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0-18 07:32:07

자바 모음곡


이하 모든 연주자 : Esther Budiardjo

1. 개요2. 배경3. 1부
3.1. #1. Gamelan (가믈란)3.2. #2. Wayang-Purwa: Puppet Shadow Plays (와양 푸르와: 그림자 인형극)3.3. #3. Hari Besaar, The Great Day (하리 브사르: 멋진 날)
4. 2부
4.1. #4. Chattering Monkeys at the Sacred Lake of Wendit (원딧의 성스러운 호수에서 재잘거리는 원숭이들)4.2. #5. Boro Budur in Moonlight (달빛 속의 보로부두르)4.3. #6. The Bromo Volcano and the Sand Sea at Daybreak (브로모 화산과 새벽의 모래 바다)
5. 3부
5.1. #7. 3 Dances (3개의 무곡)
5.1.1. #7-1. Moderato (보통 빠르기로)5.1.2. #7-2. L'istesso tempo (앞곡과 똑같은 빠르기로)5.1.3. #7-3. Doppio movimento (두 배 빠르기로)
5.2. #8. The Gardens of Buitenzorg (바위턴조르흐 식물원)5.3. #9. In the Streets of Old Batavia (오래된 바타비아의 거리에서)
6. 4부
6.1. #10. In the Kraton (크라톤에서)6.2. #11. The Ruined Water Castle at Djokja (족자의 폐허가 된 물의 궁전)6.3. #12. A Court Pageant in Solo (솔로에서의 궁전 가장 행렬)

1. 개요

레오폴드 고도프스키가 1923년 2월부터 4주간에 걸친 인도네시아자바섬 연주 여행 과정에서 느낀 인상을 피아노로 담아낸 모음곡집으로, "포노라마(Phonoramas)[1] - 피아노를 위한 음색 여행"이 부제로 붙어있다. 작곡 기간은 1924~25년이며, 1925년 뉴욕에서 출판한 후 친구 J. Campbell Phillips에게 헌정하였다.

고도프스키 특유의 다성음악적이고 대위적인 기법을 통해 자바의 가믈란(Gamelan) 음색을 피아노로 느낄 수 있는 곡집으로서, 간단히 말하자면 곡 전체적으로 동양의 음색이 물씬 풍기는 것이 특징이다. 모든 곡에서 한 손이 반드시 2개 이상의 성부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난이도는 몇몇 곡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고도프스키의 곡답게 만만치 않다.

낮은 인지도와 상당한 난이도만큼 레코딩이 많이 없는 편인데 인도네시아의 피아니스트 에스더(Esther Budiardjo)의 음반이 가장 퀄리티가 좋은 편이다.

