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장 들롱 Jean d'Aulon | |
생몰년도 | 1390년 ~ 1458년 | |
출생지 | 가스코뉴 공국 페장삭 | |
사망지 | 프랑스 왕국 보케르 | |
아버지 | 아르노앙송 들롱 | |
아내 | 장 주브넬 데 우르생의 딸, 엘렌 드 몰레옹 | |
자녀 | 필리프, 마테유, 세실 | |
직위 | 왕실 경비대원, 고문, 메제르빌, 페이레피트쉬르, 벨레스타 영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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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왕국의 귀족, 군인. 백년전쟁 시기 샤를 7세의 경비대원과 고문을 역임했으며, 잔 다르크의 호위병으로서 여러 전장에서 활약했다.2. 생애
1390년경 가스코뉴 공국 페장삭의 기사였던 아르노앙송 들롱의 아들로 출생했다. 어머니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아울롱 출신 귀족 가문의 후손이었다. 1410년대 중반 앙주 공작 루이지 2세의 부인인 아라곤의 욜란다의 호위병으로 근무했고, 1416년 샤를 6세를 호위하는 왕실 경비대원 13인에 선정되었다. 샤를 6세가 사망한 뒤에는 샤를 7세의 고문이 되었으며, 1425년부터 1429년까지 푸아, 툴루즈, 몽타르지, 로슈, 기옌 등지에서 여러 분견대를 지휘했다. 그는 샤를 7세의 신임을 얻고 지혜와 충성심에서 타인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칭찬을 받았다.1429년 잔 다르크가 시농을 방문하여 샤를 7세로부터 군대를 이끌어 오를레앙 공방전에 참여하는 것을 허락받았다. 이후 그는 샤를 7세에 의해 잔 다르크의 호위병으로 지명되었다. 그는 오를레앙 공방전에서 잔 다르크를 호위해 그녀의 승리에 기여했으며, 루아르 원정, 파테 전투, 랭스 행진 등 여러 전장에서 그녀와 동행했다. 그는 훗날 잔 다르크의 복권 재판에서 자신이 그녀와 같은 천막에서 함께 살았고 그녀 옆에서 잠을 잤으며, 자신을 포함한 그녀의 모든 병사는 그녀가 아름다운 젊은 여성이라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그녀의 상처를 치료하거나 그녀가 옷을 입는 동안 때때로 그녀의 가슴과 다리를 보았지만, 그녀에 대한 성욕을 느끼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1429년 말 생피에르르무티에 공방전에 참여해 공략에 기여했지만 도중에 발꿈치를 부상당했다. 이후 콩피에뉴 공방전에 참여했다가 잔 다르크와 함께 부르고뉴군에 생포되었다. 이후 클레루아에 2년간 투옥되었다가 몸값 500 에퀴를 지불하고 풀려났다. 이후 샤를 7세의 근위병으로서 계속 봉사해 여러 전장에서 왕을 따랐고, 1438년 왕의 고문이자 왕실 청지기에 선임되었으며, 1445년 카르카손 항구의 관리인이 되었고, 1450년 국왕의 시종으로 승진했다. 샤를 7세는 그의 충성심을 높게 평가해 여러 칭호와 재산을 부여했다. 1428년 메제르빌, 페이레피트쉬르, 벨레스타 영주에 선임했고, 1438년 보케르와 님의 세네샬에 발탁했다. 1445년 카스텔노다리의 수비대장 겸 총독에 선임되었으며, 9년 뒤엔 피에르-카스텔노다리의 대장이자 총독이 되었다. 1450년 샤를 7세로부터 카우데발과 페이레페르투스의 영지를 수여받았다.
그는 1415년에서 1417년 사이에 파리 삼부회 의장 장 주브넬 데 우르생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딸과 결혼했고, 1420년대 중반에 아내가 사망한 후 엘렌 드 몰레옹이라는 여자와 재혼했다. 그는 두 아들 피에르, 마티유, 딸 세실을 낳았다. 1458년 보케르에서 사망했고, 장남 피에르가 페이레피트쉬르 영지를 물려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