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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강(후한)

張綱
(109~144)
1. 개요2. 생애

1. 개요

후한 말의 인물, 한순제 시절의 인물로 사공(司空) 장호의 아들이고 촉한의 장군인 장익의 증조부다. 정사 삼국지 촉서 장익전 속한서 주석에서 그 사적을 볼 수 있다. 자는 문기(文紀)로 익주 건위군 무양현 사람.

2. 생애

어려서 경학에 밝고 행동을 닦아, 효렴에 천거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사도에게 벽소[1]되어 이후 고제[2]로 시어사가 되었다.[3]한순제 한안(漢安)[4] 원년(141년)에 광록대부에 배임되었고, 시중(侍中) 두교(杜喬) 등 8명과 같은날 조를 받아 지절을 나눠 나아가 천하의 탐욕과 청렴을 순시해 묵수(墨綬)[5]로 죄있는 자를 즉시 잡아들이고, 자사 이천석[6]은 역(驛)으로 표문을 올려,[7] 감히 범하기 힘든 위엄과 은혜, 맑은 충정(威惠清忠)의 이름이 군국(郡國)에 떨치니 팔준(八儁)이라고 불렸다.

이 때, 대장군이자 외척 양기가 백성을 침입해 소요를 일으켰고, 두교(杜喬) 등 7인이 모두 명을 받들어 사방으로 나갔는데 오로지 장강만이 홀로 낙양의 도정(都亭)[8]에 수레바퀴를 묻어 멈춰 가지 않으며 일렀다
이리와 늑대가 길을 막았는데 어찌 여우에게 (죄를) 묻는가?

이에 글을 올려 일렀다.
대장군 양기, 하남윤(河南尹) 불의(不疑)는 외척(外戚)의 지원으로 속여 국가의 두터운 은혜를 받았음에도, 추요(芻蕘)[9]의 모습으로 안거(安居)하여 보호 양육되니, 오교(五教)를 널리 알려 전파하지 못하고, 일월(日月)을 보좌하지 못하니, 돼지를 봉(封)하고 뱀을 장(長)으로 삼는 전횡을 하여 탐욕하기를 만족할 줄 모르고, 좋은 물건을 좋아하며 멋대로 구는 것이 끝이 없으며, 여러차례 아첨을 심어 충량(忠良)을 해하니, 진실로 하늘의 위엄이 죄를 용서하지 않은 바 의당 사형을 더해야 합니다. 삼가 그 무군지심(無君之心)의 15가지 일을 왼쪽에 조항을 나누어 두니, 모두 충신(忠臣)들이 이를 가는 것입니다.

글이 상주되니, 수도(京師)가 떨리고 두려워했다. 이 때 양기의 여동생이 황후였는데 안에서 깊게 총애받아 양기 형제의 권력이 임금에 있으니, 순제(順帝)가 비록 장강의 말이 모함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도 양기를 다스릴 마음이 없었다. 당연히 양기는 깊게 장강을 원망했다.

이때 광릉(廣陵)의 도적 장영(張嬰)이 수만 명을 이끌고 자사(刺史) 이천석(二千石)을 살해했는데, 양기가 장강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글을 올려 장강을 광릉태수로 삼고, 소문을 퍼뜨리며 만약 장영을 죽이지 못하면 법으로 다스리려 하였다. 부임하는 태수마다 많은 병사를 요청했던 것과 다르게 장강만은 병마는 필요하지 않다고 대답하였고, 곧 관직에 임하여 홀로 수레를 타고 직접 장영이 있는 곳에 도착해 화복(禍福)을 보였다.

장영이 크게 놀라고 두려워하며 달아나 성문을 닫으려 하자, 문 밖에서 관리와 병사들을 물리고 심복 10여 명만 남긴 뒤, 믿을 만한 장로(長老)에게 편지를 써서 보내게 하여 만나기를 청하였다. 또 들고 일어나게 된 일이 무엇인지 묻고, 천자의 조령으로 내린 은혜(詔恩)을 보여주며, 장영을 초청하게 하였다. 이에 장강의 뜻을 확인한 장영이 바로 성밖으로 나와 장강을 맞이하였다. 장강이 상좌(上坐)를 설치하고, 그 괴로움을 물어보고는 예를 다하며 그를 타일렀다.
전후의 이천석은 대다수 그 사람이 아니니, 국은(國恩)을 막고 방종하여 사사로움을 구했소. 향군(鄉郡)이 멀어, 천자께서 아침 저녁을로 들을 수 없으므로, 백성들이 서로 모임으로써 해(害)를 피했소. 이천석 신이 죄가 있으니, 그 것은 의가 아닌 것이오. 충신은 군주를 속이지 않음으로 스스로 영광되게 만들고, 효자는 그 아버지를 손상시키지 않음으로서 복을 구한다 하오. 천자(天子)는 성인(聖人)이라, 문덕(文德)을 보내고자 하였고, 그리하여 태수(太守)를 시켜 이곳으로 보냈고, 천자는 작위와 녹봉으로 서로 영광되게 생각한 것일 뿐, 형벌은 원하지 않았셨소. 지금은 바야흐로 전화위복을 할 때입니다. 만약 의(義)를 듣고도 불복한다면, 천자께서 진노하시어 대병(大兵)을 구름같이 합치실테니 어찌 큰일이 아니겠소? 의당 깊이 그 이해(利害)를 생각해야 하오."

