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1-10-12 21:10:01

장기영(1887)

파일:장기영(1887).jpg
<colbgcolor=#0047a0> 출생 1887년 5월 1일
경기도 가평군 하북면 화악리[1]
사망 1950년 3월 19일
경기도 가평군
이명 장기영(張基暎)·장기영(張基瑛)·장기영(張基映)
직업 독립운동가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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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장기영은 1887년 5월 1일 경기도 가평군 하북면(현 북면) 화악리의 양반가에서 장두환(張斗煥)의 아들로 태어났다.

고향에서 농업에 종사하던 그는, 1919년 3월 14일 기미독립선언서를 접수한 정흥교로부터 평소 뜻을 같이하던 이윤석(李胤錫), 정성교(鄭聖敎) 등의 20여 명의 동지들과 함께 독립선언서에 대해 듣고 만세시위에 대해 제의받았고, 이에 찬동하여 만세시위에 필요한 계획을 신속하게 세웠다. 이들은 우선 만세운동의 계획을 주민들에게 알리기 위하여 격문을 작성하였는데, 격문의 내용은 '세계만국공회에서 모든 속국은 독립하기로 되었다. 따라서 우리나라도 독립하게 되었다. 가평에서도 음력 2월 14일 아침 9시에 모든 사람이 집합하여 대한독립만세를 부르자'는 내용이었다. 이들은 격문을 인쇄하여 각처에 배부했다.

이윽고 3월 15일, 북면사무소에 집결한 이들은 수백명의 군중에게 태극기를 배포했고, 군중은 독립만세를 외치며 가평읍내로 향하여 군청 앞에서 시위했고, 각 학교와 면사무소로 행진했다. 이때 일본 경찰과 일본인 관리들이 제지하려 했지만 군중의 위세에 눌렸다. 그러던 중 일본 헌병대가 출동하여 시위군중에 총격을 가하며 위협함으로써 군중은 일단 해산하였는데, 이 때 이윤석·정흥룡 등 10여 명이 일본 헌병에 의해 체포되었다. 장기영은 체포된 동지들을 구출하고자 다음날 군중을 동원해 만세시위를 다시 전개했고, 2백명의 군중과 함께 가평 헌병분견소로 향했다. 이에 헌병대가 총격을 가하자, 장기영은 시위의 선두에서 대오를 정비하고 헌병들과 육탄전을 벌이다 체포되었다.

그는 이 일로 재판에 회부되었고, 1919년 7월 1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소요 및 공무집행방해·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상고했지만 그해 9월 25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었으며, 당일 서대문형무소에 입소하여 옥고를 치렀다. 1921년 3월 24일 만기 출옥#한 후에는 가평군에서 조용히 지내다가 1950년 3월 19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장기영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1]북면 화악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