2. 배경

머릿말
아름다움을 찾기 위해 전세계를 돌아다닌다 해도 자신의 것을 지니고 있지 않으면 찾을 수 없다 - R. W. 에머슨

가깝고 친숙한 곳부터 멀고 낯선 곳까지 많은 땅을 광범위하게 여행하면서, 볼 수 있어 영광이었던 흥미로웠던 것들 중 몇몇의 음악적인 초상화와, 그 흥미로운 것들이 불러일으킨 인상과 감정의 음색적인 묘사가 떠올랐다. 그러한 여행은 모험과 운치에 마음이 끌리는 사람들과, 그들의 시적인 반응에 영감을 얻는 사람들의 흥미를 자극시키곤 한다.
내심 세계 여행가가 아닌 사람이 어디 있는가?
우리 모두가 먼 나라와 낯선 사람들에게 매력을 느끼지 않는 건 아니지 않은가?
그러자 마음 한 켠에서 나의 유랑 체험을 재현하고자 하는 생각이 점점 또렷해졌다.
전체를 통틀어서 ‘포노라마(Phonorama)’라고 스스로 명명한 이 음악 여행기―음색 여행― 전집은 자바섬에서 본 일련의 묘사적인 장면 12개로 시작하며, 각 곡마다 짧은 설명을 서문으로 남겨놓았다.
거의 4천만 인구에 달하는 자바섬은 ‘동양의 정원’이라고도 불리며, 세계에서 가장 밀집도가 높은 섬이다. 무성한 열대 식물, 신기한 경치와 그림 같은 주민들, 거대한 활화산과 사화산, 수세기 이전의 장엄한 유적과 인상적인 건축물을 볼 수 있다.
자바 섬사람들은 유순한 사람들이며 진기한 풍습과 옛 전통을 갖고 있다. 고대 문화를 유지하면서도 예술의 다양한 방면에서 그들 고유의 것이 잘 녹아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자바 중심부에 위치한 족자(Djokja)솔로(Solo)에서 본 자바의 고유 음악이 내게 가장 깊은 인상을 남겼다.
모든 자바 음악은 2박자이거나 4박자이며, 3박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음악의 리듬에서 보이는 동일성과 맥(脈)의 단조로움은 어르는 듯하면서 최면에 걸리는 듯한 효과가 있고, 폴리리듬, 당김음, 셋잇단 음형 및 여러 가지 악절 패턴들은 흥미를 한층 더 자극시킨다. 대부분의 자바 음악은 5음 음계를 바탕으로 짜여있다.
이 모음곡집의 12개 곡에 대하여, 모든 곡은 2박자이거나 4박자이며[2], ‘3개의 무곡’ 중 전자 2개, ‘크라톤에서’ 및 ‘솔로에서의 궁전 가장 행렬’은 완전히 온음계이다. ‘가믈란’, ‘와양 푸르와’, ‘하리 브사르’ 및 ‘재잘거리는 원숭이들’은 주로 온음계이지만 일관적이진 않다. 나머지 ‘보로부두르’, ‘브로모 화산’, ‘3개의 무곡’ 중 마지막 곡, ‘바위턴조르흐의 식물원’, ‘오래된 바타비아의 거리에서’ 및 ‘족자의 폐허가 된 물의 궁전’은 반음계가 상당히 가미되어있다.
본 모음곡 중에서 몇몇 혹은 곡의 일부는 내 개인적인 인상을 내가 이해한대로, 내가 알고 있는 음악 용어로 표현한 것일 뿐, 제3번 ‘하리 브사르’를 제외한 어느 곡에서도 실제 자바의 곡조, 구상 또는 화음을 차용하거나 모방하지 않았음을 밝힌다. 이하 ‘하리 브사르’에 이용한 실제 자바의 멜로디 중 일부를 소개하고자 한다. 하나는 크라위탄(Krawitan)[3]
파일:krawitan.png
이며, 다른 하나는 칸윳(Kanjut)[4]
파일:kanjut.png
이다. 이와 더불어 자바 음악에 대해 귀중한 정보를 알려주신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현으로써, 반둥(Bandung) 지역에 사는 파울 셀리흐(Paul Seelig)[5]의 작품 ‘오케스트라를 위한 자바 광시곡(Javanese Rhapsody for Orchestra)’의 두 마디를 기꺼이 차용했음을 밝힌다.
파일:javanese_rhapsody_for_orchestra.png
- 레도폴드 고도프스키
- 1925. 5. 27, 뉴욕에서
여행 과정에서 느낀 인상이나 그 전경을 음악으로 남긴다는 콘셉트, 12개의 곡집이 4개의 파트로 나뉘어있고 각 파트는 빠르고 강렬한 인상의 곡으로 마무리 된다는 점에서 알베니스의 이베리아와 자주 비교되곤 하는데, 이베리아가 먼저 출판(1905~1908)되기도 했고 이 곡집을 작곡하기 전에 이미 알베니스의 '탱고'와 '트리아나'에 대한 편곡을 남기기도 했다는 점을 보면, 이베리아로부터 영향을 크게 받았음을 유추할 수 있다.

아무런 정보도 없이 자바를 한 달이나 여행하기로 계획하고 갔던 것은 아니고, 그냥 여기저기 여행을 잘 다녔다. 한창 연주 여행을 다녔을 때는 자신이 모르는 세계에 대한 탐험 정신이 왕성해서 1921년부터 1925년 동안 호주 대륙을 제외한 모든 대륙에 발을 다 들여봤다고 할 정도로 광범위하게 돌아다녔다. 동아시아는 1922년 10월 13일부터 7개월에 걸쳐 여행했는데, 일본, 중국, 싱가폴,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의 여러 곳을 돌며 각 도시에서 느낀 것을 자기 가족에게 편지로 보내곤 했다. 그 중 그에게 가장 이국적(exotic)인 곳이 인도네시아의 자바였으며, 얼마나 인상적이었으면 자바 민속 음악의 멜로디를 빌리지 않고 본인이 이해하고 본인의 음악만으로 작곡하기로 했던 그의 원칙을 깬 곡(제3번 하리 브사르)마저 있다.

