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3-07 10:46:39

장 드 푸아

성명 장 드 푸아
Jean de Foix
생몰년도 1410년 ~ 1485년
출생지 가스코뉴 공국
사망지 프랑스 왕국 카스텔노드메독
아버지 가스통 1세 드 푸아그레일리
어머니 마르그리트 달브레
누이 이자보, 아녜스
아내 마가렛 커데스톤
자녀 가스통, 장, 카트린, 마르그리트
직위 켄달 백작, 루시용 총독

1. 개요2. 생애3. 가족

1. 개요

잉글랜드 왕국에 귀속된 가스코뉴 공국의 귀족, 군인. 아버지와 함께 잉글랜드 왕국에 충성을 바치면서 프랑스 왕국에 항전했지만, 카스티용 전투에서 패배한 뒤 7년간 구금되었다가 잉글랜드로 넘어갔지만, 거기서도 장미 전쟁에 휘말려 고초를 겪었다.

2. 생애

1410년경 부흐의 카프탈(Captal, 특정한 주의 최고 영주)이자 카스티용 자작, 그레일리의 영주를 맡고 있던 가스통 1세 드 푸아그레일리와 알브레 영주 아르노 아마니외 달브레의 딸인 마르그리트의 외아들로 출생했다. 누이로 이자보[1], 아녜스[2]가 있었다. 1445년 가터 기사단의 기사가 되었으며, 보르도 시의 방어를 강화하고 가스코뉴 영토를 지키는 데 힘을 기울였다. 1451년 프랑스군이 가스코뉴를 휩쓸었을 때 일시적으로 복종했지만, 1452년 10월 존 탈보트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가스코뉴에 상륙하자 즉각 호응해, 가스코뉴 서부 대부분이 잉글랜드 쪽으로 돌아서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1453년 7월 17일 카스티용 전투에 참가했다가 참패를 면치 못하고 생포되었다. 이후 타유부르 성에 이송되었고, 기옌의 세네샬인 올리비에 드 코에티비의 포로가 되었다. 1460년 1월 18일, 장은 23,850 에쿠스를 지불하겠다고 약속하고 석방된 뒤 잉글랜드로 갔다. 이후 잉글랜드 왕실에 의해 켄달 백작에 선임되었지만, 1460년 7월 10일 노샘프턴 전투에서 랭커스터 왕조를 추종했다가 체포된 뒤 런던 탑에 구금되었다가 워릭 백작인 '킹메이커' 리처드 네빌의 구금에 맡겨져 프랑스로 돌아갔다.

1461년 7월 샤를 7세가 사망하고 루이 11세가 프랑스의 새 국왕이 되었다. 이때 그는 여전히 올리비에에게 18,000에쿠스의 빚을 지고 있었지만, 루이 11세는 올리비에에게 이 빚을 탕감하도록 강요했다. 이후 루이 11세의 봉신이 되었으며, 1463년 6월 14일 루이 11세에게 갓 복속된 루시용의 초대 총독에 선임되었다. 1485년경 카스텔노드메독에서 사망했다. 그의 후손들은 이후로도 18세기까지 켄달 백작위를 이어갔다.

3. 가족

  • 마가렛 커데스턴(1425 ~ 1485): 기사 토머스 커데스턴과 제2대 서퍽 백작 마이클 드 라 폴의 딸인 엘리자베스의 딸.
    • 가스통 드 푸아(1448 ~ 1500): 켄달 백작. 나바라 여왕 레오노르 1세의 딸 카트린과 결혼하여 3남 1녀를 낳았는데 고명딸 푸아켄달의 안은 헝가리 국왕 울라슬로 2세의 세번째 왕비이자 보헤미아와 헝가리의 언너, 러요시 2세의 어머니다.
    • 장 드 푸아켄달(? ~ 1521): 아라곤 왕국 내 마엘라 자작.
    • 카트린 드 푸아켄달(? ~ 1510): 아르마냐크와 로데츠 백작 샤를 1세 다르마냐크의 부인.
    • 마르그리트 드 푸아켄달(1473 ~ 1536): 살루초 후작 루도비코 2세 델 바스토의 부인.


[1] 튀렌 자작 르노 6세 드 폰스와 초혼, 산티스테반 백작 피에르 드 페랄타와 재혼.[2] 페이 포통 드 라멘산의 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