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6-06 23:15:42

일망타진

고사성어
그물 [1] 다할

1. 개요2. 출전3. 미디어 믹스에서4. 여담

1. 개요

'한 번의 그물질로 (물고기를) 다 잡는다'는 뜻으로, 어떤 무리를 한꺼번에 모조리 다 잡는 경우를 가리키는 고사성어이다.

2. 출전

京師百司庫務,每年春秋賽神,各以本司餘物貨易,以具酒饌,至時,吏史列坐,合樂終日。慶歷中,蘇舜欽提舉進奏院,至秋賽,承例貨拆封紙以充。舜欽欲因其舉樂,而召館閣同舍,遂自以十金助席,預會之客,亦醵金有差。酒酣,命去優伶,卻吏史,而更召兩軍女伎。先是,洪州人太子中舍李定願預醵廁會,而舜欽不納。定銜之,遂騰謗於都下。既而御史劉元瑜有所希合,彈奏其事。事下右軍窮治,舜欽以監主自盜論,削籍為民。坐客皆斥逐,梅堯臣亦被逐者也。堯臣作《客至》詩曰:「客有十人至,共食一鼎珍。一客不得食,覆鼎傷眾賓。」蓋為定發也。劉待制元瑜既彈蘇舜欽,而連坐者甚眾,同時俊彥,為之一空。劉見宰相曰:「聊為相公一網打盡。」是時南郊大禮,而舜欽之獄,斷於赦前數日。舜欽有詩曰:「不及雞竿下坐人」,蓋謂不得預赦免之囚也。舜欽死,歐陽文忠公序其文集,敘及賽神之事,略曰:「一時俊彥,舉網而盡矣」,蓋述御史之言也。舜欽以大理評事、集賢校理廢為民,後二年,得湖州長史,年四十餘,卒。

수도에 있는 모든 벼슬아치들은 곳간에 힘써서 매년 봄 가을에 신에게 제사를 지냈는데, 각각은 벼슬에 근거하여 오래된 물건을 바꿔서 술과 음식을 갖췄으며, 때가 이르면 관리와 문인들을 나란히 앉히고 종일토록 합주를 하였다. 경력(慶歷)[2] 중에, 소순음(蘇舜欽)이 진주원(進奏院)을 관리하였는데, 가을 제사에 이르니, 관례에 따라 물건은 (기부한) 봉지를 뜯어서 채웠다. 소순음은 음악 연주를 부탁하고 관청 동료들을 초대하고자, 결국 자릿세를 10금으로써 하고, 미리 모인 손님 역시 급에 따라 돈을 거두었으며, 술이 취하자 배우와 말단 관리를 돌아가게 하고선 곧 양쪽 군대의 기녀를 불렀다. 이에 앞서, 홍주(洪州) 사람 태자중사(太子中舍) 이정(李定)이 옆 모임에서 미리 (돈을) 거두고자 했는데 소순흠이 용납하지 않아서, 그걸 원망하고는 끝내 수도에서 얕보고 비방하였는데, 나중에 어사(御史) 유원유(劉元瑜)가 아첨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 그 일의 죄상을 (상부에) 알렸다. 일이 벌어지자 우군(右軍)의 지휘를 뺏기고, 소순흠은 감시하고 주관하는 자가 도적이 되었다는 논란으로, 관직을 박탈당하고선 서민이 되었다. 참석했던 손님들은 모두 내쫓겼으며, 매요신(梅堯臣) 역시 쫓겨난 자가 되었다. 매요신은 '손님이 도착'이라는 시를 지어 말하길, "손님이 열 명 도착하니, 함께 한 솥의 음식을 먹었다. 한 손님이 먹지를 못하자, 솥을 뒤집어 많은 손님을 해쳤다."고 했으니, 대체로 정론을 밝힌 것이다. 유원유가 소순흠을 탄핵하자 연루된 자들이 매우 많아서, 동시에 뛰어난 준걸들이 그것으로 한번에 없어졌다. 유원유가 재상을 만나서 말하길, "재상 어르신을 위하고자 한 번의 그물질로 모두 다 잡았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때 남교대례(南郊大禮)[3]를 하였으나 소순흠의 재판은 사면령 며칠 전에 결정됐다. 소순흠이 시에서 말하길, "사면 깃발(雞竿)[4] 아래 앉아 있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라고 하였으니, 대체로 사면받은 죄인이 될 수 없었음을 말한다. 소순흠이 죽고 구양수는 문집에 서문을 썼는데 서문에서 신에게 제사 지내는 일을 언급하길, 대략 "일시에 뛰어난 준걸들이 그물에 다 걸리게 되었다"라고 말했으니 무릇 어사의 말[5]을 기술한 것이다. 소순흠은 대리평사(大理評事), 집현교리(集賢校理)[6]의 관직을 박탈당하고 서민이 되었는데, 2년 후에 호주장사(湖州長史)로 임명되었으나 40여 살의 나이에 갑자기 죽었다.
위태 『동헌필록 東軒筆錄』[7]
송인종 때 승상 두연(杜衍)이 평소 반대파와 격렬하게 다투었다. 그의 사위 소순흠(蘇舜欽)은 매년 관리들이 하는 제사를 주관했는데, 이때까지 해오던 관례에 따라 사람들에게 돈을 거두어 행사를 진행했다. 두연의 반대파는 이것이 사사로이 돈을 거둔 것이라 트집을 잡고는, 그걸 죄로 보아 제사에 참여한 모든 사람을 고발했다. 두연의 반대파 어사중승 왕공진(王拱辰) 아래에 있는 어사 유원유(劉元瑜)가 그 제사에 참여한 관리들을 전부 검거해보니, 모두 두연과 긴밀한 관계에 있었다. 이에 유원유는 크게 만족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한 번의 그물질로 모두 다 잡았다. (一網打盡)"

오늘날에는 범죄 조직을 한꺼번에 다 잡았을 때 종종 이 표현이 사용된다.

3. 미디어 믹스에서

4. 여담

  • 현대 중국어에서도 여전히 사용하는 고사성어다.

[1] 여기서는 '(물고기를) 잡을 타'로 쓰였다.[2] 1041년 11월~1048년까지. 송 인종의 연호이다.[3] 수도의 남쪽에서 하는 매우 큰 제사. 사면령을 내리기도 했다. 황제가 참석할 정도로 중요한 제사라서 대례(大禮)라고 한다.[4] 사면을 내릴 때 꽂는 깃발.[5] 어사 유원유의 말을 가리킨다.[6] 벼슬 이름.[7] 송사(宋史)와 십팔사략에도 관련 고사가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