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2-01-29 16:29:28

장영수(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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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장영수.jpg
성명 장영수(蔣英洙)
생몰 1909년 12월 3일 ~ 1969년 2월 11일
출생지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외공리
사망지 부산광역시
매장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장영수는 1909년 12월 3일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외공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32년 9월 13일 경남 의령군 대의보통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중 김두영(金斗榮)·정두명·이순의(李順義) 등 교사들과 함께 일제의 식민교육에 대항하기 위해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그는 산업별 노동조합의 결성이 독립 달성을 위한 기초로 판단하고, 뜻이 맞는 교원들과 힘을 합하여 교육노동협의회(敎育勞動協議會)를 결성하였으며, 동지 포섭에 힘을 쏟아 조직을 확대해 갔다. 그리하여 비밀결사의 성원은 30여 명에 달하였고, 이들은 교육 현장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민족의식 고취에 힘을 기울였다. 1933년 5월 22일에는 대의보통학교 학생 60명과 동민을 인솔하여 산 위에 올라 독립만세를 고창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일이 발각되면서 경찰에 체포된 그는 1934년 7월 5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 부산에서 조용히 지내다가 1969년 2월 11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장영수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09년에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