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1-10-12 21:15:16

장재술

파일:장재술.jpg
성명 장재순(張載淳)
생몰 1916년 5월 10일 ~ 1985년
출생지 경상남도 울산군 대현면 용연리
(현재 울산시 북구 연암동)
사망지 일본 가와사키시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장재술은 1916년 5월 10일 경상남도 울산군 대현면 용연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6살 때 일본에 건너가 유학 생활을 했다. 그러던 1941년, 그는 ‘반전반협력조선인학생협회’란 비밀 조직에 가입해 학도병 징집 거부 운동을 전개했다가 1942년 일제 당국의 탄압을 피해 사할린으로 건너갔다. 1942년 11월, 그는 <화태신문(樺太新聞)>에 익명으로 조선징용노무자의 대우에 관한 논문(論文)을 발표했다가 일제 경찰에 피체되어, 1943년 6월에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화태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사할린 한국인의 귀환을 위해 헌신하기로 결심한 장재술은 일본 정부, 적십자사, 적십자국제위원회, 국제연합, 한국 정부에 끊임없이 탄원서를 보냈다. 또한 '옥문도-사할린에서 울고 있는 사람들'을 출판해 사할린에 강제 징용된 한국인들의 실상을 폭로했으며, <통일일보>에 24회에 걸쳐 기고문을 올려 일본 정부에게 이들을 한국으로 귀환시키는 데 협조해 달라고 거듭 호소했다. 그는 일본 정부와 일본인은 2차대전 후속 처리 문제는 이미 끝났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 자신이 살아 있는 한 엄격하게 규명하고 탄핵해 갈 것이라며 자신의 의지를 밝혔다.

그는 기고문에서 자신의 청춘을 앗아가버린 일본을 증오하는 걸 인정하면서도 이는 어쩌면 일본을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바람직한 한일 관계를 제시했다. 그는 오늘날 일본의 번영은 적어도 한국인의 피땀을 도외시하고는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을 일본인들은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 <통일일보>에 기고한 마지만 기고문의 말미에는 ‘사할린 동포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일본인이 진정으로 전쟁에서 빠져나오는 것이며 더 나아가 근대 일본인의 정신사적 치부를 바로 볼 수 있는 것이 되지 않겠는가’라는 문구를 달기도 했다.

한편, 장재술은 1974년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사'와 일제가 발간한 대외선전화보 '일본지 조선'을 합본 영인한 <일본 제국 한국 병합 침략 화보 사진사>을 출판했다. '일본지 조선'은 일본의 천황 명치와 합방 소서를 비롯하여 이왕실과 관중 행사, 당시의 명사급 인물·한국 각 지방의 명승 고적·산업·풍속에 이르기까지 희귀한 사진들을 수록했다. 장재술은 이 사진첩의 하단에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사에서 발췌한 문구를 넣음으로서 한민족의 독립운동사를 제일교포들에게 이해시키려 노력했다.

장재술은 1985년 일본 가와사키시에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장재술에게 대통령표창을 수여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