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8-28 23:05:22

이승연(1861)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호 응오(應五) / 지강(芝崗, 芝岡)
본관 광주 이씨[1]
출생 1861년 10월 4일
경상도 칠곡도호부 퇴촌면 구암동
(현 대구광역시 북구 구암동)[2]
사망 1933년 4월 20일[3] (향년 71세)
경상북도 칠곡군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428호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1861년 10월 4일 경상도 칠곡도호부 퇴촌면 구암동(현 대구광역시 북구 구암동)에서 아버지 이이장(李以璋)과 어머니 파평 윤씨 윤유일(尹攸一)의 딸 사이의 3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큰아버지 이이형(李以珩)에 입양되었다.

1913년 7월 만주에 설치된 신흥무관학교의 경비조달을 위해 국내에 온 박경종으로부터 서간도의 항일전쟁 준비 상황을 전해 듣고, 병사 양성에 필요한 기금 20만원을 모아 조달하는 데에 찬동하여 그와 함께 경상북도 일원에서 군자금 모집활동을 전개하였다.

1914년 9월에도 만주에서 군자금 모집을 위해 온 황종언(黃鍾彦)·이형국(李衡國)[4]·이승화(李承和)[5]·이헌교(李憲敎)·이종태(李鍾泰)[6] 등과 20만원을 목표로 활동하다가 1915년 2월 체포되어 그해 8월 18일 경성지방법원의 예심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경성지방법원의 공판에 회부되었으며, 9월 2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7개월형(미결 구류 150일 산입)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19년에는 영남 유림의 파리장서 운동을 적극 지원하였다.

이후 1933년 3월 26일 사망하였다.

사후 198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으며,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2011년 10월 9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에 이장되었다.

[1] 좌통례공파(左通禮公派, 칠곡파)-휘 유경(遺慶)파 18세 연(淵) 항렬.[2] 출생지인 구암동 307번지에 그가 1905년 재건한 가옥이 이인술 가옥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3] 음력 3월 26일.[4] 초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 이상룡의 조카이다.[5] 초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 이상룡의 5촌 당숙이다.[6] 초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 이상룡의 조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