결국 길거리에서 병사했다. 찐도는 거짓으로 황제의 책봉을 받았다고 칭하며 찐쑤언을 속여 자신의 군영으로 오게 한 다음 그를 살해하였다. 찐도는 찐짱까지 유인하여 죽이려고 했으나 찐짱은 찐도의 음모를 모두 알아채고 청화로 달아났다. 찐짱은 레 신종을 끼고 찐도에 대항했고, 마침내 권력을 탈취했다.

빈또 5년 6월 20일(1623년 7월 17일), 찐뚱이 사망하니 향년 74세였다. 공화관정철왕(恭和寬正哲王)으로 존봉하였고, 시호를 예무(睿武)라고 하였다.

3. 묘호와 시호

푹타이 원년 10월 22일(1643년 12월 2일), 찐짱이 찐뚱의 묘호를 '성조'(成祖)[3]로 하였다. 찐 주의 왕들이 대대로 미자(美字)를 더하여

공화관정명철총현영의강단분무경문
광국위민웅재위략후공풍업위령현응
호국소우수록석윤면조연희계우홍훈
무공부용조모조무이전조적수유영명
고행후은현모광서무업집경모치조하
윤물수준헌천보혜략도공직집병부강
봉친법고진령람권숭희개경보통광천
계천출치가혜홍은조기영명악추어우
곽용분단식국어변총명용결신무웅단
정내녕외정직충후창업수통성덕무공
환무영모휘공신성심략굉모준공무덕
기명경광연모굉렬술사도공분위조우철왕
(恭和寬正明哲聰顯英毅剛斷奮武經文
匡國衛民雄才偉略厚功豐業威靈顯應
護國紹祐受祿錫胤綿祚延禧啟佑鴻勳
茂功敷勇造謀兆武貽典肇迹垂裕永命
高行厚恩顯謨光緒撫業集慶保治造夏
潤物垂準憲天普惠略韜公直執柄扶綱
奉親法古振令攬權崇熙開慶普通光天
繼天出治嘉惠洪恩肇基永命握樞御宇
廓容奮斷植國禦邊聰明勇決神武雄斷
靖內寧外正直忠厚創業垂統盛德茂功
桓武英謨徽恭神聖深略宏謨峻功茂德
基命耿光燕謀宏烈述事圖功奮威造宇哲王)으로 하였다.

4. 평가

동시기의 응우옌 주의 응우옌푹응우옌이 찐뚱을 평가하기를 "찐뚱은 군주를 없이 하였고, 찐쑤언은 부친이 없이 하였으니, '천도호환'(天道好還)이란 말이 믿어 속이지 않는다.(松無君,椿無父,天道好還,信不誣也.)"라고 했다.[4] 후세의 베트남인들은 찐뚱을 중국의 간웅 조조와 비교하여 찐뚱과 조조는 똑같이 '천자를 끼고 제후를 호령한'(挾天子以令諸侯, 협천자이영제후) 권신이었다고 했다.


[1] 자체 시호.[2] 후 레 왕조에게서 받은 시호.[3] 《越史續編》卷二十一 <神宗淵皇帝>:“(陽和)癸未九年(十月以後真宗福泰元年,明崇禎十五年)……冬十月十三日癸酉,命瓊岩公鄭棣捧誥,禪位於皇太子維祐,太子即位于勤政殿,時年十三。大赦,改元福泰。尊帝為太上皇,皇后鄭氏為皇太后,居德壽宮,加尊皇太后鄭氏為太皇太后。壬午,追尊太王廟號曰世祖,哲王廟號曰成祖。”[4] http://lib.nomfoundation.org/collection/1/volume/179/page/67 《大南寔錄》 <前編>·卷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