장영이 듣고는 울며 말했다.
변방의 어리석은 사람이 이천석에게 여러번 침해와 억울한 누명을 받아 곤란함을 참을 수 없었으므로, 서로 모여서 구차하게 살아 남으려 했던 것입니다. 명부(明府)의 어짐이 초목에까지 미치니 갱생(更生)의 은혜(澤)을 기다리겠으나, 다만 병기를 버렸다가 자손들까지 살해될까 두렵습니다."

장강이 다시 말했다.
어찌 그런 일이 있겠소? 천지(天地)에 약속하고 일월(日月)에 맹세하는 바가 작위(爵位)로서 보여지게 될 것인데 어찌 화(禍)가 있을 수 있겠소?

장영이 대답했다.
만약 죄를 용서 받는다면 모든 수령들은 농업(農畝)을 추구하며 평생 동안(沒齒) 은혜를 품고 덕을 받들 것입니다. 작록은 원하는 바가 아닙니다."

장영은 비록 큰 도적으로, 시작은 광폭하여 스스로 반드시 죽을 것이아 여겼으나, 장강의 말을 듣자 크게 깨닫고 고별하였다. 다음날 장영이 손을 등 뒤로 묶고 처자와 부하들을 이끌고 장강에게 항복해오자 장강이 전부 줄을 풀고 그들을 위무하였다.
경들이 하루 아침에 해산하여 변경에서(方垂) 외로울 터이니, 응당 조명(條名)을 올려, 반드시 봉상(封賞)을 받게 할 것이오.

장영이 말하길
다시 전처럼 돌아가 일을 할 것이며, 이름을 더럽히고 명시(明時)[10]를 오염시키길 원하지 않습니다.

장강이 그 지성으로 각기 그 의를 따르므로, 친히 살 집을 안배하였다. 관리가 되길 원하는 자는 재능에 따라 직을 임명하였고, 백성이 되길 원하는 자는 농상(農桑)을 권하여 전업(田業)이 아울러 풍부해지며 남주(南州)가 안정되었다.

그렇게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소란을 정리했지만 양기의 방해로 후에 봉해지지 못 하였다. 그러나 황제가 장영을 아름답게 여겨 불러들이려 하였고, 이에 장영 등이 글을 올려 군(郡)에서 2대(二歲)가 남기를 청하였다.

건강(建康) 원년(144년), 36세의[11] 나이로 병사하였다. 장영 등 3백여 명이 모두 최장(衰杖)을 들고 낙양까지 가서 장강의 상을 알렸고, 매장이 끝나자 무덤을 만들고 사당를 세워 제사를 지내기를 마치 부모를 모시는 것과 같이 하였다. 황제가 그를 추념하고 조를 내려 표창하고 그의 모든 아들들을 랑(郎)으로 배수했다.


[1] 사도의 속관으로 뽑혔다는 뜻이다.[2] 일종의 근무평가 우수자다.[3] 이전의 서술은 "사도(司徒)의 부름에 응하지 않고 시험을 통과함으로 시어사(侍御史)가 되었다."라고 되어 있었다. 이것은 촉서 「장익전」 배주에 수록된 『속한서』 원문을 '舉孝廉, 不就司徒辟, 以高第爲侍御史.'라고 끊은 것에서 비롯된 번역이다. 중화서국의 표점본 24사의 표점 역시 이와 같다. 반면 본문의 서술은 '舉孝廉不就, 司徒辟, 以高第爲侍御史.'라고 끊은 것에서 비롯된 서술이다. 문장상으로는 양쪽의 표점 모두 가능하다고 보이지만 내용이 판이하게 달라진다. 따라서 이 점은 『후한서』나 동시기 기록을 다루고 있는 다른 사료를 통해 다시 교차검증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4] 141년~144년.[5] 현령, 현령의 인수끈의 색이 검은색이었기에 이런 호칭이 생겼다.[6] 태수, 태수의 봉록이 이천석이다.[7] 현령은 지위가 그리 높지는 않지만 태수와 주자사는 상당한 고관이다. 지절을 받았다고는 해도 팔준의 권한이 그리 세지는 않았던 모양으로 태수와 같은 고관을 처벌하기 위해서는 황제에게 표를 통하여 보고해야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8] 도정역을 말한다. 한나라 역참체계의 중심이 되는 곳으로 당나라때까지도 가장 중요한 역 중에 하나였다.[9] 원래 소에게 먹이는 꼴과 땔나무, 또는 소를 먹이는 목동(牧童)과 꼴을 베는 나무꾼을 의미하기도 하며, 지위가 낮은 천한 사람을 비유하는 말로도 쓰인다.[10] 평화스러운 세상.[11] 『후한서』 「권56」에는 46세로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