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장 드 푸아 Jean de Foix | |
생몰년도 | 1410년 ~ 1485년 | |
출생지 | 가스코뉴 공국 | |
사망지 | 프랑스 왕국 카스텔노드메독 | |
아버지 | 가스통 1세 드 푸아그레일리 | |
어머니 | 마르그리트 달브레 | |
누이 | 이자보, 아녜스 | |
아내 | 마가렛 커데스톤 | |
자녀 | 가스통, 장, 카트린, 마르그리트 | |
직위 | 켄달 백작, 루시용 총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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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에 귀속된 가스코뉴 공국의 귀족, 군인. 아버지와 함께 잉글랜드 왕국에 충성을 바치면서 프랑스 왕국에 항전했지만, 카스티용 전투에서 패배한 뒤 7년간 구금되었다가 잉글랜드로 넘어갔지만, 거기서도 장미 전쟁에 휘말려 고초를 겪었다.2. 생애
1410년경 부흐의 카프탈(Captal, 특정한 주의 최고 영주)이자 카스티용 자작, 그레일리의 영주를 맡고 있던 가스통 1세 드 푸아그레일리와 알브레 영주 아르노 아마니외 달브레의 딸인 마르그리트의 외아들로 출생했다. 누이로 이자보[1], 아녜스[2]가 있었다. 1445년 가터 기사단의 기사가 되었으며, 보르도 시의 방어를 강화하고 가스코뉴 영토를 지키는 데 힘을 기울였다. 1451년 프랑스군이 가스코뉴를 휩쓸었을 때 일시적으로 복종했지만, 1452년 10월 존 탈보트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가스코뉴에 상륙하자 즉각 호응해, 가스코뉴 서부 대부분이 잉글랜드 쪽으로 돌아서는 데 기여했다.그러나 1453년 7월 17일 카스티용 전투에 참가했다가 참패를 면치 못하고 생포되었다. 이후 타유부르 성에 이송되었고, 기옌의 세네샬인 올리비에 드 코에티비의 포로가 되었다. 1460년 1월 18일, 장은 23,850 에쿠스를 지불하겠다고 약속하고 석방된 뒤 잉글랜드로 갔다. 이후 잉글랜드 왕실에 의해 켄달 백작에 선임되었지만, 1460년 7월 10일 노샘프턴 전투에서 랭커스터 왕조를 추종했다가 체포된 뒤 런던 탑에 구금되었다가 워릭 백작인 '킹메이커' 리처드 네빌의 구금에 맡겨져 프랑스로 돌아갔다.
1461년 7월 샤를 7세가 사망하고 루이 11세가 프랑스의 새 국왕이 되었다. 이때 그는 여전히 올리비에에게 18,000에쿠스의 빚을 지고 있었지만, 루이 11세는 올리비에에게 이 빚을 탕감하도록 강요했다. 이후 루이 11세의 봉신이 되었으며, 1463년 6월 14일 루이 11세에게 갓 복속된 루시용의 초대 총독에 선임되었다. 1485년경 카스텔노드메독에서 사망했다. 그의 후손들은 이후로도 18세기까지 켄달 백작위를 이어갔다.
3. 가족
- 마가렛 커데스턴(1425 ~ 1485): 기사 토머스 커데스턴과 제2대 서퍽 백작 마이클 드 라 폴의 딸인 엘리자베스의 딸.
- 가스통 드 푸아(1448 ~ 1500): 켄달 백작. 보헤미아와 헝가리-크로아티아의 왕이었던 울라슬로 2세의 왕비인 푸아켄달의 안의 아버지이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1세의 아내인 보헤미아와 헝가리의 언너의 외조부이다.
- 장 드 푸아켄달(? ~ 1521): 아라곤 왕국 내 마엘라 자작.
- 카트린 드 푸아켄달(? ~ 1510): 아르마냐크와 로데츠 백작 샤를 1세 다르마냐크의 부인.
- 마르그리트 드 푸아켄달(1473 ~ 1536): 살루초 후작 루도비코 2세 델 바스토의 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