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육근수 陸根洙 | |
출생 | 1923년 2월 2일 |
일제강점기 충청남도 대전군 대전면 중동 | |
사망 | 1953년 7월 14일 (향년 30세) |
강원도 김화군 이천동 | |
계급 | 준장[1] |
복무 | 대한민국 육군 |
복무 기간 | 1947~1953 |
참전 | 6.25 전쟁 |
학력 | 오사카 제2중학교 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3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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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군인이다.2. 생애
1945년 대전군 대전면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일본으로 유학해 1945년 오사카 제2중학교를 졸업했다. 해방 후 귀국했으며 1947년 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 3기로 졸업해 소위로 임관했다. 6.25 전쟁 당시 제8보병사단, 수도사단, 제2군단에서 정보참모로 복무했고 공을 세워 충무, 화랑, 을지무공훈장을 수여받았다.1952년 10월 대령으로 수도사단 기갑연대장으로 부임했으며 1953년 7월 중공군은 금성일대에 대공세를 감행했는데 당시 사단의 예비대로 1연대, 26연대를 지원하는 임무를 맡았다. 7월 13일 중공군이 1연대를 공격했고 1연대장 임익순 대령이 포로로 잡히는 등 전멸당할 위기에 놓이자 1연대를 구원하러 갔다.
하지만 중공군이 기동로간에 매복해있었고 기습을 가해 연대의 대오가 와해되는 상황이 발생했다. 새벽 4시 연대 지휘소까지 공격당했다. 이에 육근수는 이런 말을 남겼다.
혈우는 이미 요잠을 휩쓸었고, 성품은 근만에 이르렀다. 이 추로를 격파치 못하면 나의 생환이 있을 수 없다. 전통에 빛나는 나의 연대 사랑하는 나의 대대의 장병들은 나의 뒤를 따르라.
이후 부대원을 수습하고 방어에 돌입했으나 중공군의 총에 맞아 전사했다. 그의 시신을 수습하러 온 7중대 무반동포반원들 역시 전사하거나 부상을 입었다. 결국 시신은 하풍동일대에 야산에 매장되었다.
사후 준장으로 추서되었다. 시신을 수습하지 못했기에 국립서울현충원 장성 묘역 안장자 증 유일하게 위패만 있다.
3. 여담
- 2016년 7월 이달의 호국인물로 선정되었다.
[1] 추서 계급