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장재순(張載淳) |
생몰 | 1916년 5월 10일 ~ 1985년 |
출생지 | 경상남도 울산군 대현면 용연리 (현재 울산시 북구 연암동) |
사망지 | 일본 가와사키시 |
추서 | 건국훈장 애족장 |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장재술은 1916년 5월 10일 경상남도 울산군 대현면 용연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6살 때 일본에 건너가 유학 생활을 했다. 그러던 1941년, 그는 ‘반전반협력조선인학생협회’란 비밀 조직에 가입해 학도병 징집 거부 운동을 전개했다가 1942년 일제 당국의 탄압을 피해 사할린으로 건너갔다. 1942년 11월, 그는 <화태신문(樺太新聞)>에 익명으로 조선징용노무자의 대우에 관한 논문(論文)을 발표했다가 일제 경찰에 피체되어, 1943년 6월에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화태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출옥 후 사할린 한국인의 귀환을 위해 헌신하기로 결심한 장재술은 일본 정부, 적십자사, 적십자국제위원회, 국제연합, 한국 정부에 끊임없이 탄원서를 보냈다. 또한 '옥문도-사할린에서 울고 있는 사람들'을 출판해 사할린에 강제 징용된 한국인들의 실상을 폭로했으며, <통일일보>에 24회에 걸쳐 기고문을 올려 일본 정부에게 이들을 한국으로 귀환시키는 데 협조해 달라고 거듭 호소했다. 그는 일본 정부와 일본인은 2차대전 후속 처리 문제는 이미 끝났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 자신이 살아 있는 한 엄격하게 규명하고 탄핵해 갈 것이라며 자신의 의지를 밝혔다.
그는 기고문에서 자신의 청춘을 앗아가버린 일본을 증오하는 걸 인정하면서도 이는 어쩌면 일본을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바람직한 한일 관계를 제시했다. 그는 오늘날 일본의 번영은 적어도 한국인의 피땀을 도외시하고는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을 일본인들은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 <통일일보>에 기고한 마지만 기고문의 말미에는 ‘사할린 동포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일본인이 진정으로 전쟁에서 빠져나오는 것이며 더 나아가 근대 일본인의 정신사적 치부를 바로 볼 수 있는 것이 되지 않겠는가’라는 문구를 달기도 했다.
한편, 장재술은 1974년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사'와 일제가 발간한 대외선전화보 '일본지 조선'을 합본 영인한 <일본 제국 한국 병합 침략 화보 사진사>을 출판했다. '일본지 조선'은 일본의 천황 명치와 합방 소서를 비롯하여 이왕실과 관중 행사, 당시의 명사급 인물·한국 각 지방의 명승 고적·산업·풍속에 이르기까지 희귀한 사진들을 수록했다. 장재술은 이 사진첩의 하단에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사에서 발췌한 문구를 넣음으로서 한민족의 독립운동사를 제일교포들에게 이해시키려 노력했다.
장재술은 1985년 일본 가와사키시에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장재술에게 대통령표창을 수여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