악보 전반부에 무려 14페이지[6]에 걸쳐 각 곡에 대한 작곡자 본인의 설명[7]이 담겨 있으니 영어가 된다면 감상 전에 한 번 읽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이와 함께 '레오폴드 고도프스키의 《자바 모음곡》에 대한 안내서(A. Jasmin, 2013)'[8]도 곡 감상에 대한 배경 지식을 얻는 데에 참고할 만하다.

3. 1부

3.1. #1. Gamelan (가믈란)

가믈란은 자바 섬의 토속 악기들로 연주되는 고유 음악이다. 그 음악의 합주단은 이국적인 오케스트라 같으며, 주로 다양한 모양과 구성을 갖춘 금속제, 목제 및 죽제(竹製) 타악기들로 이루어져 있고, 종류와 크기가 다양한 벨, 차임, 징, 공명판, 볼(bowl), 팬(pan), 북(맥주통처럼 생긴), 탐탐, 실로폰, 낭랑한 알랑알랑(alang-alang; 제피르(zephyr), 에올리언 하프 같은 것) 등 기타 독특한 음악 도구가 포함되어있다. 내가 알아볼 수 있었던 유일한 현악기는 원시 기타 모양의 르밥(rebab)이었는데, 합주단의 리더가 연주하며 류트 연주자와 비슷한 역할을 한다.
중부 자바의 옛 왕국 중 솔로(Solo) 지역의 군주 수수후난(Susuhunan)과 왕자 망쿠느가라(Mangkunegara), 족자(Djokja) 지역의 군주 술탄(Sultan)과 왕자 파쿠알람(Pakualam)이 가장 뛰어나고 규모가 큰, 완전체의 전통 오케스트라(가믈란)를 갖고 있었다. 그들은 더없이 귀중한 옛 악기들을 갖고 있었고, 그 고혹적인 울림은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무르익어온 것이었다.
가믈란의 울림은 참으로 기묘하고 기괴하면서 환상적이고도 황홀했고, 자바 고유의 음악은 너무나도 갈피를 잡을 수 없었고 모호하며 아른거리고 특이했기에, 이 새로운 소리의 세계를 듣고 있노라면 나 자신으로 하여금 현실감을 상실한 채 마법의 나라에 빠진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자바에서 보고 경험했던 것들 중 섬과 섬 주민들의 불가사의하고 기이한 개성을 이만큼 강렬하게 전달했던 것은 없었다.
가믈란은 특히 멀리서 들었을 때 황홀감에 사로잡히게 만드는 천상의 피아니시모를 만들어낸다. 마치 소리의 향기, 음악의 산들바람처럼 다가온다. 보통 매우 부드럽고 노곤하게 시작하는 그 음악은 곡이 진행됨에 따라 점점 빨라지고 소리가 커져, 마침내 야만적인 절정에 도달한다.
나는 이 묘사적인 장면의 서막에 전형적인 자바 분위기의 가믈란 울림을 재현하기 위해 노고를 아끼지 않았다. 의도적으로 서양 분위기를 내기 위해 도입한 반음계적인 변주(9~10페이지[9])를 제외하고, 곡은 거의 전적으로 온음계 구성이며 단언컨대 동양(극동 지역)적이다.

