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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04년 5월 29일 |
경상북도 예안군 동하면 부라리 (현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 부포리 176번지) | |
사망 | 1950년 7월 1일 (향년 46세) |
본관 | 진성 이씨[1] |
상훈 |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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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사회주의 계열 독립유공자.2. 생애
1904년 5월 29일 경상북도 예안군 동하면 부라리(현 안동시 예안면 부포리 176번지)에서 아버지 이중진(李中進, 1875 ~ 1950.12.5.)[2]과 어머니 풍산 류씨(豊山 柳氏, ? ~ ?.4.25.)[3] 사이에서 5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이중진은 1904년(광무 8) 내장원(內藏院) 공업과(工業課) 주사(主事)를 지낸 인물이다.[4] 이후 상경하여 경기도 경성부 수표정(현 서울특별시 중구 수표동) 42번지에 거주하였다.중앙고등보통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25년 9월 27일 조선학생사회과학연구회의 창립을 주도하고 집행위원에 선임되었다. 모임의 구성원은 구제전문학교와 고등보통학교 학생으로 하였는데, 일본 제국 경찰은 이 단체가 위험하다고 판단하여 해산하라 명하였다. 이에 이천진(李天鎭)과 함께 경기도경찰국 고등과장을 찾아가 단체 이름만 바꾸면 다시 허가하겠노라는 답변을 받아냈고, '사회'라는 말을 빼 '조선학생과학연구회'로 개칭하였다. 이후 사업부를 맡아 학생도서관과 과학강좌 개설에 앞장섰고, 학술강연회를 주도하였다.
1926년 4월 정기총회에서는 이병립·조두원·박하균과 함께 임시집행부로 선출되었다. 이후 1926년 4월 26일 순종의 붕어 소식을 듣고 회원 및 동창생들과 함께 제2의 3.1 운동을 벌이기로 결의했다. 이선호는 이병립, 박두종, 박하균 등과 함께 6월 8일 경성부 서대문 밖 송림 안에서 세로 6촌, 가로 7촌 크기의 태극기 및 조선독립만세기 약 30매를 공동으로 작성하고, 6월 9일 동부 평동에 거주하는 김종찬의 집에서 장규정으로부터 빌린 명찰 인쇄기를 사용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의 문서 약 1만 매를 인쇄했다.
격문! 2천만 동포여, 원수를 몰아내자. 피의 대가는 자유이다. 대한독립만세!
이후 이선호는 중앙고등보통학교에서 동창생 권태성, 유면희, 연희전문학교 학생 권오상, 홍명식, 박한복에게 격문 몇 장과 태극기 몇 개를 나눠줬다. 6월 10일 당일 오전 9시경 수은동 단성사 앞에서 국장 행렬이 지나갈 때 소지한 격문과 태극기를 살포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 일로 체포되어 경성부 종로경찰서를 거쳐 서대문형무소로 이송되었다. 1926년 11월 1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및 출판법 위반 혐의에 대해 징역 1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5] 이에 공소를 제기했으나, 1927년 4월 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이른바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미결 구류일수 중 60일 본형에 산입)을 선고받아 결국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6] 또한 중앙고등보통학교로부터 퇴학 처분을 받았다.
1927년 9월 20일 만기 출옥한 뒤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도쿄도에 거주하면서 일본노동조합 전국협의회 후카가와 지부에 가담하여 노동운동에 적극 참여했고, 재건고려공산청년회 일본부에 가입하면서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에 참여했다. 그러던 1929년 1월부터 4월 사이에 안동군 예안면 동부동에 살던 박수만(朴壽萬)과 지난날의 동지 이천진 등에게 '무산자신문(無産者新聞)' 등 '불온 신문'을 '동경일일신문(東京日日新聞)'을 비롯한 유명 신문 속에 끼워 넣어 보냈다. 이후 발각되어 1930년 6월 4일 도쿄구재판소 검사국에서 이른바 출판법 위반 혐의로 벌금형 30엔을 선고받았다. 이후 일본 군사정권으로부터 요주의 인물로 낙인찍혀 여러 차례 검속되었다가 국내로 추방되었다.
[1] 상계파(上溪派)-원촌파(遠村派) 20세 호(鎬) 항렬.[2] 자는 성선(聖先).[3] 류창우(柳昌佑)의 딸이다.[4] #[5] 1926년 11월 17일 경성지방법원 판결문[6] 1927년 4월 1일 경성복심법원 판결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