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공부상서 상장군 이녹천 李錄千[1] | |
<colbgcolor=#fedc89><colcolor=#670000> 출생 | ? |
사망 | ? |
본관 | 경주 이씨 |
부모 | 이춘림(李春林) - 문하시랑[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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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의 무신. 부친은 문하시랑[A] 이춘림(李春林). 본관은 경주.2. 생애
1126년(인종 4) 2월 내시지후(內侍祗侯) 김찬(金粲)과 내시녹사(內侍錄事) 안보린(安甫鱗)이 이자겸(李資謙), 척준경(拓俊京) 일파를 제거하려는 인종의 의중을 알아차리고 동지추밀원사 지녹연(智祿延), 상장군 최탁(崔卓)과 오탁(吳卓), 대장군 권수(權秀), 장군 고석(高碩) 등과 함께 거사를 일으켰으나 실패하였다. 이에 이자겸, 척준경 등이 군사를 일으켜 대궐을 침범하여 궁궐을 불태우고, 왕을 협박하여 남궁(南宮)으로 옮기게 하고, 김찬은 멀리 유배 보내고 숙위(宿衛)하던 좌복야 홍관(洪灌)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을 죽였다. 이때 장군이었던 이녹천, 김단(金旦), 김언(金彦) 등은 달아나 목숨을 모면하였다.1135년(인종 13) 묘청의 난이 일어나자 상장군이었던 이녹천은 대장군 김태수(金台壽), 녹사(錄事) 정준(鄭俊)과 윤유한(尹惟翰), 군후(軍候) 위통원(魏通元) 등과 함께 파견되어 서해로부터 주사(舟師) 50척을 이끌고 토벌을 돕게 되었다. 이녹천이 철도(鐵島)에 이르렀는데 마침 날이 저물고 썰물이 되어 조수가 차길 기다려야 했음에도 서경에 빨리 당도하기 위해 무리하게 가다가 물이 얕은 곳에서 배가 좌초하였다. 이때 매복해 있던 서경 사람들이 화공을 펼치고 쇠뇌를 발사하니 전함으로 불길이 번져 병장(兵仗)이 모두 불에 타고 사졸들은 물에 빠져 죽은 자가 태반이었다. 이녹천은 간신히 몸만 빠져나왔다. 이때부터 서경 사람들이 관군을 업신여기기 시작했다.
1142년(인종 20) 공부상서 상장군(工部尙書 上將軍)에 임명되었다.
무신(武臣)이었던 이녹천의 영향으로 후손들은 대체로 무신으로 활약하였다. 손자 이중화(李仲和)는 병부상서 응양군 상호군[A]을 지냈다. 증손자[5] 이정핵(李廷翮)은 1229년(고종 16) 낭중을 거쳐 진양부사, 자문지유를 지냈다. 족보에서는 어사중승을 지냈다고 한다. 현손[6] 이숙진(李淑眞)은 1271년(원종 12) 안렴사로서 반란을 평정하는 등 활약했다. 이녹천의 8대손[7] 이길상(李吉祥)의 네 아들로부터 경주 이씨의 직장공파, 석탄공파, 진사공파, 교감공파가 분파되었다.
[1] 고려사에는 이녹천(李祿千)으로 기록되어 있다.[A] 족보의 기록으로 고려사 등에는 기록이 없다.[A] [A] [5] 이중화의 장남.[6] 이정핵의 장남.[7] 이숙진의 증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