기본적으로 레-미-솔-라-시의 5음 음계[10][11]이며 완전 4도 구성으로 시종일관 등장한다. 금속제 타악기의 째지는 소리를 연출하기 위해 중간 중간 장2도 화음을 도입한 점도 눈여겨볼만 하다. 위 영상 기준 1:20부터 서서히 빨라지고 커지면서 오케스트라의 투티(tutti)와 같은 분위기로 전환되는데, 이 부분부터 왼손에 '라·미·라·미·솔·레도라라라·……'의 주제가 대위적인 선율로 변주를 거듭하면서 초반의 잔잔한 분위기로 돌아올 때까지 계속 등장한다. 이와 동시에 2마디 단위로 반주처럼 등장하는 오른손의 '미·솔·미·레·미·레·라·레·' 역시 주제와 함께 계속 따라다닌다.

3.2. #2. Wayang-Purwa: Puppet Shadow Plays (와양 푸르와: 그림자 인형극)

자바의 준연극적인 연출이 특징적인 이 오락거리는 유구한 역사가 있고, 축제 때 선보여지며 매우 대중적이다. 이 인형극은 자바인들의 과거 역사상 중요한 것들, 이를테면 그들의 희망, 염원, 국민의 단결과 같은 것들을 상징적으로 담아낸다. 가믈란의 은은한 반주에 맞춰, 달랑(dalang)―감독, 배우, 악기, 노래, 낭송 및 즉흥시를 모두 하는 사람―이 고전 힌두의 서사시나 그것의 현대화, 현지화된 버전, 신화나 역사적인 이야기, 동인도의 전설 등을 낭송하고, 이와 함께 괴이하고 납작한 가죽 인형들의 그림자가 흰 화면 너머로 비춰지며 낭송자의 이야기를 해석하고 보여준다. 이들 인형들은 대나무 막대기가 달려있고 달랑은 이것을 이용해서 조종한다. 와양 푸르와는 '펀치와 주디(Punch and Judy)' 인형극과 중국의 그림자극을 합친 것과도 같다.

3.3. #3. Hari Besaar, The Great Day (하리 브사르: 멋진 날[12])

케르메스(Kermess)―지역 축제―가 왔다
농장과 촌락에서 주민들이 도시로 몰려와 그야말로 밝고 기쁨이 넘치는 축제의 장이 되며 순진하고 천진난만한 놀이가 펼쳐진다.
그들은 흥분과 활기를 즐기며 잇따른 축제 행사에 열렬히 몸을 던진다.
배우들, 악사들, 댄서들과 고행자(fakir)들이 사람들의 기쁨과 그 현장의 운치를 만들어내는 데에 일조한다.
멋진 날이다―하리 브사르!(Hari Besaar!)

파울 셀리흐의 주제는 위 영상 기준 0:33[13], 0:44에 등장하고, 전반부는 이 멜로디의 변주로 구성되어있다. 전주가 끝나고 나면(위 영상 기준 1:29부터) 자바 고유의 멜로디인 크라위탄이 제1주제로 등장하고, 이 주제가 오른손에서 두 번 반복되고 나면 왼손의 저음으로 옮겨가면서 두 번째 주제 칸윳이 오른손에 대위적으로 끼어들면서 제시된다. 이 두 주제는 중간 중간 간주적인 파트와 재현을 반복하면서 발전을 거쳐 곡이 끝날 때까지 이어진다.

4. 2부

4.1. #4. Chattering Monkeys at the Sacred Lake of Wendit (원딧의 성스러운 호수에서 재잘거리는 원숭이들)

원디트의 성스러운 호수는 매력적인 작은 도시 말랑(Malang)에서 수 km 떨어진 곳에 있다. 우리는 호수 근처의 숲에서, 자바의 숲에 사는 원주민인 많은 원숭이 무리들 중 한 무리에 끼어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들은 그들의 부족적인 삶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친근한 눈빛을 즐기고 있다. 사방 팔방이 쫑알대는 원숭이들로 가득하고, 수백 마리의 떼가 이 나무 저 나무로 옮겨다니거나 나무 줄기와 나뭇가지를 오르락내리락 하며, 한편으로 길거리에 좀 더 가까이 있는 다른 무리들은 간헐적으로 작은 호텔이나 목욕탕 지붕을 뛰어 오르내리며 관광객들의 바나나를 가로채곤 한다.
그 광경은 익살, 재미 그리고 활기로 가득하다.

4.2. #5. Boro Budur in Moonlight (달빛 속의 보로부두르)

족자(Djokja)에서 약 50 km 떨어진 자바 중심부의 성스러운 언덕에, 현존하는 것들 중 가장 인상적이고 거대한 불교 기념물의 어마어마한 유적이 우뚝 서있다. 그것은 바로 ‘수많은 부처의 성지’라 불리며 세계적으로 유명한 보로부두르 사원이다. 피곤해진 여행가가 아무리 싫증이 났다 한들, 거대한 석조와 수백 개의 부처 조각상, 그림, 얕은 양각들에 동요하지 않고 당황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 놀라운 규모와 믿기지 않는 솜씨는 오감을 황홀하게 만들며, 그 구상의 고상함, 상상력의 풍부함은 구경꾼으로 하여금 전율을 느끼게 한다.

───── ✣ ─────

보로부두르는 달빛을 받았을 때가 가장 환상적이다. 묘하고 으스스하며 음침한 분위기가 온 공간으로 스며든다. 깊은 침묵과 이상한 기분, 그리고 다른 세계에 있는 듯한 느낌은 그야말로 황량한 인상을 자아내며, 불가피한 쇠퇴와 세속적인 모든 것의 소멸, 불멸을 갈망하는 인류의 절망적인 분투에 대한 허무함을 고무시킨다.

4.3. #6. The Bromo Volcano and the Sand Sea at Daybreak (브로모 화산과 새벽의 모래 바다)

자바의 산악 휴양지로 가장 유명한 토사리(Tosari)에서 모래 바다[14]에 다다르자, 세계에서 가장 광대할지도 모르는 원형 경기장 같은 광경이 펼쳐졌다. 우리는 그 모래로 된 바다를 건너 새벽에 브로모 화산의 분화구에 도착했다.
그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전경은 섬뜩할 정도로 거대하고 초월적으로 장엄한데, 경이로운 일출이 그 분위기를 한층 고조시켰다. 한없이 깊은 곳에서 요동치며 증기를 뿜어대고 팔팔 끓어올라 으르렁거리며 천둥이 치는 듯한 지하 세계의 기세와, 지평면으로 서서히 위협적으로 퍼져나가는 유황[15] 증기와 짙은 구름이 단테의 지옥의 한 장면을 연상케 했다. 그리고 그것은 대격변을 일으키는 화산 활동과 땅속에서 끝없이 타오르는 불길이 살아있는 모든 것을 위협한다는 사실을 실감나게 했다.
모든 인류 제도의 나약함에 대한 끔찍한 생각은 너무나 압도적이었다.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16]……

───── ✣ ─────

그 때, 눈부신 빛을 비추며 모든 공포와 어둠을 불식시키는 밝은 햇빛이 참담한 허무감을 황홀한 개선가로 바꾸어놓았다. 그런 근본적인 힘이 존재한다는 의식만으로도 삶의 고통은 완화되었다. 압도적으로 겸허해지는 감정과, 살아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동정 그리고 다정함, 모든 의식에 대한 미지의 근원을 향한 열렬한 숭배가 영혼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우리는 돌아왔다……..

5. 3부

5.1. #7. 3 Dances (3개의 무곡)

자바 사람들처럼 자신의 가장 내밀한 감정을 그들의 춤으로 아주 완전히 다 드러내는 사람들이 세상 어딘가에 또 있을지는 모르겠다.
또한 종교적이든 세속적이든, 호전적이든 평화적이든, 고상하든 관능적이든 그들의 춤은 항상 아름답다.
‘3개의 무곡’ 중 첫 번째 곡은 극동 지역의 음울함과 비애를, 두 번째 곡은 동양 무용수들의 품위와 매력을, 세 번째 곡은 우아함과 다정함을 각각 서양 음악 양식으로 번역해서 표현한 것이다.

5.1.1. #7-1. Moderato (보통 빠르기로)


5.1.2. #7-2. L'istesso tempo (앞곡과 똑같은 빠르기로)


5.1.3. #7-3. Doppio movimento (두 배 빠르기로)


5.2. #8. The Gardens of Buitenzorg (바위턴조르흐 식물원)

‘무사태평’을 의미하며 'Boy-ten-sorg'라 발음[17]하는 바위턴조르흐[18]는 자바의 국가 수도인 바타비아[19]에서 64 km 떨어진 곳에 있으며,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 총독의 저택이 있는 곳이다. 그의 널따란 대저택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식물원의 일부를 구성하는 큰 공원에 위치해있다.
열대 목본, 초본, 화초들의 최상급 컬렉션을 우리 지구의 이 먼 외딴 정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낯선 원예 세계의 풍부함, 풍성함, 장엄함과 아름다움은 독보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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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로운 플루메리아, 흰 월하향(말레이 사람들은 ‘밤의 미녀’라고 부른다) 그리고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많은 수의 기타 은은한 향기를 내는 꽃들이 감각을 마비시킨다.
묵직한 향기로 가득해진 공기가 미지의 세계, 다가갈 수 없는 이상(理想), 돌이킬 수 없이 떠나버린 과거의 사건들―시간의 바다가 점차 잠겨 끝내 망각 속에 묻혀버린 그런 기억들에 대해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깊고 고통스러운 열망을 불러일으킨다.

왜 어떤 향기들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후회와 만족할 줄 모르는 갈망, 설명하기 힘든 욕망을 만들어내는 것일까?

5.3. #9. In the Streets of Old Batavia (오래된 바타비아의 거리에서)

바타비아[20] 저지대의 오래된 거리를 산책하는 것은 신나는 경험이다. 바닷가 근처를 거닐며, 사람들로 붐비는 시장 거리와 번화하고 좁은 골목, 비바람을 견뎌낸 네덜란드식 건물을 따라 벽돌 수로로 가로질러진 수많은 곳을 지나, 이국적인 사람들을 만난다. 그들은 주로 중국인, 아랍인, 자바인과 기타 아시아인들이고 네덜란드인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유럽인들이 드문드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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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없는 중국인 거리를 거닐다 보면 아랍인들의 정착지가 있는 조용하고 명상적인 외딴 곳에 도달한다. 또 다른 곳으로 발길을 돌리면 자바인들의 거리가 나타난다. 그리고 시장 거리에 도착하면, 만화경 같고 다채로운 사람들의 복합체가 세계 여행 전문가라 자부하는 사람마저 당혹스럽게 만든다.

6. 4부

6.1. #10. In the Kraton (크라톤에서)

속칭 솔로(Solo)라 불리는 수라카르타(Surakarta)와, 흔히 족자(Djokja)라 불리는 욕야카르타(Djokjakarta)는 자바에서 가장 중요하고 흥미로운 고유의 도시이다.
가장 위대한 군주 수수후난(Susuhunan)은 솔로 지역에 거주한 한편, 그 다음으로 중요한 족자의 술탄은 마지막 유명 수도에서 살았다. 각 수도 중심지에는 크라톤(Kraton)이라 불린 광대한 담이 있는데, 군주는 그곳에 그의 궁전을 짓고 술탄 뿐만 아니라 술타나(Sultana)[21]와 왕자 및 공주, 수많은 첩, 노예와 하인, 궁정 직원, 귀족, 음악가, 배우, 무용수, 일꾼, 상인 그리고 정의하기 힘든 직업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살았다. 각 크라톤에는 10,000~15,000명에 달하는 인구가 있었고, 그 전체가 큰 궁전의 구성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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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이 되었다. 진기한 장면이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넋을 빼앗는 가믈란의 희미한 소리가 향긋한 공기를 가득 채운다. 겉보기엔 비현실적인 현실이 우리의 의식에 완전히 최면 주문을 걸어 놓는다.
서서히 사그라지는 그 모든 순간에 시적 감흥이 있다.
동양의 저녁이다……

6.2. #11. The Ruined Water Castle at Djokja (족자의 폐허가 된 물의 궁전)

족자(Djokja)의 크라톤(Kraton) 근처에는, 한때 찬란했던 물의 궁전이 버려지고 쇠퇴되어 케케묵고 부스러져가는 유적으로 남아있다. 졸졸 흐르는 분수와 사방으로 물이 튀는 작은 폭포, 물장난과 공기를 가득 메우는 이국적인 꽃들의 향기와 함께.
한때는 유쾌했던 곳, 여기는 이제 사라진 나날의 미스터리와 로맨스, 덧없는 쾌락의 슬픔이 되었다.
분수와 작은 폭포가 지난날의 기억들을 속삭인다―과거의 기쁨에 대한 동경, 세상을 떠난 연인에 대한 애도를……

6.3. #12. A Court Pageant in Solo (솔로에서의 궁전 가장 행렬)

두 왕국 수도 중 한 곳에서 축제 혹은 궁전 행사 때 볼 수 있는 왕실 행진의 장관과 거창함 그리고 현란함은 휘황찬란하면서 기이한 볼거리를 만들어낸다. 자바인들의 윤택함과 자유분방함, 자바 고유 리듬의 힘과 매력이 그 장면의 묘사 욕구를 자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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댕댕거리고 쨍그랑거리는 행진이 행사의 시작을 알린다. 이 엔딩곡의 중간 파트(올림 바 단조)에 강렬하게 강조된 것은 동양의 음악에 항상 존재하는 슬픈 선율이다. 신나는 분위기가 푸가토(Fugato)[22]와 함께 다시 시작되고, 이내 야만적인 행진의 강화된 버전으로 되돌아간다.
그리고 여기서 이 음색 여행은 끝을 맺는다.



[1] 'phono-'(소리의)와 panorama(전경, 파노라마)의 합성어. '소리로 찍은 전경'이란 뜻.[2] '내 왈츠마스크 모음곡 24곡과 트리아콘타메론 모음곡 30곡은 오로지 3박자 뿐이다.' 라는 본인의 각주가 달려있다.[3] 인도네시아 음악 문서를 보면 알 수 있지만 카라위탄(karawitan)의 오기로 보인다.[4] 네덜란드령 당시의 철자법이며, 오늘날 철자법으론 kanyut이 맞는다.[5] 네덜란드 출신의 작곡가로서 고도프스키처럼 세계 여러곳을 여행했었는데 후에 자바에 완전히 정착했다.[6] 머릿말과 부록 각 1페이지 + 12곡 각각 1페이지씩[7] 본 문서에도 각 곡 설명에 인용문으로 번역되어있다.[8] 제목은 '안내서(guide)'라 되어있지만 형식은 논문이기 때문에 양이 제법 되므로 주의.[9] 아래 연주 영상에서 2분 18~27초 구간[10] 참고로 자바에는 레-미♭-솔♯-라-시♭로 구성된 플록 븜(pelog bem)이라는 5음 음계가 있다.[11] 라(D)음을 으뜸음으로 하는 일본의 율선법(律旋法)과 완전히 똑같다![12] 오늘날 인도네시아어 철자법에 따르면 Hari Besar가 맞고, 'The Great Day'는 고도프스키 본인이 달은 설명이지만 Hari Besar는 그냥 공휴일 내지 기념일을 의미한다.[13] 이 파트는 도돌이표 지시가 있기 때문에 1:17에 한 번 더 나온다.[14] 당연한 얘기지만 비유적인 표현이다. 브로모 화산 분화구 주변에 모래 언덕이 굉장히 넓게 깔려 있다. 구글 지도의 위성 사진에 의하면 분화구 오른편에 '속삭이는 모래 언덕(Whispering Sand Dunes)'이라는 이름이 붙은 곳도 보인다.[15] 원문 sulphurous는 '유황의' 라는 뜻 말고도 '지옥불 같은'이란 의미도 있다.[16] 원문 Cui Bono?는 원래 '누가 이득을 보는가?(for whose benefit?; who stands to gain from this?)'라는 뜻이지만, 종종 '무슨 목적으로?(for what purpose?; of what utility is this?)'라는 의미로 오용되기도 한다.[17] 발음기호가 bœy̯.tənzɔrx(뵈위턴조르흐)이므로 사실 이 발음 표기도 틀렸다(……). 여담으로 네덜란드어 문서에도 나와있듯이 œy는 거의 '아위'처럼 발음하는 경향이 있어 실제론 '바위턴조르흐'에 가깝게 들린다.[18]보고르(Bogor)[19]자카르타[20]자카르타[21] 여자 술탄[22] 푸가 양식으로 시작하는 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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